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봉이 만난사람| 기묘한 불협화음으로 가슴 벅찬 감동을…

한국 전자음악의 선구자 황성호

한국 전자음악을 개척해 온 황성호 한국종합예술대학교 부원장.
작곡가 황성호의 작품은 대중들이 생각하는 현대음악에 대한 선입관을 모두 갖고 있다. 그의 음악은 때로 시끄럽고, 날카로운 기계음이 들어 있어 무질서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부터 바흐나 베토벤에 익숙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의 음악도 조금만 반복해서 들어 보면 의외로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문제는 현대음악에 대해 이해의 문을 열지 않으려 했던 대중들의 자세다. 백병동, 강석희 같은 한국 현대음악의 선구자들이 있지만, 현대음악 그중에서도 한국의 현대 전자음악은 황성호로부터 시작됐다.

황성호는 195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작곡과 74학번인 그는 유신 시절 대학에 다녔다. 벨기에 브뤼셀 왕립음악원에서 작곡과 음악이론을 공부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추계예대와 서울대 음대 교수를 거쳐 현재는 한국종합예술학교 부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그는 유학을 떠나기 전인 1980년 전자음악연구회를 조직했고, 귀국해서 1985년 ‘전농회’(전기를 가지고 논다는 의미)를 결성했으며, 1993년 한국전자음악협회를 만들었다. 그는 특히 한국의 대표적인 현대음악 아티스트 그룹인 한국전자음악협회 초대 회장을 맡아 한국 현대 전자음악을 개척했다.

필자가 황성호 교수를 만난 것은 20여 년 전, 그의 전농회 시절이었다. 당시 필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데뷔한 후 열심히 시(詩)를 쓰면서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서 발행하는 <문화예술>이라는 잡지의 편집장으로 있었다. 그는 추계예대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현대음악에 대한 글을 써 줄 필자를 찾다가 황성호 교수를 알게 됐지만, 엉뚱하게도 그의 부친이 국문학자인 황패강 교수라는 사실에 더 관심을 가졌다. 고전문학자 황패강 교수는 독특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고전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하고 있어서 학창 시절 나는 그분의 글을 일부러 찾아 읽었을 정도로 매료되어 있었다.

고전문학자인 아버지 밑에서 그는 어떻게 현대 전자음악을 하게 됐을까? 그에게서 흘러나온 말은 의외였다.

“아버님이 음악을 좋아하셔서 친구 중에 음악 하는 분들이 많았다. 지금은 은퇴해 시카고에 살고 계시는 바이올린 연주자 이기주 선생님에게 다섯 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웠다. 그 선생님이 미국 가시는 바람에 바이올린은 1년만에 그만두었다. 피아노는 어머님께 배웠다. 보성 중겙慈?시절 밴드부에서 클라리넷을 불었다. 원래는 클라리넷으로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소리가 안 좋았다. 음악 선생님이 내가 악보를 빨리 보는 것을 알고 ‘너는 작곡을 하라’고 권하셨다.”

집안 분위기를 무시할 수는 없다. 수없이 많은 책으로 둘러싸인 아버지의 서가(書架)에서 그는 전후(戰後) 세계명작전집을 읽었고, 한국문제작가선집을 읽었다. 학창 시절 백일장에 나가 시를 써서 입상한 적도 있었다.

“내가 음악에 빠져든 것은 중학교 때 교회에서 음악을 맡으면서부터였다. 이화여대 교수로 계셨던 성두영 선생님에게 본격적으로 음악을 배웠다. 소리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그리고 음악에 대한 정신적인 것까지 그분에게서 익혔다. 잊을 수 없는 스승이다.”

그는 1974년 서울대 작곡과에 들어갔지만, 유신 시절 대학은 공부하는 날보다 데모하는 날이 더 많았다. 그는 브람스 같은 곡을 쓰고 싶었지만 대학에서 현대음악을 배우면서 갈등했다. 더구나 2학년 때 처음으로 팝 음악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는 그때까지 팝 음악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집에서도 못 듣게 했고, 그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대학 축제음악을 준비하다가 당시 유행하던 팝 그룹 시카고의 음악을 들었다. 그들이 현대음악의 거장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그것을 이용하는 것도 알았다. ‘대중음악이라는 게 연주하는 사람에 따라 이렇게 다를 수가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대학 시절 황성호의 별명은 ‘고인돌’이었다. 박수동 화백의 만화 <고인돌>이 나오기 이전이다. 고인돌은 대학 축제 때 팝 음악을 연주하는 서울음대 내 그룹이었다. 그래도 음대생들인데 무작정 팝 음악을 연주할 수 없어서 수준 높은 팝 음악을 골라 조금 변용해 축제 때 연주했다. 그때의 멤버들이 지금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연주자들이 되어 있다. 서울시향 수석 트럼본 연주자였던 이정생도 그중 한 사람이다. 계명대 이강일 교수는 그때 트럼펫을 불었다.

이후 그는 연극인들과도 작업을 했다. 훗날 연우무대에서 김석만이 연출한 <변방에 우짖는 새>의 음악을 맡기도 했고, 문호근의 <말괄량이 길들이기>나 실험극장에서 공연한 윤호진 연출의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오>의 음악을 담당하기도 했다. 주변 예술가들과의 작업을 통해 그는 많은 것을 배웠다고 했다.

1979년 일본에서 서울대에 악기를 하나 기증했는데 전자악기였다. 그때 그는 처음으로 전자악기를 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작’(아시아 작곡가 연맹) 공연이 서울에서 있었는데 그는 그 공연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일본의 젊은 작곡가들이 만든 새로운 전자음악은 그에게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그는 일본의 롤랜드 회사 초청을 받아 두 번에 걸쳐 일본을 방문해서 전자음악을 공부했다. 새로운 전자악기의 테크놀로지를 익혔고, 전자음악을 작곡했다. 1980년 그가 만든 전자음악연구회는 한국 최초의, 전자음악을 이해하려는 이들의 집단적 움직임이었다.


비디오 칸타타의 감동

2005년 12월 18일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비디오 칸타타’ 공연.
1993년 필자는 황성호 교수와 같이 작업을 한 적이 있다. 대한민국 무용대상 수상자인 무용가 안신희 씨가 필자의 첫 시집 <안개와 불>을 장막 무용으로 공연한 적이 있는데, 그때 필자는 음악을 맡을 사람으로 황성호 교수를 추천했다. 공연이 끝난 후 많은 사람들로부터 음악이 좋았다는 말을 들었을 만큼 그의 음악은 실험적이면서도 낯설지 않고, 새로우면서도 전통과의 과격한 단절을 시도하지 않았다.

2004년 필자는 아주 오랜만에 그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필자의 두 번째 시집 <비디오/천국>에 실린 ‘없다’라는 시를 합창곡으로 만들고 싶다는 전화였다. 나는 기꺼이 승낙했고, 세 번째 시집인 <발전소>를 들고 그를 찾아갔다. 서초동 예술의 전당과 국립국악원 사이에 있는 한국종합예술학교 3층에 있는 그의 방에는 많은 음악 서적들과 시집, 《풍속의 역사》 같은 인문학 관련 서적이 쌓여 있었다. 그는 일을 시작하면 그 방에서 먹고 자면서 작업을 한다고 했다.

그는 창작하기 전, 먼저 실컷 논다. 그렇게 백지상태로 몸을 비운 뒤, 연필을 잔뜩 깎아 놓고 지우개도 깨끗하게 하고 작업을 시작한다. 컴퓨터도 쓰지만 대부분 피아노 앞에서 작곡을 한다.

1년여에 걸친 기획, 그리고 창작 작업 끝에 2005년 12월 18일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황성호의 ‘비디오 칸타타’ 공연이 있었다. 그날 한국 현대음악가들은 대부분 공연장을 찾았다. 그리고 기념비적인 공연이라고 입을 모았다. 한 작곡가의 발표회에 오케스트라와 국립합창단이 동원된 일은 거의 없었다. 장소도 2,000석이 마련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이었다.

그날 그의 부친 황패강 선생도 참석했는데, 그는 공연이 끝난 후 아버지를 부축하면서 “오늘 불협화음 많이 들으셨죠?”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평양고보 출신인 황패강 선생이 해방 후 평양에서 들었던 소련 합창단이 부른 ‘스탈린 칸타타’의 충격을 아들에게 수없이 얘기했기 때문이다. 그 불협화음이 가슴 벅찬 감동을 안겨 주었다는 말을 황성호는 어린 시절부터 무수히 들었다. 그러므로 이날 공연된 ‘비디오 칸타타’는 황성호 교수가 평생 동안 가슴에 품고 있었던 하나의 도전이기도 했다.

황패강 선생은 최근, <구운몽>을 대본으로 만들어서 그에게 줬다. 워낙 방대한 텍스트여서 언제 작품으로 만들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언젠가 황성호의 현대음악 <구운몽>을 우리는 듣게 되리라는 것이다. ■
글쓴이 하재봉님은 동아일보 신춘문예, 〈한국문학〉 신인상,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했고 현재는 시인 겸 소설가 겸 문화평론가, 라디오 MC, 텔레비전 연출가로 활동 중이다.
  • 2006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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