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입수 | 세계 최초 산악 그랜드 슬램 이룬 박영석 대장의 북극 일기

「그래 우리는 미쳤다. 미치지 않고 어떻게 이런 일을…」

<오늘처럼 바람이라도 불면 말도 하기 싫다. 판단한 길이 나오지 않는다. 바닥이 울퉁불퉁 요철이 심하다. 그럴수록 우리의 발걸음은 한없이 무겁다. 100% 인내심과의 싸움이다. 인간이 처할 수 있는 최악의 자연조건 속에서 잘도 버티며 걷는다. 힘들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 하면서도 뜻대로 안 된다. 이 상황을 즐길 수 없다. 북극이 싫다>
<편집자 注> 그는 해냈다. 朴英碩(박영석·42·골드윈코리아 이사·동국대 산악부 OB) 대장이 한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가장 길고도 험난한 탐험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지난 3월9일 워드헌트(Ward Huntt·북위 83도3분)를 출발한 지 53일 3시간15분 만인 5월1일 오전 4시45분(현지 시각 4월30일 오후 2시45분) 북위 90도 北極點(북극점)에 도달함으로써, 히말라야 8000m급 14개 거봉 완등, 세계 7대륙 최고봉 완등, 3극점 도보탐험 성공을 일컫는 「산악 그랜드 슬램」을 인류 최초로 이룩했다. 1993년 봄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인공산소의 도움 없이 이룩한 등정) 이후 12년 만의 인간 승리였다.

朴대장을 비롯, 洪成澤(홍성택·39·용인대 산악부 OB), 吳熙俊(오희준·35·영천산악회 ), 鄭贊一(정찬일·25·용인대 산악부 OB) 등, 4인의 원정대 앞에는 영하 50℃까지 떨어지는 강추위, 날카로운 빙탑과 얼음능선을 세워놓은 듯한 亂氷帶(난빙대: 거대한 얼음판과 육지 또는 얼음판과 얼음판이 충돌하면서 거칠게 형성된 지역), 건너편 얼음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게 벌어진 리드(lead: 얼음이 갈라지면서 드러난 바다), 초속 14m가 넘게 불어대는 강풍 블리자드(blizzard), 한 치 앞을 파악할 수 없게 하는 화이트아웃(white out: 옅은 안개가 끼면서 시야가 흐려지는 현상) 등, 도상거리 780km, 실제거리 2000km의 북극 빙원을 걷는 사이 극지의 난관이 끊이지 않고 나타났다.

朴대장에게 북극점 원정은 2003년에 이은 재도전이었다. 엄청난 경비가 들어가고 이미 40대에 들어서 체력적으로 한계에 도달한 그가 받은 압박감은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단 1%의 가능성만 있어도 포기하지 않는다고 다짐했듯이, 자신과의 조그마한 타협도 거부한 채 밀어붙여 끝내 북극점을 밟았다.

시작하자마자 「다시 오면 개다」고 속마음을 드러냈을 만큼 힘든 역경을 이겨낸 朴英碩 대장의 탐험 과정과 인간적인 고뇌를 텐트 안이 얼어붙는 추위 속에서도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쓴 그의 탐험일지를 통해 전한다.


두 번 다시 오면 개다

3월9일 탐험 이틀째. 초장부터 亂氷(난빙)이다. 끝도 없는 난빙과 프레스 리지(얼음판과 얼음판이 부딪치면서 형성된 지 얼마 안 되는 얼음 능선)의 연속이다. 아무 말 없이 루트 파인딩을 하고 대원들 역시 아무 말 없이 뒤쫓아온다. 마지막이다. 이 짓을 왜 할까. 두 번 다시 오면 개다. 별의별 소리를 혼자말로 지껄이며 간다.

3월11일 침낭 속에서 숨이 막혀 엎치락뒤치락하다 눈을 뜬다. 구석구석 얼음 덩어리다. 텐트를 대수술한다. 내피·본체·플라이를 분리하고 얼음을 제거한다. 얼음이 차는 텐트 안주머니는 모두 잘라냈다. 족히 3~5kg의 얼음이 나왔다. 출발부터 억 소리 난다. 난빙, 난빙, 난빙…. 끝도 없다. 돌래야 돌 곳도 없고 사방이 꽉 막혔다. 기가 막혀 욕도 안 나오고 허탈한 웃음만 나온다. 敵地(적지) 한가운데를 뚫고 나가는 기분이다. 이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북극점까지 가나.

3월14일 블리자드를 핑계로 하루 쉴 수도 있지만 강해지고 싶다. 내 자신이 나약해지는 모습이 싫다. 오늘 세 번째 리드다. 크다. 살짝 얼어 있다. 밟는 순간 쑥 들어간다. 얼음덩이를 붙잡고 간신히 기어 나온다. 허리까지 빠졌다. 빌어먹을-. 몸이 얼어오는 것보다 오늘 운행이 여기서 끝이라는 게 화가 난다.

2년 전 리드를 건너려다 물에 빠져 그곳에 텐트를 쳤더니 다음날 500m 이상 벌어져 리드를 못 건너고 4~5일 기다렸던 생각이 난다. 몸이 얼더라도 이 리드는 건너고 싶다. 얼음이 깨져 또 빠졌다. 가슴팍까지 들어갔다 나왔다. 혼자 나오지 못해 대원들이 끄집어냈다. 몸도 얼어오지만 오기로 밀어붙여 리드를 건너 캠프를 쳤다.


힘들다. 나도 나이를 먹었나 보다.

3월17일 온도계는 영하 40℃ 바닥을 쳤다. 나침반 기포로 봐서 영하 45℃ 안팎일 것 같다. 10일째인데 지겹다. 반복되는 지옥 훈련이다. 내 자신과의 싸움이다. 벗어날 수 없는 내 자신과의 피비린내 나는 처절한 지옥의 혈투를 벌이고 있다. 이 순간은 금방 지나간다. 정말 지나갈까? 지나갈 거야. 충실하자, 현재에 충실하자. 최선을 다하자. 먼 훗날 오늘을 이야기할 때 성공과 실패를 떠나 후회 없는 정말 최선을 다한 그런 원정이었다는 기억을 갖고 싶다.

3월22일 힘들다. 이제 나도 나이를 먹었나보다. 하기야 마흔셋이니 적지 않은 나이다. 영하 40℃가 넘게 떨어지는 추위와 크러스트(crust: 표면이 얼어붙는 현상)가 안 되는 지저분한 난빙. 모든 게 나를 힘들게 한다. 대원들에게 이 이유, 저 이유를 대고 1시간 앞당겨 텐트를 치고 싶었으나 참았다. 내 자신과의 싸움에서 타협을 볼 뻔했다. 나 자신과 타협하는 순간 원정은 끝이다. 조금이라도 밀리면 끝이다. 마음을 다시 잡고 다시 시작하자. 이제 시작이다. 시작이다. 그래도 힘들다. 일주일 가까이 되는 강추위에 손발이 말이 아니다. 동상에 아리고 아프다. 이곳에서 자유를 찾고 싶었다. 자유? 사치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춥다. 힘들다. 집이 그립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립다.

●보급품 : 주식 20일(4자루), 국거리 20개, 간식 30개(6봉지), 라면 1박스, 건조닭고기, 차 400개(인삼차 별도 100개), 껌 7통, 고추장 2통, 버터 10개, 포도당, 파시코 30kg, 비타민 11개, 파워에이드 3개, 녹용, 건조김치 500g, 닭껍질 2.5kg, 김, 오징어(25마리), 두루말이 휴지 10개(비닐포장 일회용 80개), 주머니 난로, 배터리, 기름 84리터, 高所(고소)내의 上, 파일 양말, 노트북, 육포, 호두, 대추 4봉지, 돼지고기 10kg, 닭 6마리, 음료수, 술 1병, 깃발(동대, LG, NC Soft, 노스페이스, 태극기, 좋아, SBS, 원정대) 1개씩, 고아텍스 상하 1벌.


살 수 있을 만큼만 남기고 다 버린다

3월30일 오전부터 활주로로 나가 3시간 동안 재정비를 했다. 「노가다」를 하니 땀이 나서 牛毛(우모)복을 벗고 고소내의만 입고 삽질을 한다. 유레카 베이스캠프에서 연락이 왔다. 보급품을 실은 경비행기가 8시30분 출발한단다. 11시30분 비행기 소리가 난다. 얼른 텐트 문을 열고 밖으로 튀어 나간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보급품을 실은 비행기가 우리가 만들어 놓은 활주로를 두 번 왔다 갔다 하더니 1km 정도 떨어진 곳에서 내린다. BC(베이스 캠프)로 보낼 입던 옷과 침낭 등 썰매에 챙겨 달려간다. 20여 일 만에 보는 동석이다. 서로 끌어안고 안부를 묻는다. 비행기가 활주로가 짧아 이곳에 앉았단다. 보급품 내리고, 보낼 짐 싣고, 동석이는 떠났다. 아쉽다. 나도 저 비행기 타면 안되나?

3월31일 3월8일 출발할 때는 20일치의 식량, 장비, 연료 등을 가지고 출발했지만 지금은 35일치이기 때문에 썰매가 상당히 무거워졌다. 10일 정도 고생을 해야 조금 가벼워질 듯싶다. 12시경부터 舊氷帶(구빙대: 오래된 얼음 판)가 자주 나오더니 1시 이후 망망대해처럼 엄청나게 큰 판이 나타났다. 오후 5시까지 줄곧 뽑았다. 희준이와 막내가 너무 지쳐 두 사람의 썰매에서 15~20kg씩 빼서 성택이와 내 썰매에 옮겨 실었다. 무겁다. 힘이 부치지만 이제야 다른 대원들과 속도가 맞는다.

4월2일 무게가 많이 나가 속도가 나질 않는다. 대원들도 쉬 지친다. 연료·식량·여비장비들을 버린다. 식량은 2일치를 3일간 나누어 먹고 연료도 300cc씩 줄이기로 한다. 살 수 있을 만큼만 남기고 다 버린다.

4월4일 힘들다! 대원들이 모두 지쳤다. 성택이는 지금 이 온도에 이 짐을 끌고 두 번 쉬고 9시간30분을 운행한 것에 대해 미친 짓이라고 한다. 그래 우리는 미쳤다. 미치지 않고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위대하다면 위대한 일이고 미친 짓이라면 미친 짓이다. 이 두 단어는 상통하는 것 같다. 미치지 않고 어떻게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을까. 미치지 않고 어떻게 자기 분야에서 세계 최고가 될 수 있을까. 나는 미쳤다. 내일도 미치게 이 썰매를 끌고 올라갈 것이다.

4월7일 아이들이 보고 싶다. 성우·성민이랑 아프리카 사파리에 갔던 생각, 킬리만자로에 올라갔던 생각, 그랜드캐년에 갔던 생각. 많은 생각이 난다. 너무 힘들어 집 생각이 간절하다. 피곤하다. 따뜻한 잠자리와 식사, 사우나가 그립다.


두 번 다시 북극에 오면 내 姓을 간다

4월12일 앞서가던 성택이가 주춤. 뒤로 돌아온다. 온몸이 젖어 있다. 리드에 빠졌다 녹고 있는 것이다. 희준이도 얼은 리드에 들어갔다가 얼음이 출렁거려 얼른 빠져나온다. 텐트를 치려고 자리를 살피고 있는데 희준이가 아까 빠질 뻔한 리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소리를 질러 들어가지 말라고 하는 순간 바다 물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오늘은 북극의 용궁을 10분 간격으로 두 명이나 구경 갔다 왔다. 저녁 10시가 넘었는데도 옷을 말리고 있다. 언제 86도를 벗어나나. 정말 지겨운 마의 86도다.

4월16일 밤새 바람이 텐트가 찢어질 듯 분다. 겁난다. 판은 자주자주 뒤로 밀린다. 어떻게 넘은 87도인데 1분, 2분, 3분-. 환장하겠다. 정말 미칠 것 같다. 바람은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고 더 불어댄다. 텐트가 온몸으로 요동을 친다.

드디어 87도가 깨졌다. 그런데 게 뭐냐. 10일 만에 갖은 고생 다하고 87도를 넘었는데 허무하게 앉아서 전날 위치로 돌아가다니. 어제 그 눈보라를 맞으며 블리자드를 헤치고 87도를 기필코 넘겠다는 일념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정말 허무하게 다시 뒤로 밀리다니 욕밖에 안 나온다. 걸으면서 2분 이상 밀리고 지금 5분 이상 밀렸다. 13km 이상 뒤로 다시 밀렸다. 할 말이 없다. 두 번 다시 북극에 오면 내 姓(성)을 간다. 그랜드 슬램만 아니면 당장 철수하고 싶다.

4월18일 손가락은 벌써 얼어온다. 손가락 발가락이 동상으로 감각이 없어진 지 벌써 오래고 코와 볼이 동상으로 허물이 다 벗겨진 지 또 오랜 일이다. 『가자!』 소리를 외치고 출발한다. 오늘도 14분 이상 올라왔다. 내가 생각해도 대단하다. 아침 7시20분에 출발, 저녁 5시40분에 운행 정지. 하루 올라올 수 있을 만큼, 퍼져서 지칠 때까지 올라온 것이다.

저녁 시간 BC와 연락. 오늘 저녁부터 블리자드가 불어 내일 하루종일 불 것이란다. 좋다, 그럼 오늘 움직일 수 있을 때 간다. 저녁 10시 다시 북극점을 향해 밀고 올라간다. 최선을 다하고 싶다. 대원들도 불평 없이 잘 따라준다. 정말 훌륭한 후배들이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미쳤다고 할 것이다. 하루 종일 진을 뺀 지친 몸을 가지고 밤 10시에 바람이 부는데 또 운행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미쳤다. 하지만 북극에 온 것 자체가 미쳐야 올 수 있다. 그리고 미쳐야 할 수 있다. 미치지 않으면 지금 이 순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우리는 미쳤다. 그래도 나에게는 꿈과 목표가 있지 않는가. 꿈과 목표가 있어서 미쳐도 행복하다.


일기 쓰는 것도 힘들다

4월21일 성택이 생일이다. 20여 일간 몰래 지고 온 맥주와 과일을 내놓으니 감격한다. 88도에서 맥주와 신선한 과일이라니, 비록 꽁꽁 얼었지만 감격할 만하지. 대원들이 신이 나서 먹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다. 미니 핫케이크에 성냥 네 개를 꽂아 생일 케이크로 대신 사용하고 노래까지 불러줬다. 대장 노릇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 이런 사소한 것까지 챙겨야 한다. 정말 대장 노릇하는 게 힘들다.

4월28일 일기 쓰는 것도 힘들다. 이제 이틀이다. 이틀만 운행하면 천재지변이 없는 한 북극점에 도달할 수 있다. 마지막 남은 별을 따는 것이다. 가슴이 설렌다. 그 설렘으로 힘을 얻어간다. 그래도 힘들다.

4월29일 날씨가 안 좋다. 어제까지 2~3일 좋던 날씨가 험악해졌다. 극점이 마지막 저항을 하는 듯하다. 90도 가까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난빙의 연속이다. 블리자드에 화이트아웃까지. 거기다 리드들이 상당히 많다. 폭이 1~2km나 되는 리드를 두 개나 건넜다. 블리자드와 화이트아웃, 난빙, 프레스리지, 리드까지 모든 병기는 동원하며 북극의 별을 내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의 기세를 누를 수는 없다. 우리는 꿈과 희망에 가득 차 한 걸음 한 걸음이 가볍다. 내일은 북극점에서 마지막 북극 일기를 썼으면 좋겠다.

「인샬라, 아멘, 관세음보살…」

4월30일 오후 7시45분(현지시각, 한국시각 5월1일 오전 4시45분) 드디어 마지막 별을 땄다. ■
  • 2005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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