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현 ‘슈콤마보니’ 대표

여성의 욕망에 충실한 구두

영화 <분홍신>에서 피할 수 없는 마력으로 여성들을 매혹하는 분홍 구두, TV 드라마 <히트>에서 강력계 형사로 분한 고현정 내면에 감춰진 여성성을 상징하는 거실 진열장 속 구두들…. 영화와 드라마에서 강렬한 이미지로 등장했던 이 구두들이 알고 보니 모두 디자이너 슈즈 브랜드 ‘슈콤마보니’의 작품들이다. 여배우들이 각종 시상식 무대에 설 때 가장 즐겨 신는 구두이기도 하다.

슈콤마보니? 쉽지 않은 이 이름이 사실은 슈(shoe) 콤마(쉼표) 보니라는 뜻이란다. 보니는 이보현 ‘슈콤마보니’ 대표의 영어식 이름. 어려워 보이지만 단순한 이름처럼, 슈콤마보니도 자연스럽게 잉태돼 어느 날 세상에 나왔다. 이보현 대표를 서울 청담동 명품거리 뒤편에 자리 잡은 ‘슈콤마보니’ 본점에서 만났다. 설치미술처럼 앤티크 가구 위에 개성적인 구두들이 놓여 있는 작은 매장이었다. 빨강ㆍ노랑ㆍ파랑ㆍ녹색ㆍ금색ㆍ은색 등 색상이나 몇 개의 끈만으로 발을 감싸는 디자인이 모두 과감한 구두들. 구두의 망사천에 스와로브스키의 큼지막한 크리스털들을 박아 넣은 ‘보석구두’도 눈에 띄었다. 여성들의 내면에 잠자고 있는 구두에 대한 환상을 마음껏 펼쳐 놓은 공간인 듯했다. 그 때문일까? 한 무리의 일본인 관광객들이 들어오더니 자리를 뜨지 못한다. 송혜교, 손예진, 이효리, 보아, 이혜영, 엄정화 등 스타들도 직접 찾아와 여러 켤레씩 사간다고.

‘슈콤마보니’의 위층에 있는 카페로 안내한 이보현 대표는 “이 찻집을 오래전부터 드나들었는데, 아래층에 있던 꽃가게를 보면서 ‘내가 만든 신발을 저곳에 진열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꽃가게에 이전 안내문이 붙었더라고요. 이틀 만에 그자리를 계약하고, 시작했지요”라고 ‘슈콤마보니’의 탄생을 설명한다. 그자리를 점찍은 지 8년 만이란다. 즉흥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먹은 바를 포기하지 않는 강기가 느껴진다.

무작정 구두에 매혹되어 세상에 없는 구두를 만들어 내는 디자이너로 옮겨 가는 데도 이런 끈질김이 한몫했다. 그는 자신이 일찍이 명품 족이었다고 고백한다. 초등학생이던 1970년대, 대학생 언니의 미니스커트와 판탈롱을 입어 보곤 했다는 그는 1982년 연세대 의생활학과에 입학한 후 본격적인 멋내기를 시작했다. 암울했던 그 시대에도 고급 양장점에서 옷을 맞춰 입고 부츠를 특별 주문제작해서 신었다고 한다. ‘부잣집 딸이었구나’ 짐작했더니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으면 옷 사고 구두 샀다”고 설명한다.

대학 졸업 후 남성복 브랜드의 디자이너가 된 후에도 그의 쇼핑벽은 계속됐다. “월급을 다 쓰고도 모자라 집에서 용돈을 받아 써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구두에도 엄청 까탈을 떨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마음에 드는 구두를 찾지 못해 외국 출장길에 여러 켤레 사들고 들어오곤 했다. 디자인 실장을 하면서 옷에 맞출 구두를 주문하기 위해 구두 공장을 드나들 때는 구두가 너무 좋아 “공장에 제 책상 하나 놓아 주세요”라고 농담하기도 했고. 그가 의상에서 구두로 방향을 선회한 것은 1994년, 남성복 디자이너로 활동한 지 9년 만이었다.


남성복 디자이너 9년 만에 구두로 방향 바꿔

“아직 늦은 나이가 아니니 마흔 살까지는 새로운 일을 시도했다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시간이 있겠다는 계산을 했지요.”

처음에는 이탈리아 구두를 수입해서 파는 일을 했다. 이탈리아에서 만나 친해진 스페인 친구가 “구두 팔아 보지 않을래?”라고 묻더니 수백 켤레의 샘플 구두를 무작정 보내왔다. 얼떨결에 수입상이 되어 1년 반 정도 압구정동에서 수입구두 멀티매장을 운영했다. 그러다 스페인 구두 공장에서 만든 구두를 우리나라 제화업체에 납품하게 된 그는 한 달에 한 번씩 스페인으로 날아가 공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자신이 원하는 디자인의 구두가 어떤 과정을 통해 실현되는지 수백 가지에 달하는 공정을 익혀 나갔다. 아침부터 밤까지 기술자들 커피를 타주면서 하루 종일 함께 생활했다.

그런데 얼마 안 돼 외환위기 사태가 터졌다. ‘내 길이 아닌가 보다’하고 포기하려는데 스페인 친구가 “5년만 버텨 보라”고 충고했다. 친구 말대로 버티다 보니 길이 보이고, 결실이 나타나더라고 한다. 납품이 아닌, 내 이름 ‘슈콤마보니’를 내걸고 구두를 만들기 시작한 게 2003년.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내가 갖고 싶었던 신발을 내놓을 수 있다면 장사가 되도 좋고, 안 되도 좋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최고의 가죽을 써서 갖가지 디자인 실험을 했어요. 가죽이 부드럽지만 약해서 쉽게 찢어지기도 했고, 힘을 잘 받지 못하기도 했지요. 끊임없는 실험 끝에 나온, 최고의 기술자가 최고의 자재로 만든 구두라는 게 우리 자부심이었지요.”

오픈을 앞두고 살짝 걱정이 됐는데, 먼저 패션 종사자들이 “이런 신발도 있구나” 하면서 너무 좋아했다고 한다. 그들로부터 끊임없이 소문이 나면서 멋쟁이들이 몰리고, 단골이 늘어갔다. 디자인마다 몇 켤레씩밖에 만들지 않는 소량 다품종이 원칙. 그로 인해 우리나라에도 ‘디자이너 슈즈’라는 새로운 영역이 생겼다.

“외국 명품 브랜드에서 신발을 산 후 우리 가게에 들른 손님이 그 신발을 반품하고 와서 우리 신발을 사시더라고요.”

‘슈콤마보니’도 명품대접을 받고 있다. 롯데백화점과 갤러리아백화점, 대구 대백플라자 등 매장이 12개로 늘었고, 얼마 전 문을 연 여주 명품 아웃렛에도 입점했다. 일본에서는 그의 구두가 도쿄 롯폰기 매장에서 지미추, 마놀로 블라닉 등 세계적인 디자이너 구두와 함께 팔리고 있고, 미국 LA에도 입성했다. 중국에서는 오는 8월 말 가을-겨울 상품부터 선보일 계획. 지난 2006년 9월 파리에서 열리는 디자이너 액세서리 브랜드 페어인 ‘프리미어 클라스’에 참가한 후 유럽 수출 길도 열렸다.

“일단 선을 보인다는 생각으로 참가했기에 주문받는 것은 기대도 안했는데, 바이어들이 관심을 보이더라고요. 주문을 많이 받았죠. 운임비까지 합해 한 켤레 160유로면 결코 싼 가격이 아닌데 말입니다. 그 후 파리에 출장 갔던 후배가 ‘언니 신발이 샹젤리제 거리에서 팔리고 있다’며 놀라서 전화했더라고요.”


그는 ‘슈콤마보니’의 인기 비결을 “이제껏 보지 못했던 신발을 내놓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분석한다. 까다로운 취향과 거리낌 없이 자신의 욕망에 솔직했던 성격이 외국 명품과 경쟁할 수 있는 구두를 내놓는 데 바탕이 된 듯하다. 최고의 멋쟁이들에게 인정받아야 하는 디자이너 슈즈. 이를 위한 ‘시장조사’는 그에게 생활인 듯했다.

“동대문 보세시장부터 백화점, 강남 거리를 다니며 싼 것부터 비싼 것까지 신발을 보고 다니죠. 신발에 자연히 눈길이 가니 안 보려야 안 볼 수가 없어요. 클럽 파티에도 자주 가는데, 패션 리더들이 어떤 차림인지 눈여겨보게 돼요. 외국에 가면 일부러 잘나간다는 클럽을 찾아다닙니다. 다른 디자이너들에게도 디자인은 책상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강조해요.”

몸에 딱 붙는 청바지에 가슴이 깊게 파인 헐렁한 셔츠, 긴 생머리의 그를 보면 40대 중반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는다. 나이 제한이 있다는 물 좋은 클럽에서도 입장을 거절당한 적이 없다고. 옆에 있던 직원이 “언제든 가장 멋진 차림으로 돋보이는 분이 우리 사장님”이라며 거든다.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는데도 사람들 대부분이 “결혼 안 하셨죠?”라며 묻는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미래도 의상 콘셉트로 준비하고 있었다.

“50대 중반이 넘으면 하이힐을 신기 어색할 테니 납작한 플랫 슈즈에 롱 스커트, 그레이나 블랙 셔츠 정도가 어울릴 것 같아요.”

그러나 그의 꿈은 멈추지 않았다. 세계적인 브랜드로 도약하려면 유럽에 기반을 둬야 할 텐데, 이를 어떻게 실현할지 고민 중이다. 물 흐르듯이 천천히, 그리고 끈질기게.

사진 : 김선아
  • 2007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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