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순의 현역, 앙드레 김의 롱런 비결

아무리 어린 사람에게도 항상 존댓말? 작은 일에도 정성 다해

그는 매일 오전 5시 30분에 일어난다. 스포츠, 경제, 英字(영자) 신문을 포함한 17개의 신문을 구독한다는 그는 1~2시간 신문을 훑어본다. 관심 분야는 따로 스크랩도 하고 知人(지인)들의 동정도 챙긴다. 그의 집에는 다섯 대의 TV수상기가 있어 늘 네 개 공중파와 한 개 케이블 방송을 모니터한다. 작은 정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20여 년 전 처음 만나

올해 우리나라 나이로 칠순인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 김. 그에 대한 나의 애정은 일방적인 짝사랑이다. 20여 년 전 패션 담당 기자로 그를 처음 만난 후 나는 그에 대한 경이로움과 존경심을 항상 간직하고 있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는 겨우 20대 초반의 신참 여기자에게 두 손을 모아 깍듯하게 인사를 했으며 패션 촬영을 나갈 때는 의상과 액세서리는 물론, 모델과 스태프들이 먹을 도시락까지 직접 준비해 나타났다. 『밖에서 파는 음식을 잘못 먹어 모델이나 기자분들이 배탈 나면 안 되죠』라며 그는 집에서 말아 온 김밥을 꺼내 놓아 감동시켰다. 그토록 겸손한 태도와 완벽하게 주변을 챙기는 모습은 칠순이 된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코드」나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로 앙드레 김 선생과는 몇 번씩의 갈등과 마찰이 있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패션 디자이너란 자부심을 갖는 그는 다른 디자이너들에 비해 자신의 기사가 작게 취급되면 참지 못했고, 약간의 비난하는 표현도 견디지 못했다. 직접 전화를 걸어 유난히 큰 목소리로 따지거나 때론 편집국장이나 사장에게까지 항의를 해서 서운함을 감추지 않았다.

『세상에 어떻게 내 기사를 이렇게 조그맣게 다룰 수 있죠?』

나만 아니라 패션 담당 기자들 중 많은 이들이 이런 체험(?)을 하고 당혹해했다. 하지만 아무도 앙드레 김 선생에게 앙심(?)을 품지는 않는다. 그처럼 단순하고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 주는 것이 뒤에서 비수를 들이대는 것보다 훨씬 낫다. 그리고 얼마 후면 다시는 안 볼 것 같던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 『안녕하세요?』라고 반갑게 인사를 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자신의 건물도 소유했고, 화장품 등 다른 사업도 호조를 보이며 모범 납세자상도 받고 최근에 쌍둥이 손주까지 본 할아버지가 되어 「행복」이란 패키지 선물을 받고 있는 앙드레 김. 그러나 그는 20대 후반에 패션계에 입문해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해」보다는 「오해」를 더 많이 받고 갈채보다는 비난을 더 자주 받았던 사람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과소평가된 사람?

최근 소위 역사 바로잡기 논란이 일고 있지만 문화예술계에서 할 일 중 하나가 「앙드레 김 제대로 알기」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과소평가된 인물 중에 하나가 그라고 흥분하는 이들도 있다. 그가 해 온 업적이나 가치에 비해 너무 희화되고 왜곡된 이미지로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사실 앙드레 김은 오해받을 만하다. 그는 항상 톱스타들과 함께 있어 사치스러운 옷을 만지는 화려한 모습으로만 비쳤다. 1960년대 신성일-엄앵란 부부의 웨딩드레스를 시작으로 최근엔 최지우·권상우에 이르기까지 톱스타들이 그의 옷을 입었으며 돈을 갑자기 많이 번 이들은 우선 앙드레 김 옷을 입는 것으로 상류사회에 편입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의 말투와 외모도 충분히 거부감을 줄 만했다. 역수입한 듯 한국어도 외국 악센트로 발음하거나 『엘레강스하면서도 우아하구, 판타스틱하면서도 환상적인』 등 영어와 한국어를 반복하는 말투, 또 마스카라까지 한 얼굴과 4계절 변함없는 독특한 하얀 옷은 확실히 여느 남성의 외양은 아니다. 그래서 『해변가에 김들이 놀러 왔는데 하얀 옷을 입은 김이 나오더니 「난 앙드레 김이야」라더라』는 농담과 「앙녕하세요-드자이너예요-래이름은요-김봉남이에요」 등의 우스개 4자 성어까지 등장했다. 그러나 진정한 앙드레 김의 노력과 성실함과 40여 년을 버텨 온 저력에 대해 궁금해하는 이들은 드물다.

그는 매일 오전 5시 30분에 일어난다. 스포츠, 경제, 英字(영자) 신문을 포함한 17개의 신문을 구독한다는 그는 1~2시간 동안 신문을 훑어본다. 관심 분야는 따로 스크랩도 하고 知人(지인)들의 동정도 챙긴다. 단골 고객, 친한 사람들과 관련된 기사가 나오면 직접 전화를 걸어 『축하해요』라거나 『속상하시겠어요』 등의 인사를 나눈다. 그래서 신문이 안 나오는 일요일이 너무 싫지만 「기자들도 쉬어야지」 하고 참는다고 한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그의 집에는 다섯 대의 TV수상기가 있어 늘 네 개 공중파와 한 개 케이블 방송을 모니터 한다. 드라마, 쇼 프로그램, 광고 등을 모니터 하면서 누가 현재 인기가 있으며 앞으로 가능성이 있을지 파악한다. 그의 패션쇼에는 항상 당대 최고 인기를 누리는 톱스타들과 앞으로 성장 가능성이 있는 신인 스타들이 함께 등장하는데 부지런히 TV를 본 그의 안목 덕분이다. 나는 어떤 신문기자나 방송사 간부도 그이처럼 많은 신문을 꼼꼼하게 챙기고 여러 방송을 모니터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9시에 출근해 직원들과 함께 그날 할 일도 챙기고 옷 디자인도 하고 손님도 맞는다. 저녁에는 대개 공연장을 찾는다. 서울에서 개최되는 거의 모든 수준 있는 연주회나 오페라 등에 그는 독특한 하얀 옷을 반짝반짝이며 자신이 초대한 지인들과 자리를 함께 한다. 물론 그가 티켓을 구입한 것이다.

공연장만 찾아가는 것이 아니다. 전시회 등도 찾아가고 영화제 등에도 참석한다. 단 한순간도 긴장을 풀고 나른한 자세로 있는 그를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술을 먹거나 골프 등 운동으로 스트레스를 풀지도 않는다.

그는 외국인과 거리낌없이 대화를 나눈다. 그는 유학파는 아니다. 최종학력도 일반대학이 아닌 국제복장학원이다. 그에게 영어를 잘하는 비결을 물어보니 이렇게 답했다.

『고양중학교에 입학해서 영어를 처음 배웠는데 그렇게 재미있고 흥미로울 수가 없었어요. 교과서나 사전에 나오는 발음기호대로 공부를 하다 보니 영국식 악센트가 굳어졌구요. 그래서 T 발음을 강조하죠. 물도 미국식인 워러(water)가 아니라 워터라고 하구요. 또 오랜 외교관 생활이 몸에 밴 각국 대사들과 그들의 풍부한 교양, 문화정보, 상식이 우러나오는 대화를 나누면서 제 영어 역시 그들 수준에 맞춰 가게 된 거죠. 그들은 제가 추구하는 문화, 예술의 세계를 공감해 줘서 그들과 대화할 때 너무 행복해요』

다들 앙드레 김처럼 노력하면 `「영어를 마스터하기 위해서」 떠난다는 早期(조기)유학이 무슨 필요가 있으랴.


NQ의 달인

요즘은 지능지수인 IQ나 감성지수인 EQ보다 인간관계지수인 NQ가 더욱 중요한 자질이라고 한다. 앙드레 김은 NQ의 달인이다. 한번 맺은 관계를 매우 잘 유지하며 서로 좋은 관계를 맺어 주려고 노력한다.

그의 의상실에 가서 있으면 드나드는 손님과 몇 번씩 벌떡 일어나 인사를 나눠야 한다. 수시로 찾아오는 손님들을 그가 일일이 다 소개시켜 주기 때문이다. 『인사들 나누세요. 이분은 피아니스트 아무개씨, 그리고 저분은 ○○기업 회장 사모님, 또 이분은 ○○대학 박 교수님. 아, 박 교수님은 사돈 되시는 분이 모 장관님이신데 사모님도 아시죠?』

이렇게 소개를 시켜 줘서 억지로라도 인사를 해야 한다. 그는 누구에게나 최고의 찬사를 보낸다. 『어쩜 그렇게 며느님이 우아하고 덕성스러운지 몰라요』(이제 막 며느리를 맞아 자랑스러워하는 시어머니에게), 『조수미씨, 정말 판타스틱하고 퍼펙트했어요』(자신의 드레스를 입고 공연을 마치고 온 소프라노 가수 조수미씨를 연습장에서 맞이하며) 등 덕담과 찬사의 마술사다. 아무리 어린 사람에게도 항상 존댓말을 한다. 그에게 드레스를 맞춘 세 살짜리 아기에게도 『호정양, 너무 예뻐요』라고 존칭을 써서 인사를 한다. 또 대화를 나누다가도 수시로 종업원을 불러 『주스잔이 비었는데 다른 음료수를 더 드리세요』라는 등의 신경을 써 준다.

그리고 知人들에게 명절에는 떡을 돌리거나 꽃바구니를 보낸다. 비싼 것은 아니지만 앙드레 김 특유의 분홍 리본에 담겨오는 선물은 그가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 같아 고맙단다.

물론 「장삿속으로 하는 일」이라고 폄하하거나 『그렇게 단골잡기 마케팅에 신경을 쓰니까 고급 손님이 몰리는 게 당연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옷은 상품이며 상품을 파는 데는 마케팅이 중요한 건 당연하다. 요즘 마음을 사로잡는 하트(Heart) 마케팅이 유행인데 그는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이런 기법을 활용해 왔다.


어느 정치인보다 애국자

그의 조국은 그를 청문회에 출두시켜 고작 본명이나 말하게 하고, 알토란 같은 돈을 세금으로 징수하지만 그는 애국자다. 비록 한국어로 된 본명을 쓰지는 않지만 재벌들도 잘 안 내는 세금도 잘 내고, 해외에 나가 패션쇼를 통해 우리 문화의 우수함을 자랑한다. 정부에서 잘 챙겨 주지 못하는 駐韓(주한) 외교 사절들을 親韓派(친한파)로 만드는 외교관 역할도 그의 몫이다.

그들에게 취임 축하 꽃다발을 보내고 이임할 때는 파티도 해 준다. 한국적인 행사가 있으면 초대하고 패션쇼 무대에 모델로도 등장시킨다. 앙드레 김을 통해 인수 인계를 하지 않고서는 외교사절의 이동이 안 된다거나, 아무리 어려운 비자도 앙드레 김을 통하면 된다는 소문 역시 이런 그의 눈물겨운 노력 때문이다. 그들과 자유롭게 대화하는 그의 영어는 매우 자연스럽고 격조 있다. 하지만 그는 해외유학은커녕 변변한 영어학원도 다닌 적이 없다. 마지막 학력 역시 인터내셔널 디자이닝 인스티튜트이다. 한국어로 쓰면 국제복장학원이다.

다른 문화계 인사들 역시 그를 「앙 마담」 「앙 선생」 등으로 폄하하는데 오히려 외국에서는 『놀라울 만큼 아름다운 옷을 만드는 예술가』라고 격찬한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정부는 그에게 문화훈장도 주었다. 한국을 방문한 마이클 잭슨이 그의 옷을 여러 벌 구입하며 그에게 전속 디자이너가 돼 달라고 제안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그 마이클은 아직도 앙드레 김의 옷을 즐겨 입는다.

그의 옷을 입는 이들은 유명 연예인만이 아니다. 파티 드레스만 만드는 것도 아니다. 梨大(이대) 鄭義淑(정의숙) 전 총장, 金璟梧(김경오) 전 여성단체협의회장 등 커리어우먼들이 비즈니스 수트로 입었던 옷도 그의 정장이다. 그런 옷들에는 앙드레 김 특유의 로고나 자수가 들어 있지 않고 정말 단아한 디자인으로 처리해 준다.

오래전에 세일을 할 때 큰마음 먹고 그의 옷을 구입한 적이 있다. 검정 줄무늬 투피스였다. 입어 보니 뜻밖에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디자인만큼 재단을 완벽하게 처리한 것 같았다. 움직임이 아주 편해서 마음에 들었는데 어느 날 가수 이미자씨가 똑같은 옷을 입은 것을 보고 더 이상 입지 않았다. 이미자씨 흉내 낸다는 오해를 받기 싫어서다.

그가 애국자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이미 숱한 외국 명품 브랜드가 우리나라를 점령한 가운데도 자존심을 지키고 고급 고객들을 유지해 달러를 절약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지오 아르마니나 샤넬을 입는 대신 앙드레 김의 옷을 입으면 그것만으로도 외화 유출을 막는 셈 아닌가.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앙드레 김이란 이름을 대중들에게 더욱 널리 알린 것은 옷 로비 청문회였다. 그 청문회는 앙드레 김의 본명이 김봉남인 것과 고향이 경기도 구파발(정확히는 고양군 신도면 구파발리)인 것 정도만 밝히고 끝났다. 신분과 주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사모님」들 덕분에 그의 의상실은 몇 달 동안이나 검찰, 세무관계자가 드나들어 뒤죽박죽이 되었고 청문회까지 불려 나가는 수모를 겪었다.

그는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국제인권윤리위원회에 제소할 생각도 했지만 참고 기다리면 언젠가 진실과 정의는 밝혀진다는 것, 속상한 일은 빨리 잊자는 철학으로 그 고통을 이겨 냈다고 한다.

그가 정부로부터 고통을 받은 것은 옷 로비 사건이 처음은 아니다. 육영수 여사가 그의 옷을 즐겨 입었다는 이유로 10·26 사태 후 신군부의 조사도 받았으나 옷감도 국산만 쓰고 납세도 깨끗해 그 칼날을 피했다. 값비싸고 사치스러운 옷을 만든다고 소문났는데 정작 변변한 社屋(사옥) 하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李姬鎬(이희호) 여사나 韓仁玉(한인옥) 씨도 자기 옷을 입었지만 權良淑(권양숙) 여사와는 아직 인연이 없다고 했다.

다소 촌스럽게 느껴지는 그의 본명과 고향이 알려진 후 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더욱 친근하게 대했다. 요즘 거리에 나가면 초등학생들까지 그에게 사인을 요청할 만큼 스타 대접도 받는다. 또 청문회 후 사업제안이 쏟아져 현재 속옷, 화장품, 아동복 등 다섯 개 브랜드에 라이선스를 주었으며 다른 분야와도 계속 협상 중이다. 독특한 말투와 외모에 대한 거부감 역시 텔레비전에 자주 출연하면서 「재미있는 개성」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남들이야 뭐라든 그는 자신의 꿈과 환상을 버리지 않고 매순간 최선을 다해 수십 년간 頂上(정상)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만약 그가 지금까지 오래 살지 않고 요절했더라면 명예 회복을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궂은 날, 억울한 날도 묵묵히 견디고 언제나 자신만의 세계를 유지해 왔기에 그는 이제야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인생에서 제일 커다란 힘은 버티는 힘이고 일찍 죽어 과분한 평가를 받기보다 오래 살아 생전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는 것이 훨씬 복된 일이란 걸 앙드레 김은 보여 준다. 어떻게든 꾹 참고 오래오래 살고 볼 일이다. ■
  • 2005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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