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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펀치 한번 맞아 보실래요?

무에타이 플라이급 챔피언 이정희

“내년 마카오에서 열릴 세계우슈청소년선수권대회에 나가 좋은 성적을 거두고 싶어요. 그리고 대학 경호학과에 진학해 열심히 공부한 후 강력계 형사가 되는 게 제 꿈이에요.”
무림에 ‘얼짱’ ‘몸짱’ 소녀가 출현했다. 무에타이 플라이급 챔피언 이정희 양(18세). 커다란 눈동자에 갸름한 얼굴, 169cm의 키에 52kg의 몸무게, 외모만 보고 가냘픈 여고생으로 여겼다간 큰코다친다. 링 밖에서는 예쁘고 청초한 여고생이지만 링에만 오르면 먹이를 쫓는 표범처럼 무섭게 돌변하기 때문.

시합이나 훈련이 없을 때는 혼자서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는 이양을 제4회 아시아청소년우슈선수권대회가 열리는 경북 영주에서 만났다. 그는 한국 대표로 선발되어 이 대회에 출전, 종주국인 중국 선수들이 메달을 싹쓸이하는 가운데 천금 같은 동메달을 획득했다. 무에타이에서 우슈로 종목을 바꿨고, 국제대회 경험이 전혀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꽤 좋은 성적을 올린 것인데도 그는 베트남 선수에게 패해 결승 진출이 좌절된 것이 못내 속상해 펑펑 울었다고 한다. 무에타이 챔피언인 그가 우슈 대회에 출전한 이유는 뭘까. 그에 대한 답은 이양을 발굴한 전증남 골드이글아카데미 관장이 대신했다.

“무에타이는 세계적으로 공인된 정식 스포츠 종목이 아니어서 국제대회에 나갈 기회가 없습니다. 국내대회에서 우승을 해도 그건 그냥 명예일 뿐 실적이 되지는 않죠. 세계 선수들과 겨뤄 보고 싶은 욕심도 있고, 또 대학 진학을 위해서는 국제대회에서 입상해야 하는 실적이 필요해 출전하게 됐습니다.”

제4회 아시아청소년우슈선수권대회에서 동메달을 딴 후 부모님과 함께.
우슈는 중국 전통 무예인 쿵푸의 다른 이름으로, 2008년 북경올림픽 시범 종목으로 채택된 스포츠. 기본 동작이나 경기 규칙이 무에타이와 킥복싱의 중간쯤 된다. 중국이 국가를 대표하는 스포츠로 강력하게 밀고 있는 상황이라 2012년 올림픽 때는 정식 종목으로 채택될 가능성이 많다. 이에 대비해 국내에서도 선수 발굴과 육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전 관장은 이양에 대해 “무에타이 입문 1년여 만에 챔피언 벨트를 차지했다”며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는 콤비네션 동작이 빠른 데다 승부 근성이 강해 내년 세계대회 때는 더 좋은 성적을 낼 것”이라고 말했다.

이정희 양은 현재 서울 홍익여자디자인문화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다. 디자이너를 꿈꾸던 그가 무에타이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중학교 3학년 겨울. 하루가 다르게 불어나는 체중(당시 60kg) 때문에 태보 다이어트를 해볼까 해서 집 근처 체육관을 찾은 것이 인연이 되었다고 한다. 곱게 키운 딸이 주먹질에 발길질까지 하는 운동을 한다고 했을 때 부모님이 순순히 허락하더냐고 묻자 이양은 이렇게 답한다.

“반대하기는커녕 오히려 환영하는 분위기였어요. 제가 워낙 말수도 적고 내성적인데, 운동을 하면 좀 활달해질 거라고 믿으셨던 것 같아요. 선수로 활동하는 지금도 어디 다칠까 걱정은 하시면서도 못 하게 말리지는 않으세요.”

무에타이 56kg급 챔피언이 되기까지 치렀던 경기 장면들.

상대 선수가 쓰러지면 마음 아파요

샌드백을 상대로 펀치와 하이 킥을 날리며 땀 흘린 지 5개월. 전 관장은 재미 삼아 남자선수들과 겨루기를 시켜 보곤 이양의 펀치력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그해 전북 군산에서 열린 무에타이 신인왕전에 경험 삼아 출전시켰다. 남자선수를 상대로 연습하다 얼굴을 맞을 때면 눈물을 보이던 그가 링 위에 올라서자 눈빛이 무섭게 변했다. 한없이 여리기만 하던 이양이 아니었다. 이 대회 56kg급에서 이양은 강력한 우승 후보를 판정승으로 누르고 신인왕에 올랐고, 올해 4월 있었던 플라이급 타이틀매치에서 전 챔피언 김태경 선수를 누르고 챔피언에 등극했다. 파란이었다. 김태경은 킥복싱, 격투기, 무에타이 등 세 종목의 챔피언 타이틀을 동시에 갖고 있는 데다 경력이 7~8년 된 선수여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던 것. 이후 이정희 양의 이름 앞에는 ‘얼짱 파이터’에 이어 ‘천재 파이터’라는 수식어가 하나 더 붙었다. 그만큼 인기도 많아 그를 응원하는 팬클럽까지 생겨났다. 인터넷에는 이들 팬들이 올려놓은 그의 경기 장면 동영상이 돌아다니고 있다.

“응원해 주면 힘이 나죠. 그렇지만 자만하지 않으려고 해요. 자만하면 방심하게 되니까요.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땀 흘리는 것 자체를 즐기려고 합니다.”


이양은 업어치기를 50회씩 하고 팔굽혀펴기를 연속해서 100회 이상 해도 끄떡없을 정도로 체력이 뛰어나다. 펀치력과 하이 킥 파워도 국내 여자선수 중에서는 따라올 자가 없다. 게다가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요령을 피우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딱 한 가지 단점이 있다. 마음이 여려 상대 선수가 쓰러지거나 얼굴을 맞아 고개를 숙이면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한다는 것. 지난 타이틀매치 때는 경기가 끝난 후 상대 선수에게 “언니 미안해, 괜찮아?” 하며 전전긍긍해 전 관장이 호되게 야단을 쳤다고 한다.

“링에 올라서면 이겨야겠다는 생각에 주먹을 날리는데 상대가 맞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 괜히 미안하고 마음이 아파요. 관장님이 그런 태도를 고치라고 해서 노력하는데도 쉽게 바뀌지 않아요. 그것 때문에 특전사 공수부대에 들어가 훈련도 했는데….”

부모님이 경기도 일산에서 어린이집을 경영해서일까. 태권도 1단, 킥복싱 2단, 특전무술 2단, 우슈 2단의 무술 고수인 이 소녀는 여전히 어린애 같은 순수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합숙훈련 돌입 일주일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엄마가 해주는 밥이 먹고 싶단다. 그런 그에게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체중조절”이라고 답한다.

“한때는 48kg까지 뺀 적도 있어요. 이번 대회 때도 300g 정도를 줄이느라 엄청 고생했어요. 제가 물만 마셔도 살이 찌는 체질이거든요.”

식탁 앞의 냉면 몇 가락을 먹을까 말까 고민할 정도로 살인적인 다이어트를 감행한 끝에 겨우 체중을 맞췄다고 한다. 그런 이양에게 “꿈이 뭐냐”고 물으니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우선은 내년 마카오에서 열릴 세계우슈청소년선수권대회에 나가 좋은 성적을 거두고 싶어요. 그리고 대학 경호학과에 진학해 열심히 공부한 후 강력계 형사가 되는 게 제 꿈이에요. 영화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의 여자주인공처럼요.”

오후 훈련을 위해 질끈 동여맨 그의 생머리가 예쁘고 야무져 보였다.

사진 : 이창주
  • 2007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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