천의 얼굴로 변신하는 차세대 최고의 여자 배우 장영남

안쓰러울 정도로 가녀린 이 여자, 무대에만 서면 강력한 포스를 발산한다. 마주 앉아 이야기할 때는 그렇게 사려 깊고, 상대방을 배려하고, 다정할 수 없는데, 무대에서는 천의 얼굴 딴 사람으로 돌변한다. 배우 장영남이다.

연극계에서 최고의 차세대 여자 배우, 같이 연극을 하고 싶은 배우 1위에 꼽히는 인물. 연출가들 사이 섭외 0순위인 배우 장영남은 요즘 쉴 틈이 없다. 올해만 해도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 <친정 엄마> <내 동생의 머리를 누가 깎았나?>에 이어 9월 6일부터는 <멜로드라마>의 무대에 올랐다. <멜로드라마>는 뮤지컬 <오! 당신이 잠든 사이>와 <김종욱 찾기>를 히트시키면서 한국뮤지컬대상, 더 뮤지컬 어워즈 등을 수상한 젊은 연출가 장유정 씨가 정통 연극에 도전하는 작품. 뮤지컬계의 실력자 장유정과 최고의 배우 장영남의 만남으로 기대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8월 29일, 막바지 연습이 한창인 대학로의 연습실을 찾았다. 자그마한 체구의 장영남은 화장기 없는 얼굴에 청바지와 헐렁한 티셔츠를 걸치고 있었다. 그 차림만으로도 그는 ‘이 시대 여성들의 롤모델’ 유경으로 완벽하게 변신했다. 빈틈없이 일 처리를 하는 실력 있는 큐레이터 유경은 가정생활도 완벽을 추구한다. 성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남들이 우리를 완벽한 부부로 봐줬으면 좋겠어”라며 남편 팔짱을 낀다. 남편을 정말 사랑하는지는 자신도 잘 모른다. 그게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라면, 내면에는 무언가가 들끓고 있다. 유경 자신이 기획한 전시회를 설명하면서 한 말 “욕망이란 누르면 누를수록 더 큰 반동으로 튀어 나오고 만다”처럼.

결혼은 중요한 약속이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깰 수 없다고 믿는 유경. 그에게도 흔들리는 순간이 찾아온다. 완벽한 아내에게 기죽어 있던 남편이 지능이 살짝 모자라는 미현에게 사랑을 느낄 때 유경은 심장 때문에 언제 죽을지 모른다며 사랑을 호소하는 청년 재현에게서 ‘가슴에 있는 무언가가 한꺼번에 터지는 느낌’을 느낀다. 그런데 미현과 재현은 남매다. 불륜을 다루고 있는데다 얽히고설킨 관계를 보여주지만, 추하지 않다. 유경과 남편 찬일도, 미현 재현 남매도, 재현만을 바라보며 사랑을 구하는 또 다른 여성 소이도 모두 연민이 가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장영남 씨는 자신이 나오지 않는 신에서도 상대 남자 배우와 연습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연기생활 13년째인 30대 중견 배우. 바쁜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항상 치열하게 연습에 임해 후배 배우들이 감히 흐트러지지 못한다고 한다.


다음 날 인터뷰를 하자고 청하니 “좀 미룰 수 없을까요?”라고 정중히 묻는다. 연습이 덜 돼 여유가 없다면서. 매일 밤 10시, 11시까지 연습한다고 한다. 결국 이틀 뒤 낮 12시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그날 약속 장소에 도착해 보니 그가 30분 전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었단다. 약속이 잡히면 늦을까 봐 불안해 미리 가서 기다릴 때가 많다고 한다.

“이리저리 뒤척이다 새벽 3시가 넘어서야 잠들었어요. 생각이 많아져서요. 새 작품을 올리기 전에는 항상 두렵고 긴장됩니다.”

그는 막이 오를 때까지 끊임없이 배역에 대한 연구를 거듭한다. 전날도 연출가에게 “내 연기가 너무 떴다 싶으면 이야기해 달라”고 했다고. 연출가 장유정 씨는 장영남 씨에 대해 “오전에는 공주, 오후에는 창녀로 완벽히 변신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독보적인 배우”라고 칭찬한다. 파워풀한 연기에 스펙트럼(연기 폭)이 굉장하다고.

“희극과 비극 어느 쪽이나 완벽하게 소화해 내죠. 코미디도 얼마나 천연덕스럽고 뻔뻔하게 잘하시는데요. 예민하고 섬세한데다 뛰어난 관찰력으로 배역을 생생하게 구체적으로 표현해 냅니다. 어떤 때는 ‘이 사람 머릿속에는 뭐가 들어 있을까?’ 궁금해요.”

원래는 유경을 훨씬 냉혈한으로 표현할 생각이었는데, 장영남 씨가 이 역할을 맡은 후 복잡한 내면을 가진, 연민이 가는 인물로 변모했다고 한다. 장영남 씨가 인간을 이해하는 폭이 남달랐기 때문이라고.

버자이너 모놀로그.

“무대에서 새로운 나를 발견해요”

그런데 장영남 씨가 스스로를 평가하는 것은 달랐다.

“우유부단하고, 헐렁헐렁하죠. 그저 제가 하는 일을 제대로 잘하고 싶을 뿐이에요.”

“아니, 이 사람이 그 사람이었나?” 감탄할 정도로 변신하는 그의 연기에 빠져 마니아가 되는 팬이 많다는 평에 대해서는 “매번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배우로서의 열망인데….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할 뿐이지요”라고 대답한다.

연기를 빼면 그의 생활은 단순하다. 무대나 연습실에 있지 않으면 보통 집에서 나오지 않는다. 가슴 찡한 휴먼 다큐멘터리를 좋아하고, 최근에는 천명관의 소설 《고래》를 인상 깊게 읽었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그는 혼자 놀기의 달인이었다고 한다. 다섯 자매 중 막내였는데 언니들이 놀아 주지 않아 혼자 인형놀이도 하고 소꿉놀이도 했다. 문방구에서 여자 종이 인형을 사오면 남자 인형은 자신이 직접 그려 인형놀이를 했다. 대여섯 살 때는 잠시 아역 배우를 한 적도 있다. 언니들 손에 이끌려 아역배우 선발대회에 나간 후 드라마와 영화, CF에 출연했다. 정애리, 김미숙, 하명중이 출연한 이두용 감독의 영화 <우산 속의 세 여자>가 그때 출연한 작품. 그러나 그때는 연기가 뭔지 몰랐고, 그저 노는 게 좋았다.


“촬영장에서 그네를 타다가 내려오라고 하면 울고불고했지요. 촬영 카메라가 도깨비 눈처럼 무섭고 싫었어요. 안 하겠다고 엄마한테 빌다시피 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난데없이 계원예고 연극영화과에 들어갔다. 버스 차창 밖으로 오렌지색 스쿨버스가 지나가는 것을 봤는데, 교복 입은 학생들이 웃고 떠드는 모습이 자유로워 보였다.

“무조건 그 학교에 가겠다고 했죠. 탤런트 오현경 씨가 집안끼리 잘 아는 언니인데, 그 학교 연극영화과에 다니고 있었어요. 원래 미대에 갈 생각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계원예고에도 미술과가 있더라고요.”

미술과가 없는 줄 알고 연극영화과로 간 것이 지금 생각하니 운명이었던 것 같다고 한다. 그곳에서 자신을 새롭게 발견했으니.

“어릴 때부터 사람들 앞에 서면 얼굴이 빨개지고 몸을 배배 틀었어요. 선생님이 ‘책 읽어 볼 사람?’하시면 마음속으로는 10번도 더 손을 들면서도 실제로는 못했죠. 그러던 제가 무대 위에서는 달라지는 거예요. ‘영남아, 너 대견하다. 더 열심히 해. 그렇게 사람들 앞에서 똑 부러지게 발표하고, 씩씩해져 봐’라고 스스로를 응원했죠.”

계원예고를 거쳐 서울예술대학을 졸업하고, 1995년 극단 목화에 입단했다. 그는 목화에 들어가자마자 운 좋게 〈로미오와 줄리엣〉의 여주인공 줄리엣 역에 캐스팅됐다. 그런데 정작 무대 위 줄리엣은 그가 아니었다.

“제가 제대로 못해 낸 거지요. 오태석 선생님이 보다 못해 그전에 오디션을 봤던 배우 2명을 불러오시더니 저를 포함하여 3명 모두에게 연습을 시키시는 거예요. 그리고 ‘너, 그동안 수고했다’ 하시며 제 대학 동기에게 줄리엣 역을 하라고 하셨어요.”

얼마나 참혹했을지 가히 짐작이 갔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물러서지 않았다. “이제 나오지 말라는 이야기입니까?”라고 물은 뒤 코러스라도 하겠다고 했다. 연출가는 “너, 로미오 친구 해”라며 배역을 줬다.

“결국 ‘배다 배’라는 대사 한마디를 따냈죠.”

그 후로도 연습 때마다 수없이 욕을 먹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연기에 대한 강한 집념, 엄정한 자세가 그때 길러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활동 영역은 연극뿐 아니라 영화, 드라마 등 폭넓게 퍼져 있다. 아무리 작은 배역으로 나와도 그는 개성적인 연기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연극을 잘 안 보는 사람들도 영화 <아는 여자>, <박수칠 때 떠나라> 드라마 〈달자의 봄〉에 등장한 그를 기억한다.

그는 드라마 출연 후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는 것에 대해 “신기하면서도 씁쓸하다”고 말한다. 카메라라는 기계 앞에서 연기하는 게 아직도 낯설다는 그는 관객과 직접 만나는 무대를 가장 사랑한다. 객석을 빽빽이 채운 관객들이 지켜볼 때 그 기운이 전달되면서 ‘훅’하고 상기된다고. 눈이나 비가 많이 내려 관객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한 날, 드문드문 앉아 있는 관객을 볼 때도 힘이 난다. 무대에서의 그 생생함, 현장성이 그를 사로잡는다.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작품을 해온 장영남. 그중에서 2001년 백상예술대상 신인연기상을 안긴 〈분장실〉은 그에게 특히 애착이 가는 작품이다.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
“제대로 된 배우 한 번 못해 보고 무대 뒤에서 대사를 읽어 주는 프롬프터만 하다 죽은 귀신 역이었는데, 너무나 사랑스러웠어요. 배우가 되고자 하는 열망과 집념이 마치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았지요.”

2002년에는 그에게 좌절을 안기고 더욱 분발하게 했던 줄리엣 역으로 동아연극상 여자연기상을 받았다. 지난해 9월부터 석 달간 공연한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그를 한 단계 성숙시켰다고 한다.

“노처녀 소리를 듣는 30대가 되고 보니 자꾸 나를 점검하고 정리하려 들더라고요. 나를 좋게 봐주는 사람이 늘어나는 만큼 잘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짓누르고, 그러면서 자꾸 마음이 닫히는 것 같았어요. 그때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하게 됐죠. 혼자 무대에 올라 1시간 40분을 끌고 간다는 게 굉장히 외롭고 두렵게 느껴졌죠. ‘확 그냥 깨지든지, 한번 갈 데까지 가보자’라는 생각으로 임했습니다.”

왼쪽부터_ 꼽추 리차드 3세, 친정엄마, 아가멤논 카산드라.
그 고비를 넘기며 ‘나는 배우’라는 인식이 확고해졌다고 한다. 요즘 그는 결혼해서 안정되게 살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한다.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삶도 경험해 보고 싶다. “아기를 너무너무 낳고 싶다”고도 한다. 그는 좋은 배우가 되려면 착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착한 것이 뭐냐고 묻자 “남의 이야기 잘 들어주고,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마음이 열려 있고, 시기 질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 연출가는 장영남 씨가 연습 도중 쉬는 시간에 혼자 앉아 선배 배우의 해진 연습 신발을 깁고 있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무대 위에 오르면 천의 얼굴로 변신하는 착한 배우 장영남. 그의 팬이 될 것 같다.

사진 : 이창주
  • 2007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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