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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번째 영화 개봉하는 ‘한국 영화의 역사’

임권택 감독

한국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1950년대 중반, 영화판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것으로 영화와 첫 인연. 1962년 3월 첫 영화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감독 데뷔. 2007년 4월 100번째 영화 〈천년학〉 개봉. 임권택이란 이름 석자를 한국영화의 ‘역사’와 동일시하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천년학〉 개봉을 앞두고 막바지 작업 중인 임권택 감독을 만났다. 100번째 영화라니. 게다가 그는 세계 영화계에 한국 영화의 토대를 닦아온 인물 아닌가? 1982년 〈만다라〉로 베를린영화제 본선에 진출한 이래 한동안 그는 세계 영화계가 주목하는 거의 유일한 한국 감독이었다.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은 그래서인지 조금 묵직했다. 그러나 그를 마주 대하자 이내 편안해졌다. 어떤 질문에도 그의 답은 진지하고, 지나치게 솔직하고, 겸손했다. 거장의 이런 모습이라니. 반하지 않을 수 없다. 〈천년학〉은 1993년 서울관객만 100만 명을 돌파하며 한국 영화의 흥행기록을 경신한 〈서편제〉의 뒤를 잇는 작품이다.

“이청준의 연작소설 〈남도사람〉 3편 중 2편을 묶어서 〈서편제〉를 만들었죠. 마지막 이야기 〈선학동 나그네〉가 이번 작품이 되었습니다.”


이 영화에 대해 그는 “남녀간의 사랑을 본격적으로 다루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한다. 99편을 하는 동안 사랑 이야기에 초점을 맞췄던 기억은 없다. “청춘을 무덤덤하게 넘어와 버린 인간이 돼놔서 사랑 이야기를 하려 하면 ‘어설픈 짓 하지 말라’고 주위에서 먼저 말렸다”고 한다. 〈서편제〉가 예술가로서 소리꾼의 삶에 초점이 맞춰줬다면, 〈천년학〉은 소리꾼인 의붓아버지 밑에서 오누이같이 자랐던 동호와 송화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다. 피가 섞인 오누이는 아니지만,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품고 평생 가슴앓이를 해온 두 사람. 두 사람의 비애스러운 사랑을 그는 영상으로, 음악으로, 그리고 판소리로 풀어 놓았다.

“예쁜 여자들이 많이 돌아다니는 영화계에 있으면서도 연애를 못 해봤어요. 짝사랑이라도 해보고 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었어요.”


칠순을 넘긴 이 거장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사랑을 아쉬워한다. 나이 들면서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더욱 생각하게 됐고, 그게 〈천년학〉에 담겼다. 자신의 최고 흥행작이자 화제작의 속편 격을 100번째 영화로 만드는 게 부담스럽지는 않았을까?

“〈서편제〉 때 다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어 언제 해도 해야 할 일이었기에 이번에 ‘손 털자’고 생각했지요. 100번째에 별로 의미를 붙이지 않고 그냥 가볍게 넘어가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말도 많이 하고 나도 은근히 부담이 되데요.”

2005년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명예금곰상 트로피에 입 맞추는 임권택 감독
그는 그러나 〈천년학〉과 〈서편제〉는 전혀 다른 작품이라고 말한다.

“100번째랍시고 전 작품의 아류를 내놓으면, 그건 죽을 자리로 들어가는 짓이에요. 100편을 했다는 놈이 겨우 그따위 짓을 해서는 될 일이 아니지.”

〈서편제〉를 내놓을 때 그는 전혀 흥행을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장군의 아들〉 시리즈가 히트하면서 영화 제작사에 돈을 많이 벌어준 터라, 소신껏 작품을 해도 되겠다는 생각으로 만들었다. 처음부터 “손님이 들 리는 물론 없다”고 못을 박아뒀다. 배우기 어려울 뿐 아니라 듣기도 쉽지 않은 판소리. 이 때문에 사라져 가는 판소리의 감흥을 보통 사람들도 빨리 알아차리게 할 수는 없을까 하는 마음에서 〈서편제〉를 만들었다. 소리꾼의 삶과 판소리를 결합시키고, 소리를 눈에 보이는 영상으로 변환하면서 “내가 지금 될 일을 하고 있는지…”라는 의구심을 수없이 가졌다. 단성사에서 단관 상영했던 이 작품은 화선지에 먹물이 번지듯 하나 둘 입소문을 타고 알려지더니 ‘안 보면 안 될 영화’가 되어 버렸다.

우리 것에 대한 애착은 ‘임권택 영화’의 고집이기도 하다. 그는 스스로 “영화의 영자도 모르고 영화판에 들어왔다”고 말한다. 청년기까지 그의 삶은 우리 현대사의 질곡과 얽혀있다. 전남 장성에서 태어난 그에게는 오랫동안 ‘빨갱이의 아들’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아버지를 포함해 인텔리 좌익 활동을 하던 일가 어른들이 거의 다 희생당하면서 그의 삶의 터전도 무너졌다. 피난지 부산에서 남이 넘겨준 좌판에 헌 군화를 팔던 그는 1956년 서울에 올라와 영화사 제작부에서 ‘똘마니’부터 시작했다. 부산에서 만났던 분이 영화사를 차렸다며 불렀다고 한다. 그의 나이 20세, ‘먹고살 길을 찾아 택한 일’이었다. 그때까지는 특별히 영화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제대로 본 영화도 없었다. 소품부, 조명부 등 이쪽저쪽 일을 하면서 현장 감각을 익혔다. 그래도 ‘나, 감독 시켜 달라’고 할 성격이 못 되었는데 정창화 감독의 조감독으로 일하게 됐고, 1961년부터는 자신의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그는 출발부터 ‘흥행이 보장된 감독’이었다. 액션물, 사극 등 장르도 다양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영화를 돌아보게 되었다. 1960년대 말 30대 중반에 이르렀을 때였다.

〈취화선〉으로 감독상을 받은 2002년 칸 국제영화제.
“10년 안 되는 세월에 50여 편을 찍었더군요. 1년에 다섯 편 이상씩 기계적으로 찍었으니. 액션물, 사극…. 인간의 삶과 관계없는 허황된 이야기들이었죠. 인생을 이렇게 휴지 쓰듯 쓰면 되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뭐냐? 감독으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내 영화를 할리우드 영화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싶었지만, 금세 ‘가망 없다’는 판단이 들더군요. 제작비 규모나 영화 인력, 연기자, 기재 모두 비교가 안 됐어요. 그러다 얻은 결론이 ‘한국 사람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영화를 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 삶이 담기지 않은, 구라 치는 영화는 만들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래도 마구 찍어대던 습관이 남아 있어서 ‘3류 감독’에서 벗어나는 데 10년이 걸리더라”고 고백한다. 새로운 영화를 찍으려 했지만, 시켜주는 사람이 없었다. 스스로 제작까지 겸해 문예 영화 〈잡초〉를 찍었다 왕창 망했다. 그래도 “저 친구가 저런 진지한 영화도 만드는구나” 하는 인식을 남겼다고 한다. 외화 한 편을 들여오려면 한국 영화 4편을 제작해야 했던 유신시대, 영화사마다 저예산에 속도전으로 만드는 것을 원했다. 이런 상황을 딛고 그가 처음 한국 영화의 존재를 세계에 알린 게 1982년. 〈만다라〉가 베를린 영화제 본선에 진출하면서였다.


그 후로도 국제영화제에 꾸준히 출품해 〈씨받이〉(1986년)로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 〈아다다〉(1987년)로 몬트리올영화제 여우주연상,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년)로 모스크바 영화제 여우주연상으로 한국 영화의 존재를 알린 후 2002년 〈취화선〉으로 칸영화제 감독상, 2005년에는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명예금곰상을 받았다.


‘한국 사람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영화’에 대한 고집

한국 영화에 대해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관심도 없을 때 “상이라도 하나 타면 알려질까?” 생각했다는 임권택 감독. 처음 국제무대에 나갔을 때는 “너, 누구한테 영화 배웠니?”라고 물으며 일본 영화감독 이름을 대는 사람이 많았다. 혼자 다니니 처량한 기분도 들었다. 이제 한국 영화의 수준이 고루 올라가면서 제대로 평가받는 것을 보면 뿌듯하다. ‘그런 가운데 나도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한국적인 소재에 끈질기게 천착하면서도 매번 실험을 거듭, 2000년 개봉한 〈춘향뎐〉의 경우 판소리 그대로를 영상으로 옮겨 주목을 받았다.

판소리와의 만남은 그의 영화 인생에서 중요 대목 중 하나다. 전남 ‘남도소리’의 고향에서 그는 일꾼들이 나무 하면서 부르는 민요, 어르신들이 부르는 시조창을 들으며 자랐다. 그러다 판소리에 매료된 것은 첫 영화를 개봉한 직후였다.

“그 영화에 손님이 꽤 들었는데, 광주의 흥행업자가 ‘당신 덕분에 돈 벌었으니 한턱 내겠다’며 기생집으로 데려가는 거예요. 아쟁, 가야금 등 각종 악기가 연주되면서 소리꾼이 소리를 하는데 쇼크를 받았어요. 깊은 심연에서 올라오는 듯한 소리였으니까요.”

사극을 할 때면 김소희 명창에게 부탁해 극 흐름에 맞게 판소리를 만들어 넣었다. 우연히 TV를 보다 “저 얼굴이다”라며 캐스팅한 〈서편제〉의 여주인공 오정해 씨가 알고 보니 김소희 명창의 제자였다. 캐스팅 기준에 대해 묻자 그는 “역할과 맞는 생김새”라고 한다. 〈천년학〉의 여주인공 소화는 〈서편제〉에 이어 오정해 씨가 맡고, 남주인공 동호는 조재현 씨가 맡았다. 조재현 씨에 대해 “저 연기자와 함께 일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쪽에서 먼저 “중요한 역할이 아니라도 참여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고 한다. 오정해 씨는 젊은 여성에서 중년까지 넘나드는 연기를 소화하기 위해 다이어트를 거듭하다 입원까지 했다.

사진 : 스튜디오 끼

마지막까지 현장에서 대본 수정

임권택 감독은 “내 영화의 시나리오는 촬영이 끝나는 순간 비로소 완성된다”고 한다. 준비를 잔뜩 해 가도 촬영 현장에서 느낌이 달라져 “어젯밤까지 고민했던 게 말짱 꽝이었구나” 생각하게 되는 적이 부지기수라고. 마지막 순간까지 “이게 과연 최선인가” 계속 의심하다 대본을 수정하고 때론 촬영 장소를 바꾸기도 한다. 콘티도 없이 수십 명의 스태프를 이끌고 가다 “빛이 좋다”며 ‘즉흥적’으로 촬영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게 즉흥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고심한 결과들이라고 한다.

“신인 감독은 안 되죠. 영화 전체를 부감하면서 각 부분 부분이 어떻게 연결될지 머릿속에 다 들어 있어야 하니까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순발력 있게 대응할 수 있는 건 아무래도 데뷔 초기에 초스피드로 찍으면서 쌓은 내공 덕분인 것 같다고 한다. 이번 작품에서는 원작자인 이청준 씨가 대부분 현장에 같이 다니며 각본을 썼다. 임권택 감독은 자신이 직접 각본을 쓰지 않은 것에 대해 “내가 미치지 못하는 영역까지 뭉개고 들어가 휘저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됐으니, 철이 든 게지”라고 말한다. 〈서편제〉 〈축제〉 그리고 〈천년학〉까지 원작자와 영화감독으로 호흡을 맞춰온 이청준 씨와는 같은 전남 출신에, 현재 사는 집도 가까워 자주 오가는 친우 사이다. 〈천년학〉은 이청준 씨의 고향이자 작품의 배경이 된 전남 장흥에 세트를 지어놓고 촬영했다.

100번째 영화〈천년학〉의 장면.
100번째 영화의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는 그에게 “스스로 자랑하고 싶은 대표작이 있느냐”고 물으면 그는 “대충 다 아쉬운 거지, 뿌듯한 게 뭐 있겠소”라고 대답한다. 그는 극장에서 자신의 영화를 보지 않는다. “저때는 왜 저 정도로밖에 생각을 못 했을까? 왜 저 모양일까?” 열 받을 일이 많아서라고 한다. 앞 작품은 신기할 정도로 싹 잊어버린다. 그렇게 항상 더 나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게 “괴롭고 미치는 일”이라고도 한다. 완전한 데에 이르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벼르는 그의 예술가적 자세를 잘 아는 주변 사람들은 오원 장승업의 삶을 그린 〈취화선〉을 보고 “네 모습 아니냐?”고 했다고 한다.

“작은 성과에 주저앉았다면 지금은 없습니다. 그랬다면 지금까지 감독 해먹고 있겠소?”

임 감독 스스로 “나는 일에 중독된 사람 같다”고 한다. 촬영이 없을 때도 머릿속은 영화로 꽉 차 있다. 아내는 “집안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혼은 훨훨 밖으로 떠도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40대 중반에 영화배우 채령 씨와 결혼한 그는 아내에 대해 “내가 다른 생각 없이 영화 속에서만 뒹굴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준 사람”이라고 한다. “어린 데다 생긴 것은 야한 사람이 그런 일을 해냈다”고. 자신은 은행이고 동사무소고 가본 적이 없을 정도로 생활에 있어서는 어리벙벙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안정적으로 돈벌이가 된 것은 90년대 들어서예요. 그 전에는 빚으로 생활하기 십상이었는데, 아내가 한번도 내색을 안 했어요.”


그의 아들 둘은 영화 제작으로, 배우로 그의 뒤를 잇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는 “속으로 달갑지는 않지만, 내가 원인 제공을 했으니 대놓고 반대할 수도 없다”고 한다.

“엄청난 노력과 끈기, 인내, 치열함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인데…”라고 걱정하면서. 엄청난 노력과 끈기, 치열함…. 그의 영화 인생이 그것들로 점철되어 오지 않았을까? 뼈를 깎는 노력으로 스스로를 넘어서면서.

사진 : 이창주
사진제공 : 영화사 KINO2(주)
  • 2007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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