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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떠난 청년들

장슬기 신선해 농원 대표

전남 진도군 첩첩산중의 ‘약초아씨’

글·사진 : 서경리 기자

전남 진도군의 칠전마을 심심산골.
이곳에 청년여성인농업협동조합 회장이자 신선해 농원의 장슬기 대표가 산다.
도시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화학도를 꿈꾸던 그는 고향으로 내려와 치유농업의 텃밭을 가꾸고 있다.
그늘이 깊어 약용작물이 잘 자라는 이곳에서 작약, 초석잠, 구기자 등을 재배해 팔고, 마을 사람들을 위한 팜파티를 열어 숲속 가야금연주회도 갖는다.
자연에서 받은 선물을 다른 이들에게도 나눠주고픈 마음이다.
장슬기 대표를 만나러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서울에서 KTX를 타고 목포에서 내려 한 시간가량 차를 타고 가야 하는 전남 진도. 그 안에서도 장 대표의 농원은 첩첩산중에 위치해 있다. 의신면 칠전마을에서 뱀 모양으로 꼬불꼬불 난 농로를 따라 차로 달리기를 십여 분. ‘뱀골’이라 불리는 숲속 울창한 골짜기 사이로 붉은 작약이 드넓게 펼쳐졌다.

“이 근방에 사람이 사는 데는 우리 집뿐이에요. 어릴 적 동생들이랑 매일 흙장난하고 계곡물에서 멱 감고 놀던 곳이에요. 우리 가족의 리틀 포레스트죠.”


그의 말을 듣고 주위를 둘러보니 산과 계곡, 논밭만 있을 뿐 인가라곤 그의 집 하나가 전부다. 작은 숲에는 도시의 소음 대신 산새와 풀벌레,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과 계곡 물줄기의 협주곡이 펼쳐지고 있다.

“자연이 주는 기운이 있어요. 도시에서는 흙을 밟을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잖아요. 이곳에서는 맨발로 흙을 밟고 매일 동물과 뛰어놀아요. 밭에서 자란 감자나 머위, 토마토를 따 먹으며 도시에서 살 때보다 더 건강해졌죠. 자연이 키운 힘이에요.”


절망에서 희망으로… 화학도가 농부로 거듭나기까지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장슬기 대표는 도시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고민하던 청년이었다. 유년 시절 자연에서 자란 덕에 식물에 관심을 갖게 됐고, 충남 공주에 있는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며 식물이 가진 건강한 성분을 찾아내는 데 골몰했다. 졸업 후에는 약학대학원에서 약용식물을 더 깊이 공부해 제약회사나 화장품 회사에 들어가기를 꿈꿨다.

도시에서 살며 막연히 나중에 나이 들면 시골에서 텃밭 가꾸며 살아야지, 했는데 귀향의 길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그가 대학을 졸업하던 해, 부모가 운영하던 사슴농장과 민물양식장이 경매에 넘어갈 수 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사료값이 폭등하고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 어릴 적 추억이 담긴 터를 남의 손에 넘길 순 없었다. 삼 남매의 맏이였던 그는 고민 끝에 대학원 진학을 포기했다.

농장을 살리기 위해 고향에 돌아왔지만, 뚜렷한 돌파구는 없었다. 사슴만 키워온 부모도 농사 경험이 없다 보니 호박이나 배추 등 키우는 작물마다 실패를 거듭했다. 농사일은 경험이 쌓이며 점차 성과를 내는데, 유통이 문제였다. 계약재배로 농작물을 판매했지만, 자연재해가 생길 때마다 번번이 농사를 망쳐 제값을 못 받아 1년 치 수고가 허사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청년 농부의 1원칙, ‘가장 맛있을 때 수확해 바로 먹자’

구수한 강황과 향긋한 표고버섯, 볶은 작두콩과 초석잠을 말려 만든 수제 건강차.
농사로 방황하기를 4년. 장 대표는 고심 끝에 계약재배가 아닌 직거래로 유통을 뚫었다. 미니밤호박, 초석잠, 구기자, 고구마 등 제철에 수확한 작물을 들고 지역 축제나 직거래장터를 돌며 고객을 직접 만났다. 그가 농사지으며 가장 크게 깨달은 바는 ‘가장 잘 익었을 때 수확해야 맛있다’는 점. 한 번에 팔 수 있는 양만 재배하고 제일 맛있는 시기에 수확해 제철의 맛을 느끼게 하자는 게 그의 농사철학이다. 뜻이 통했을까. 알음알음 단골이 늘며 농장도 활기를 찾아갔다.

귀농을 결심한 순간부터 장슬기 대표가 관심을 가진 건 약용작물, 특히 작약이다. 농장이 있는 골짜기는 일조량이 적고 그늘이 깊어 약초를 재배하기에 적합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또 작약은 여성 질환 예방에 효능이 있는데, 항상 가족만 생각하느라 자신을 돌보지 못하는 어머니가 떠올랐다.

장슬기 대표는 브랜드 ‘내안에 플러스’를 통해 석류칡과 고지베리(구기자), 진녹용홍삼, ABC 주스 등 갖가지 농산물로 가공한 기능성 음료를 판매하고 있다.
“작약은 쓰임이 무궁무진해요. 꽃잎은 말려서 꽃차로 쓸 수 있고, 뿌리는 흔히 몸보신에 좋은 쌍화탕 재료로 쓰이죠. 신경통에도 좋고, 무엇보다 부인과 질환에 도움이 되는 성분이 많아요. 우리를 키우느라 고생하신 어머니와 할머니를 위해서라도 재배하고 싶었어요. 나중에는 작약으로 갱년기 여성을 위한 액상차도 개발해보려 해요.”

그는 약용작물을 제대로 키우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농업인대학 약초재배반에 진학했다. 1년 동안 약용작물 재배 과정을 공부하고, 유기농기능사와 티블렌딩, 식품가공기능사 교육 등을 두루 거쳤다. 또 진도농업기술센터와 농협에서 받은 교육을 바탕으로 농산물 가공에도 열을 올렸다. ‘내안에 플러스’라는 브랜드를 내고, 구기자·칡·석류·비트 등 신선한 재료로 즙을 내 몸에 좋은 음료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해마다 하나둘 상품을 개발해 지금은 열다섯 가지 즙과 볶음차를 판매하고 있다.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고 자연으로 키운 건강한 수제 음료다.


마을 사람들과 ‘팜파티’

농약과 화학비료를 일체 사용하지 않고 자연에서 키운 진도 특산물 구기자.
5월의 들녘. 만개한 작약이 봄 햇살에 붉게 빛났다. 뿌리를 주로 쓰는 약초는 보통 키우는 데 4~5년이 걸리는데, 그가 2016년 농장에 심은 작약이 지난해 처음 꽃을 피웠다. 3000평(9917㎡) 부지에 가득 핀 작약 꽃을 혼자 보기 아까워 조촐하게나마 팜파티도 열었다. 그동안 농장을 아껴준 사람들과 마을 주민들을 위한 자리다. 작약꽃밭 체험과 꽃다발 만들기, 숲속 가야금연주회 등 작약꽃과 함께하는 시간을 만들고, 농장에서 키운 초석잠·취나물·두릅으로 장아찌를 만들어 한 상 푸짐하게 자연밥상을 대접했다.

진도 청정자연에서 맛본 밥상이 얼마나 꿀맛이었을지 상상이 간다. 자연의 품에서 웃고 즐기는 사람들을 보며 그는 ‘자연이 주는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소박한 꿈도 꾸었다.

“무엇보다 저 자신이 자연에서 치유받은 경험이 컸어요. 계곡에서 물장구치고 동생들과 흙에서 뒹굴며 자란 경험이 지금의 제 감수성을 기르고 선한 사람으로 키워냈다고 봐요. ‘코로나블루’라는 말이 있을 만큼 우울한 이 시기에 농장에서 건강한 먹거리로 몸을 보신하고, 자연에서 마음을 치유받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죠.”

그는 꿈을 구체화하기 위해 올해 초 사이버대학에 등록해 치유농업을 공부하고 있다.

“작년에 청년 농부들을 위해 농협재단이 마련한 체험 프로그램으로 네덜란드 농장을 견학하며 치유농업을 처음 접했어요. 농업으로 사람을 치유한다는 건데, 치매노인이나 지체장애인들에게는 텃밭 가꾸기로 소근육을 키워주고, 도시인들에겐 팜파티 같은 농촌 체험으로 몸과 마음의 안정을 돕는 거죠. 치유농업을 도입하면 도시인들이 자연을 접할 기회가 늘어나겠죠. 자연이 주는 좋은 에너지를 많은 분들이 누리면 좋겠어요.”


청년여성농업인협동조합 회장 맡아

활짝 핀 작약꽃밭 사이에서 강아지 동백이가 뛰어놀고 있다. 동백꽃 필 무렵 태어나 이름이 ‘동백이’다.
장슬기 대표는 올해 초 청년여성농업인협동조합(이하 청여농) 회장을 맡으며 어느 때보다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만 18~39세 농업에 종사하는 여성이 모여 만든 청여농은 그가 농사일로 홀로 고군분투할 때 동아줄처럼 힘이 되어준 단체다.

“사실 처음 농사일을 시작했을 때 주변에서 ‘젊은 애가 시집도 안 가고 여기 와서 뭐 하냐’는 소리를 할 때마다 자존감이 뚝뚝 떨어졌거든요. 도시에서 낙오된 사람으로 보듯 달갑지 않은 시선을 견뎌야 했죠. 그때는 저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제 친구들이 정장에 뾰족구두 신고 도시를 활보할 때 저는 장화 신고 호미 들고 밭 매고 있었으니까요(웃음). 그때 또래 여성 농업인을 만나 함께 교육받고 경험을 나눈 시간이 힘이 됐어요. 제가 도움을 받았듯 이제 갓 농부의 길로 들어선 이들에게 징검다리가 되어주고 싶어요.”

자연과 가까이하는 농부의 삶은 뭐든 쉽게 되는 게 없다. 노력에 비해 결과물이 좋지 않을 때도 많다. 그저 욕심내지 말고 묵묵히, 차근차근, 좋은 먹거리를 위해 오늘을 걷는 길이 청년 농부로서 할 몫이다.

“도시의 삶은 늘 시간에 쫓기죠. 이곳에서 자연과 어울려 살다 보니 마음에 여유가 생겼어요. 자연은 매일매일이 달라요. 계절마다 들리는 새소리도 다르고, 냄새도 똑같지 않죠. 자연의 변화를 체험하며 소소한 행복을 얻고 있어요. 이곳에서는 자연이 주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면 돼요. 도시에서처럼 성공을 향해 경쟁할 필요가 없죠. 작물이 잘 크는 것도, 잘 자라지 않는 것도 모두 자연의 힘이에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잘 돌보는 것뿐. 자연 앞에 겸손해지는 삶을 이곳에 와서 배웠어요.”

“자연의 속도에 순응하며 살아라”, 9년 차 농부가 전하는 삶의 진리다.
  • 2021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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