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제 맥주 전성시대

이슬기의 슬기로운 맥주 생활

글 : 이슬기 

낮맥의 권리

아침에는 직접 내린 커피로 하루를 시작하고, 저녁에는 냉동실에 살짝 얼려둔 맥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커피를 즐기기 시작한 지는 7년 정도 됐고, 맥주는… 가만 생각해보니 (잠깐의 외도 기간을 제외하고) 20년이 넘었다.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할 때는 밤이 깊어 대중교통도 끊겼고, 술기운을 빌리면 없던 아이디어가 분명 생길 거라는 좋은 핑곗거리가 있었다. “맥주 한잔할래? 가위바위보!” 진 사람이 커다란 맥주 피처를 샀고, 작은 종이컵이 눅눅해지도록 운동장 벤치에 앉아 밤이슬을 맞으며 맥주를 마셨다. 피처 하나가 끝나고, 또 하나가 끝나고, 실컷 웃고 떠들다 보면 놀랍게도 그럴싸한 아이디어가 찾아왔다. 아침에 돼서 보면, ‘이게 뭐지?’ 할 때도 있었지만 우리는 개의치 않고 그 재미있는 밤의 대화를 매일 즐겼다.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스트레스성 공황장애가 왔다. 분명 무언가 맞지 않아서 나가고 싶지만, 스스로를 설득할 만한 정당한 이유를 댈 수 없었다. 그 생활이 반복되다 보니 퇴근을 해도 온 정신이 모두 회사에 쏠려 있어 잠을 자지 못했고, 먹은 것들을 다 게워냈다. 이러다 내가 잘못될 것 같아 덜컥 겁이 났다.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되도록이면 집에 가져오지 않으려고 한 시간 거리를 매일 걸었다. 그리고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작은 의식을 가졌다. 편의점에서 산 캔맥주를 홀짝홀짝 마시며 나에게 짧은 편지를 쓰는 것이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아지지 않아도 괜찮다.’

나와 내가 나눈 대화들이 모여 어떻게 살고 싶은지가 조금씩 짙어졌고, 그 무렵 회사를 나왔다. 퇴사 후 가장 좋았던 것 세 가지를 꼽자면 언제든지 마음대로 여행을 갈 수 있는 것, 평일 낮에 낮잠을 잘 수 있는 것, 자고 일어난 후 시원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낮맥을 마실 수 있는 것이다. 오후 세 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맥주를 마시고 있다. 정말이지, 내가 원하던 일상의 여유로움이다.


온갖 술을 외도해 봤지만

그런데, 왜 하필 맥주였을까? 맥주 한 캔이면 기분이 좋아져서? 한 잔을 마시기 위해 안주나 잔을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돼서? 뚜껑을 딸 때, ‘펑’ 하고 터지는 소리가 시원해서? 만 원이면 네 캔이나 살 수 있어서?

한가로운 시간이 길어지면서 슈퍼마켓 맥주, 편의점 맥주 그리고 마트에 진열된 세계 맥주까지 거의 모든 맥주를 마셨다. 그러던 2년 전 이맘때였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오늘의 맥주를 사러 나가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인생의 모토가 죽기 전에 최대한 많이 경험하는 건데….’

그날로 맥주에게 외도를 선언하고, 가장 있어 보이는 술, 와인을 집어들었다. 집에 있는 유리컵으로 먹으려니 폼이 안 나서 오목한 유리잔도 사고, 어울리는 치즈도 검색해서 구입했다. 그런데 이 녀석은 한번 마실 때마다 조명이 어두워야 할 것 같아서 주홍 스탠드를 켜고, 왠지 재지(Jazzy)한 음악을 틀어야 할 것 같고, 그 모든 준비를 하고 나서도 코르크를 따야 하고 한번 마시기가 번거로웠다.

그다음엔 영화에서 많이 보던 보드카와 진을 선택했다. 샷으로도 마셔보고(목이 타들어가는 줄 알았다), 맞는 잔을 찾아서 얼음을 때글때글 굴려 마셔도 보고, 다른 음료를 더해서 예쁜 색의 칵테일로도 마셔봤다. 처음엔 만드는 것이 신났는데, 익숙해지니 이것도 시들해졌다.

있어 보이는 술들은 나와 맞지 않는 것 같아서 소주와 고량주로 갈아탔다. 분명 술이 약해 독주를 잘 못 마셨는데, 그동안의 트레이닝 덕분인지 술들이 달았다. 드디어 ‘인생을 알게 됐다’고 자축도 했다. 그런데 역시 술은 ‘쪼랩’이라 소주를 마시려면 ‘어묵탕’이 필요했고, 고량주는 탕수육이 필요했다. 그렇게 두어 달을 자주 마시니, 점점 바지가 작아지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몸무게를 재어보니, 헉?!

잠깐의 외도를 가진 후, 결국 나의 오랜 벗, 맥주에게 돌아왔다. 마시고 싶을 때 캔 뚜껑만 따면 되고, 한 잔으로도 적당히 기분이 좋아지며, ‘갓성비’(신이 내린 가성비)를 자랑한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맥주가 빚어내는 약간의 취기가 사람을 솔직하게 만든다.

편한 대화를 나누고 싶다면 맥주, 시원한 맥주다. 소주처럼 무겁지 않고, 와인처럼 격식을 차리지 않아도 된다. 말이 나온 김에, 오늘 맥주 한잔 어때요?

글쓴이 이슬기는 한때 회사원이었다. 지금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일 년에 두세 달쯤 훌쩍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며 사업가, 작가, 여행가, 교육가로 활동하고 있다. 인생을 무대로 평범한 사람이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삶의 방법을 연구하고, 공유하는 것을 사랑하며 워라밸 연구소 ‘액션 랩’을 운영 중이다. 《퇴사를 준비하는 나에게》 《댄싱 위드 파파》를 썼다.
  • 2020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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