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진 그래피티 아티스트

세상에 낙서하는 남자

서울 동작구 사당동의 한 주택가. 담벼락만한 커다란 합판을 대문 앞에 세워놓고 스프레이로 그림을 그리는 청년이 있다. 그래피티 아티스트 지성진 씨(28세)다.

“어휴, 벌써 몇 시간째 그림을 그렸는지 모르겠어요. 스프레이 때문에 머리가 띵하네요. 좀 쉬어야겠어요.”(웃음)

대문을 막고 작업 중인 단독주택은 다름 아닌 지 씨의 친구 집. 작업실이 있지만 지하에서 작업하는 것이 답답해 요즘은 주로 밖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이 동네 토박이인 지 씨는 덕분에 동네 사람들과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저런 인사를 주고받을 수 있어 좋다고.

스프레이로 벽에 그림을 그리는 ‘그래피티’. 외국에서는 현대미술의 한 영역으로 인정받아 대학에 그래피티학과가 개설되기까지 했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생소하다.

“저는 순수 스프레이만 써요. 페인트보다 스프레이 느낌이 좋아서 스프레이를 선호하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그래피티가 꼭 스프레이로만 그려야 되는 건 아니에요. 페인트만으로 그래피티를 그릴 수도 있어요. 붓으로 섬세하게 그리기도 하구요.”

그래피티 세계에서 그는 이름보다 닉네임으로 통한다. ‘지성진’이라면 모르는 이도‘nin-bolt’라고 하면 바로 알아듣는다고. 한때 취미 삼아 만화를 그렸던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소재로 판타지 만화를 직접 쓰기도 했다. 바로 그 만화 제목이 ‘nin’, 만화 속 주인공 이름이 ‘bolt’였던 데서 닉네임을 따온 것이다.

2004년 서태지 뮤직비디오(LIVE WIRE)와 휘성 4집 뮤직비디오, 양동근 뮤직비디오 등 유명 가수의 뮤직비디오와 영화〈S 다이어리〉, <내 사랑 싸가지>, <6월 일기> 를 비롯해 드라마 <루루공주> 등 우리가 접한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그래피티는 대부분 그의 작품이다. 뿐만 아니다. 2003년 제4회 세계청소년문화축제 ‘그래피티 시연 &그래피티 부문’ 행사 진행을 했던 그는 각종 그래피티 대회의 단골 심사위원이기도 하다. 그의 활동 범위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영화나 드라마에 단역으로 출연하는가 하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 된 적도 여러 번이다. 요즘은 KBS 2TV의 채널 광고에 출연 중. 이쯤 되면 예술가의 범위를 넘어 종합 엔터테이너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하다.

지난 6월 광릉 아프리카 미술박물관 그래피티를 성공리에 마친 그는 최근 SK건설이 서울 강서구 등촌동에 짓고 있는 도심형 실버 레지던스 ‘SK 그레이스힐’의 내부 디자인을 맡기도 했다. 거실 바닥에 연못, 수풀 등을 그래피티로 그려 넣어 실버 주택에 젊은 감각을 가미하면서 호응을 얻었다.



그림 그리고 싶어 고등학교 중퇴

재료 욕심이 많은 지씨. 200개 정도의 스프레이를 한꺼번에 갖다놓고 작업하는 게 예사다.
지 씨는 고등학생이던 1996년, 영화에서 본 그래피티 이미지에 매혹돼 이 세계에 빠져들었다. 이 일 때문에 고등학교도 중퇴했다.

“집에서 그림을 못 하게 해서 고등학교 1학년 때 가출을 했죠. 몇 년 전만 해도 제게 어느 대학 나왔느냐고 묻는 사람이 많았는데, 요즘은 제가 고교 중퇴인 게 다 알려졌는지 고등학교도 졸업 안 했는데 어떻게 그림을 배웠느냐고들 묻더군요. 그런데 그림이 배워서 되는 건가요? 열정만 있으면 되지. 그림 그리는 기술은 책 보면 다 나와 있어요.”

지 씨는 “서너 살 때부터 혼자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가정 형편 때문에 미술학원에 다닐 수 없었던 그는 책을 보면서 그림을 익혔다고. 중학교 때는 마로니에 공원에서 자화상을 그려 주면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렇게 독학으로 만화, 초상화, 벽화를 거쳐 마지막에 그래피티에 정착했다. 학교 도움을 받은 적 없는 그가 수년 전 모 대학에서 그래피티 학과를 개설하려는 움직임이 있을 때 교수 임용 제안을 받기도 했다.

“예전엔 다른 친구들이 부러웠어요. 집안 형편도 어렵고, 열일곱에 가출해 그림을 그리면서 앞이 막막할 때도 있었죠.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그래 가지고 깡패밖에 더 되겠느냐’고 비웃을 때마다 혼자 속으로 되뇌었어요. ‘나는 그림을 그릴 거다!’라고요.”




지 씨는 군대 가기 전까지 3년여를 그야말로 ‘거지깽깽이’처럼 살았다고 한다. 군대 갔다 와서도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렇게 1년이 지나자 집에서도 그의 일을 인정해 줬다. 지 씨는 “계속 그림을 그리다 보니 학력도 무의미해지더라”며 웃는다.

“어리다고 이용도 많이 당했어요. 새로 생긴 클럽의 인테리어 그래피티는 거의 다 제가 그리다시피 했는데 클럽 하나 통째로 그려주고 80만원 받았죠. 그때는 어린 나이에 처음 번 돈이라 마냥 좋아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4천만 원짜리 작업을 그 값에 해준 거더라고요.”

요즘도 PC방이나 호프집 등에서 일이 제법 많이 들어오지만 남는 것은 별로 없다고 한다. 평소 연습을 위해 번 돈의 대부분을 쓰기 때문이라고. 지 씨는 유독 재료에 욕심이 많다. 보통 합판 2장 그리는 데 스프레이 10여 개면 끝나는 것을 그는 두 박스 그러니까 200개 정도를 갖다 놓고 그리는 게 예사다. 어떤 이들은 “배가 불렀다”고 흉을 보지만 일단 모든 재료가 완비돼야 마음이 놓이는 그다. 그의 꿈은 자신 때문에 맘고생이 심했던 어머니에게 집을 한 채 사드리는 것이다. 현재 통장 잔고는 비었지만, 적금을 붓기 시작했다며 자랑이다.

동네 담벼락이나 철거 예정 가옥에 그림을 그리는 지 씨. 온 세상이 다 그의 캔버스나 다름없다.
“여러 가지 일을 해보았지만 그림만큼 저를 행복하게 해주는 일은 없었어요. 장소와 배경에 구애받지 않고 여기저기 낙서를 하듯 그림을 그려요. 캔버스가 필요 없습니다. 온 세상이 다 캔버스니까요.”

어디에 가든 지 씨는 “그래피티는 새로운 예술의 한 장르”라고 당당하게 외친다. 그에게는 벽에 낙서를 하는 일이 세상과 의사소통하는 방법이고, 예술이기도 하다. 그는 이를 통해 딱딱하게 굳어버린 도시의 곳곳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누가 알겠는가. 미국의 낙서화가 장 바스키아처럼 그 역시 주체할 수 없는 낙서 본능으로 현대미술의 스타가 될지.

사진 : 이규열
  • 2006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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