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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움을 묻다

최인아 ②

세상에 나를 맞추지 않고, 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는 것

최인아
최인아책방 대표. 카피라이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거쳐 제일기획 부사장을 지냈다.
강남 한복판인 선릉역과 역삼역 부근에 각각 최인아책방 1,2호점을 열고 ‘혼자력’과 ‘사색력’을 모색하고 전파한다.
20대 초에 그런 생각을 했다니요.
그때부터 책이나 타인의 방식을 따르지 않고 최인아다운 방법을 찾아낸 거군요. 광고계에서도 최인아는 기존의 것을 흉내 내지 않고 최인아다움으로 승부를 건 걸로 압니다.


“내가 생각해도 똘똘했던 것 같아요(웃음). 늘 ‘그 방법이 과연 나에게 맞아?’를 생각했어요. 대학교 때는 이런 일이 있었어요. 한양대 법정대에서 정외과 학생들의 모의국회가 열렸어요. 서울대, 연대, 고대, 이대 등 각 학교에서 대표가 한 명씩 뽑혀서 나갔는데 이대에서는 내가 나가게 됐죠. 국회의원이 돼서 대정부질문을 하는데, 다들 ‘이 연사~’ 식으로 목청껏 외치는 거예요. 그걸 보면서 생각했어요. 나는 저렇게 하고 싶지 않고, 저런 식으로 해서는 승산이 없겠다고. 알다시피 나는 목소리가 작아요. 내 방식대로 조곤조곤 말했고, 결국 통했어요. 제일기획에서도 그랬어요. 조곤조곤 말하고 목소리도 크지 않지만 듣다 보면 설득이 되도록.”


“프로는 아름답다. 그녀는 프로다”라는 카피가 생각납니다. 일하는 여성을 내세운, 당시로선 파격적인 광고로 화제를 모았어요.

“나는 일하는 여성으로서 아이덴티티가 워낙 강했어요.”


화장을 안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인가요?

“회사 다닐 때도 늘 화장을 안 했습니다. 안 그래도 소수 민족인데,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다니면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여자가 먼저 보일 거라고 봤어요. ‘이건 내게 굉장한 손해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입사 직후에도 ‘일하는 여성’으로 보이기 위해 남들보다 한 시간 일찍 출근했어요. 신입 여직원은 걸레를 빨아다가 책상을 닦아야 해요. 걸레 들고 다니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여덟 시 반 출근인데 일곱 시 반에 와서 책상을 다 닦아놓고 자리에 앉아 있었어요.”


늘 질문을 품고 숙성시키면서 여기까지 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질문을 오래 품다 보면 너무 신중해서 기회를 놓친 적은 없었나요?


“있었겠죠. 30여 년을 해왔으니 그럴 때가 왜 없었겠어요. 그런데 생각이 안 나요.”


실패 경험은요?

“있었겠죠.”


후회한 적은?

“있었겠죠. 그런데 그런 생각들이 잘 안 떠올라요. 기억하지 말자,가 아니라 그냥 아예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아요.”


‘~했더라면’ 식의 가정을 해본 적은요.

“가끔 하죠. 반면 이런 생각을 자주 해요. 크리스천인데도 사주가 나를 꽤 정확하게 설명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생각의 연장선에서 보면 누군가의 인생길은 백지에서 그려간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에게 뭔가 정해진 길이 있어요. 그런데 알 수 없으니 눈을 감고 가는 것 같아요. 이리 쿵, 저리 쿵 하면서 내 소명을 찾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생각을 해요.”


사회를 위해서 쓰여야겠다는 생각을 합니까.

“하죠. ‘나 일 안 할래’ 하고 그만뒀다가 책방을 연 것도 그래서였어요. 세상을 위해서 쓰이고 싶다는 욕망이 강했어요.”


어릴 때 꿈은 뭐였나요.

“일찌감치 내가 사는 공동체에 관심이 많았어요. 역사, 지리, 세계사를 좋아했고, 중3 때 생긴 정치경제 과목이 굉장히 재밌었어요. 인간사에 흥미가 많았는데 철학적인 관심은 아니었어요. 각자의 욕망을 가진 개인들이 어울려 살아가기 위해 생겨난 제도들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가 궁금했어요. ‘소위 선진 국가, 민주주의 국가라고 하는 나라들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했길래 저런 제도를 만들어냈지?’가 꽤 정돈된 나의 관심사였어요. 직업으로 말하자면 기자나 작가, 교수가 장래희망 목록에 있었고요. 일관된 관심은 내 생각을 글이나 말로 표현하는 일이었어요.”


사명감과 소명의식이 강한데, 평소 그런 단어 사용을 꺼리는 걸로 압니다.
추상적이고 거창해 보이는 말을 쓰는 걸 극도로 경계하지요?


“맞아요. 나는 거창하고 거룩한 단어를 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왜 그런가요?

“인간이 그렇게 합리적인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부분적으로만 가끔 합리적일 뿐입니다. 중2 겨울방학 때 본 〈암흑가의 두 사람〉이라는 영화가 생각나요. 알랭 들롱과 장 가뱅 주연의 영화인데, 만기 출소한 알랭 들롱이 자신이 하지 않은 일로 억울하게 죄인으로 몰려요. 문을 두드리는 등 일련의 행동이 계획적으로 한 일이 아닌데 나중에 법정에 서니까 그런 행동들이 아귀가 맞아떨어져요. 그걸 보면서 ‘인간이 저렇게 합리적이고 논리적이지 않은데 단죄할 때는 인간을 100% 합리적인 존재라고 전제하는군. 저게 맞아?’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나도 마찬가지예요. 지금도 그래요. 정돈해서 거룩해 보이는 말을 해도 한편으로는 ‘어떻게 하면 좀 더 편안할까? 유리할까? 나를 덜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거든요. 어쩔 수 없이 인간은 자기 욕망에 충실한 존재예요. 그런데 큰 얘기를 하다 보면 사적인 욕망은 다 빼고 거룩한 얘기만 하게 된다는 거죠. 이건 거짓이에요.”


그럼에도 최인아라는 사람의 소명을 거론한다면.

“샘플론으로 말하고 싶어요. 나는 롤모델이 없었는데, 그 상황을 아쉬워하지 않고 오히려 즐겼어요. 내가 롤모델이 되고, 내가 샘플이 되자고. 회사 내에 만연한 남성 위주의 제도와 시스템은 한 번에 바뀌지 않아요. 사회가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이 그렇고 조직 운용 방식이 오랫동안 그렇게 되어왔으니까. 그럴 때 중요한 건 개인의 돌파력이에요. 어떤 개인 한 명이 정말 죽을힘을 다해 돌파하면서 샘플이 되면 ‘어? 저게 되네?’가 되는 겁니다. 최초라는 건 단지 두 번째나 세 번째보다 하나가 빠르다는 걸 의미하지 않아요. 그 최초의 샘플이 나오기 전까지는 불가능한 거예요. ‘저건 안 돼’ ‘길이 없어’ 하는 걸 되게 하고, 길을 만드는 최초의 사람이에요. 지도에 길이 없다면 그건 아직 만들지 않은 길이라는 뜻입니다. 아직 안 만들어서 없는 거예요. 누군가가 만들면 그 사람은 최초의 길을 낸 사람이 됩니다. 박세리 선수도 그렇죠. 박세리는 한국에서만 활동해도 충분히 괜찮은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LPGA에 도전했죠. 모두가 안 될 거라고 봤어요. ‘미국에 실력자가 얼마나 많은데 그게 되겠어?’ 했죠. 그런데 했어요. 이후 한국 여자 골프선수들이 줄줄이 세계를 제패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뭔가 안 되는 것을 되게 하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돌파해내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게 그 사람의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그 사람의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한 문장에 최인아 대표의 성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는 이런 사람이다. ‘이게 저의 소명입니다’라고 거창하게 얘기하는 대신 다른 샘플을 묶어 ‘그의 소명’으로 넌지시 공을 넘기는.

최인아책방에서는 북클럽을 운영한다. 매달 ‘책방 마님’ 최 대표가 한 권을 선정해 선정 이유를 담은 편지와 함께 집으로 배송해주는 서비스다. 북클럽 책을 선정하는 기준은 명확하다. 돌아볼 만한 질문을 던지거나 의미 있는 인사이트를 품고 있거나. 회원은 점점 늘어 북클럽 도서에 선정되면 1쇄를 책임지는 규모가 돼가고 있다.

그에게 포부를 묻지 않았다. 포부, 성공, 행복 등의 개념은 그가 지향하는 세계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책방이 해온 일에 대해 이렇게 구체적으로 말했다.

“나는 지난 5년 동안 두 가지 일을 해왔어요. 하나는 우아하고 지적이고 충만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것이고, 또 하나는 자기 언어를 가진, 혹은 가지길 원하는 분들이 모여드는 밀도 있는 공기를 만든 거예요. 이 일은 계속돼야 해요. 하나의 생각나무가 또 하나의 생각나무를 만나서 결국 생각의 숲을 이루는 곳. 우리 책방이, 종국에는 우리 사회가 그렇게 되면 좋겠어요.”
  • 2022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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