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K-부심

안마노 안그라픽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한글의 다양한 얼굴을 찾아내다

글 : 유슬기 기자  / 사진 : 서경리 기자


2019 〈한글집〉 전시.
안마노 디자이너의 작업은 한글을 접점으로 북 디자인에서 공간, 영상, 예술, 전시 등으로 확장된다. 2019년 한글날 즈음 한글을 좋아하는 디자이너 김대연, 정영훈 등과 함께 한글을 평면과 설치 작품으로 꾸민 전시 〈한글집〉이 그 예다. 이들은 실험정신을 담은 작품으로 한글의 아름다움을 경험하도록 공간을 꾸몄다. 그동안 안마노 디자이너의 작품은 무용, 패션, 음악, 교육 등 각 분야의 창작자들과 협업을 통해 탄생했다.

“한글이 다양한 얼굴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이미 다양하지만 더 새로운 얼굴을 찾아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특히 한글은 누구나 손쉽게 쓰고 읽을 수 있기 때문에 더 날카로운 예민함을 갖고 작업하게 됩니다. 파격, 실험이라는 가치와 규칙, 기능이라는 가치 사이에서 균형감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안마노 디자이너는 현재 안그라픽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 안상수 디자이너가 1985년 설립한 안그라픽스는 모든 과정에 컴퓨터를 도입한 최초의 디자인회사다. 1984년 겨울 안그라픽스가 태어나던 때 사무실엔 책상, 의자 몇 개와 디자인스코프 기계 한 대가 전부였고, 당시 빌려 쓰던 종로 2가 분식집 2층은 난로도 없이 싸늘했다. 시작은 소박했지만 포부는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모든 생각은 디자인적으로 한다.” 이 창작소에서 가장 최근에 한 일은 하동에 있는 박경리문학관의 전시 콘텐츠를 리뉴얼한 일이다. 문화기획집단 ‘17717 바람꽃’과의 협업을 통해 마치 박경리 선생이 말을 건네는 듯 공간의 콘텐츠를 재구성했다.

박경리문학관 리뉴얼 작업. ⓒ 안그라픽스

#한글,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담을 수 있는 문자

한국인의 미감을 가장 잘 드러내는 시각예술이라고 생각해요

독일의 글자 디자이너 얀 치홀트가 쓴 《타이포그라픽 디자인》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타이포그라피란 ‘활자로 쓴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첫째, 글을 읽기 쉽게 배열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배열하기 전에 글 내용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타이포그라퍼는 원고를 전부 읽어보고 이해해야 한다. 읽지 않으면 원고의 내용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얀 치홀트는 1902년 독일에서 글자 디자이너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 책으로 그는 제각각의 모양으로 흩어져 있던 전 유럽의 타이포그래피를 체계적으로 만들었다. 한글은 어떨까. 영어는 대소문자를 합쳐 52자만 디자인하면 되지만 한글은 최고 2350자, 국어를 제대로 표현하려면 1만 1172글자를 디자인해야 한다. 한글의 무한 확장성을 보게 되는 대목이다.


2019 연극 〈춘향전〉의 로고 타입.
1443년 세종 임금이 한글을 창제할 때 한글은 “어린 백성이 이르고자 할 바”를 담았고, 그 글자에는 글과 말뿐 아니라 숨과 얼도 담겼다. 백성의 말과 마음을 이해한 뒤 만들어진 게 한글이다. 안마노 디자이너는 “한글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담을 수 있는 효율적인 문자 시스템이자 한국인의 미감을 가장 잘 드러내는 시각예술”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얀 치홀트의 말대로 자음과 모음으로 조합된 한글의 단어, 문장 그리고 책 안에 담긴 의미와 내용을 이해하고 부려내기 위해 분투한다.

한글은 소리글자다. 하지만 소리만 담지 않는다. 글자는 생명이 있어 시대의 영향을 받는다. 19세기 말에는 일본이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한글에도 일본식 국한문 혼용체가 등장한다. 이후 주시경 선생은 문장을 순 한글로 바꾸는 데 매진한다. 당시에는 졸업장에도 졸업장이라는 말 대신 ‘익힘에 주는 글’이라는 말이 쓰였다고 한다. 이런 변화는 응당 타이포그래피에도 영향을 준다. 그러니 글자는 그냥 무생물의 문자가 아니라 시대를 담는 그릇이었다.

“한글이 다른 언어와 구분되는 특징은 자소의 조합을 통해 음성 표기를 가능하게 한 시스템 설계입니다. 보고 또 봐도 절묘합니다. 그 모든 콘셉트가 지금까지 ‘훈민정음’이라는 스크립트로 이어져 오고 있는 것도 대단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를 기호체계로 시각화했다는 근본적인 출발점에 경외심을 갖고 있습니다.”


아버지 안상수 디자이너가 만든 ‘마노체’. 안마노 디자이너의 이름을 딴 서체다.
#아버지는 안상수체 만든 안상수 디자이너

제 이름을 딴 마노체는 저를 닮은 구석이 있어요

안마노 디자이너는 자신이 다루는 재료가 ‘글자’라는 점에 집중한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글자는 읽히는 문자이자 들리는 기호이면서 공간을 차지하는 물체”이기도 하다. 이 오묘한 대상을 명료한 이미지로 담아내는 게 그의 과제다.

“제가 가진 재료를 이리저리 움직여가며 크기를 조정하고 색깔을 바꿔보고 획의 속도감도 조정해보면서 보게 되는 매 순간에 집중합니다. 그 순간에 감응하고 순간을 음미하면서 작업하려 하고요. 작업하는 동안에는 이 과정의 끝에 도달하게 되는 결과물이 어떤 모습일지 항상 궁금합니다.”

신중하면서도 창의적인 그의 면모는 안그라픽스의 정체성이자, 설립자의 마인드이기도 하다. 안그라픽스의 설립자는 ‘안상수체’로 알려진 안상수 디자이너다. 그는 한국 그래픽 디자인에 여러 업적을 남겼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한글 글꼴 디자인과 타이포그래피 분야의 공이다. 안상수체는 한글을 탈네모틀로 만들어 한글 글꼴로서는 처음으로 가변폭을 적용했다. 네모를 벗어난 일이 처음엔 낯설었지만 나중엔 “한글 창제 원리를 깨트리지 않으면서도 혁신을 이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이후 이상체, 미르체, 마노체 등을 만들었는데, 자신이 좋아하는 시인과 자녀의 이름을 딴 글꼴이다. 이 글꼴 이름 마노가 안마노 디자이너다. 그의 이름 역시 아버지가 지었다. 처음엔 ‘마루’를 생각했는데, 번뜩 ‘마노’라는 단어가 떠올랐다고 한다. 이 이름의 뜻을 채워가는 건 안마노 다자이너의 몫이다.

“어린 제 기억에도 아버지는 굉장히 부지런하고 학구적이셨어요. 항상 물고기를 잡아주기보다 낚시하는 법을 알려주신 분이었습니다. 그래픽 디자이너라는 아버지의 직함이 정확히 어떤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성장기 저에게 자연스럽게 다가왔고 제 진로에도 영향을 줬습니다.”

‘마노체’를 가만히 보고 있자면 정말 자신과 닮은 구석이 있는 것도 같다며 그는 웃었다. 마노체는 안상수체의 이른바 ‘요즘 버전’ 같다. 날씬하고 깔끔한 안상수체보다는 좀 더 둥글고 따스한 느낌인데, 반듯하면서도 익살맞다.


01_ 2020 〈다시개벽〉. 02_ 2018 광주비엔날레 도록 〈상상된경계들〉.
#글자 속을 걸으며 탐구

서예나 필기 같은 근본적인 부분을 되짚어보려 합니다

아버지가 글자와 그 글자의 얼을 담은 꼴에 집중했다면 아들은 이 글자와 다른 분야의 협업, 그 무한한 확장성에 매료되어 있다.

“요즘 저의 관심사는 글자와 시간, 몸 사이의 관계를 정리하는 일입니다. 한글의 새로운 모습을 탐구하는 데 서예나 필기 같은 아주 근본적인 부분을 되짚어보려 합니다. 그러다 보면 뜻밖의 돌파구가 나올 것 같아요.”

그가 가장 많은 영감을 얻는 시간은 걷고 또 걸을 때다. 걷기는 그의 생활에 중요한 부분이다. 길에만 나가봐도 간판에, 현수막에, 자동차와 지하철, 전광판과 스마트폰에도 글자는 쏟아진다. 어떤 글자는 소음처럼 들리고, 어떤 글자는 직관과 위로로 다가온다. 그 숱한 글자들 속을 걸으며 그는 공부하고 또 나아간다.

안마노 디자이너는 언젠가는 아버지가 자신의 이름을 담은 글꼴을 만들었듯 그 역시 자신의 아이를 닮은 글꼴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생각한다. 글꼴 이름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의 이름으로 지을 생각이다. 그보다 먼저는 무서운 속도로 자라, 벌써 아쉽고 야속한 아이들이 더 크기 전에 아이와 함께 보낸 시간을 담은 동화책을 만들고 싶다.

“돌이켜보면 지나치게 앞서가지도 혹은 너무 뒤처지지도 않게 그저 꾸준한 저만의 속도로 온 것 같습니다. 이 속도와 마음을 제 작업에 담아내는 게 디자이너로서 소망입니다.”
  • 2021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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