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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경지 오른 숨은 예인 찾아 무대에 세우다

전통 공연예술 연출가 진옥섭

“저는 20년 동안 보도 자료를 썼습니다. A4 용지가 저에겐 ‘사각의 링’이었죠. 보도 자료도 신문이나 방송처럼 마감이 있기에 기둥에 머리를 찧으며 글을 썼습니다. 그리곤 아침마다 보도 자료를 바라보며 기를 불어넣었죠. ‘(기자들아, 기사를) 써! 써!’ 라고요.”

“그래도 연락이 안 오면 보도 자료 위에 빨간 펜을 꾹 눌러 피처럼 번지게 하고는 그 위에 스카치테이프를 붙였어요. ‘표를 못 팔면 피를 팔아야 한다’는 각오였지요. 제가 무대 위에 모신 전통 예인들은 다들 워낙 연세가 많으셔서 석 달 뒤를 기약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통 공연예술 연출가 진옥섭 씨(43세). 뛰어난 미문의 보도 자료로 공연담당 기자들을 현혹하고, “아침마다 혀끝으로 물구나무 서서 단련했다”는 입담으로 청중들을 휘어잡아 온 그가 무대 위에서 잠시 목이 메고 눈가가 붉어졌다.

지난 5월 14일 오후 8시 서울 정동극장. 통상적으로는 극장이 문을 닫는 월요일 밤, 이곳에서는 한판 흥겨운 무대가 펼쳐졌다. 대통령상 수상 경력의 전통춤꾼 박경랑, 중요무형문화재 하용부(밀양 북춤), 강준섭(광대놀음), 채상소고춤의 일인자 김운태, 소리꾼 장사익, 사물놀이 노름마치의 김주홍 등 내로라하는 전통예술의 고수들이 잇달아 나와 두 시간 동안 휴식도 없이 기량을 뽐냈다. 관객이 밀려들어 계단에까지 나앉은 이날 공연은 공연 형식을 빈 책풀이였다.

지난 4월 중순 《진옥섭의 藝人名人:노름마치》(생각의 나무)를 출간, 1990년대 이후 자신의 손을 거쳐 무대에 선 전통예인 18명의 삶을 그려 낸 그는 책풀이도 신명 나게 했다. 자신이 주인공인 날을 맞아 팥죽색 두루마기를 갖춰 입고 공연 중간 무대로 뛰어올라가 사회자를 제치고 사회를 보기도 했다. 출연료를 조금이라도 깎아 보려고 고기를 사들고 서성이다가 언 고기가 녹아 핏물이 뚝뚝 떨어졌던 이야기도 털어놓았다.

무(武)에서 무(舞)ㆍ무(巫)ㆍ무(無)로. 진씨는 《노름마치》 책머리에서 자신의 ‘인생 역정’(?)을 이렇게 정리했다. 이소룡의 배에 새겨진 왕(王)자에 열광하던 열한 살 소년은 대학 재수 시절인 1983년 6월 명무전에서 한진옥, 문장원, 장금도의 춤을 보고 태극권과 같은 새로운 세계를 경험했다. 1990년, 현대무용가 홍승엽의 배에 깊게 파인 왕(王)자는 그의 열정에 새로운 불을 지폈다.

1993년 서울놀이마당 상임연출로 취직한 그는 이듬해 서울 정도 600주년 기념 ‘서울 재수굿 열두 거리’를 준비하면서 무속의 세계에 눈떴다. 전국 최고의 무녀들을 찾아다니며 굿판에 가무악(歌舞樂)이 꽉 차 있다는 것을 안 것이다. 본격적으로 전통예술에 빠진 게 이 즈음이다. 그리고 2002년 9월, 여든 일곱의 마지막 동래 한량 문장원의 춤을 보면서 공기처럼 가볍고 형체에 구속당하지 않는 절대의 자유, 무(無)를 발견했다고 했다. 10년 터울로 찾아온 새로운 세계에 그는 정신없이 취했다. ‘무’의 경지에 오른 예인들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헤맸다.

“이렇게 고생할 줄 알았으면 안했을 거예요.”

책풀이 공연이 끝난 며칠 후, 시내의 한 레스토랑에서 만난 그는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착한 사람”이라고도 말했다. 기획에서부터 섭외, 홍보, 무대연출, 공연 사회까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며 ‘온갖 날품’을 팔았지만, 늘 ‘빵빵한 출연료’를 주고 최고의 명인을 모셔 왔다는 자부심이 묻어 나왔다.

숨은 무명의 예인들에게 이르는 길은 멀고 험했다. 지금이야 가무악을 아우르는 전통 예술인을 점잖게 ‘예인’이라고 부르지만, 그들은 대개 기생, 광대, 무당, 한량 출신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회초리를 맞으며 모질게 기교를 익히고 당대 최고의 명인 소리를 들었어도 사회로부터 하대받던 계층이다. 이런 이들이 자신의 출신을 새삼스레 밝히면서 무대에 서려면 대단한 결심이 필요했다.


옛 신분 감추려는 예인들 끈질기게 설득

“제가 이들을 찾아 나섰던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사회 분위기가 지금과는 많이 달랐어요. 특히 여성들의 삶은 ‘음지 속의 그늘’이라 더욱더 숨어들려 했지요.”

진씨는 기생이나 무당, 남사당패들이 쓰던 은어를 마스터하고, 할머니들과 맞담배를 피우며 기싸움을 벌였다. 때로는 들으면 혹할 만한 옛 노래를 녹음해 들려주면서 공연 약속을 잡아 냈다. 옛 그대로의 원형을 간직한 예인들의 나이가 이미 70~80대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지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알려지지 않은 실력자를 무대에 올리는 게 공연 기획의 묘미지만, 무형문화재가 아닌 탓에 정부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출연자의 인지도 역시 낮았으니, 그는 이를 악물고 보도 자료를 써서 신문사에 돌리고 포스터를 붙이고 팸플릿을 만들면서 공연 홍보에 나섰다. 관객을 모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출연자의 기량뿐 아니라 재미를 놓치지 않는 그의 공연에는 늘 사람들이 따랐다. 1995년에 기획한 <여기 심청 있다>는 출연자인 공옥진 여사가 서울에 올라오기도 전에 표가 거의 매진됐다. 진씨가 일반인들에게 좀 더 가까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98년 열린 제1회 서울세계무용축제 ‘명무초청공연’을 통해서다. 김수악, 장금도, 조갑녀, 김덕명 등 명인들을 무대에 올려 이목을 끌었다. 이어서 <춤의 고을, 고성사람들>(1999년), <남무(男舞), 춤추는 처용아비>(2002년), <여무(女舞), 허공에 그린 세월>(2004년) <전무후무(全舞珝舞: 가장 완전한 춤)>(2005년) 등 굵직굵직한 공연을 기획, 대박을 터뜨렸다. <전무후무>는 공연 출연진의 평균 나이가 80세인,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공연이라고 평가받는다. 지난해에는 <풍물명무전>으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는 ‘올해의 예술상’을 받았다.

우리 전통 공연예술이 이뤄 낸 최고의 경지를 무대를 통해 관객들에게 선사해 온 그는 2002년부터 보도 자료가 아닌 본격적인 글쓰기를 시작했다. 어렵게 공연에 출연한 예인들의 사진과 이름이 적힌 홍보물들이 뜯겨 쓰레기로 뒹구는 것을 보고, 언젠가 깨끗한 책으로 지어 바치겠다는 일념으로 공연을 벌이는 틈틈이 5년 동안 집필에 몰두했다. 그리고 지은 책 이름이 《노름마치》다. ‘놀다’의 놀음과 ‘마치다’의 마침이 결합된 남사당패의 은어로 고수 중의 고수를 일컫는다.

기자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밤새워 보도 자료를 쓰던 글발은 어느새 문장가의 경지에 이르렀다. 어린 시절 소설가가 되는 게 꿈이었다는 그는 “책을 내고 나니 문인들이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이더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 말이 허튼소리가 아니라는 것이 많은 이들의 평이다.

고등학교 시절 연극에 관심을 둔 이래 탈춤과 춤, 무속, 전통 공연예술 전반에 뜻을 두고 젊은 피를 끓였던 그는 “이제 대단한 명인의 시대는 갔다”고 아쉬워했다. 나이 들어 춤 따로, 소리 따로, 북 따로 배우는 지금의 방식으로는 어린 시절부터 가무악 일체를 전수받아 체화하는 전통적 의미의 예인을 길러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제는 젊은 사람들 공연을 많이 보러 다니려고 해요.”

최고의 드림춤꾼 팀, 드림시나위 팀을 구성해 세계 순회공연을 갖고 풍류 모임을 통해 귀명창과 애호가들을 많이 만들겠다는 것이 그가 지금 꾸고 있는 새로운 꿈이다.

사진 : 장성용
  • 2007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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