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살이

이현경 제주박스 대표

제주 배송 불가? 이제 없어요!

글 : 선수현 기자  / 사진 : 서경리 기자

이현경 대표가 물류창고에서 지게차를 운전하고 있다.
그는 직접 물품을 나르기 위해 3톤 미만 지게차 운전면허증을 취득했다.
‘제주 지역 배송 불가.’

제주 소비자 입장에서 보면 청천벽력 같은 말이다. 클릭 한 번으로 해외 직구도 손쉽게 이뤄지는 세상에서 배송에 가로막히다니. 제주에서 2500~5000원의 추가 요금을 내면 육지의 작은 물품은 구입할 수 있지만 가구, 가전제품 등은 구입이 어렵다. 도내 상점이 있지만 인터넷상의 다양한 제품에 비하면 선택할 수 있는 가격도, 모델도 참 제한적이다. 비싼 비용을 지불하고도 판매자가 화물차를 채울 상품을 모을 때까지 기약 없는 기다림이 이어지기도 한다. 별다른 대안이 없으면 소비자가 육지에 가서 마음에 드는 물건을 직접 차에 실어 배로 제주에 들여와야 한다. 이 문제는 제주 사회에서 10년 이상 공론화됐지만 해결은 지지부진하다.

화물차의 유휴 공간을 활용한 제주박스의 획기적 물류 시스템은 이런 고민의 산물이다. 2019년 6월 서비스를 시작한 제주박스는 육지에서 물품을 모아 제주에 배송하는 일종의 2차 물류회사다. 주로 중소형 비규격 화물, 신선식품 등을 다루며 제주 배송 불가 제품에 길을 텄다. 기간도 육지보다 하루만 더 소요될 뿐이다. 제주라는 공간 제약의 문제를 해소하며 입소문을 타고 이용객이 꾸준히 늘고 있다. “제주에서 배송받지 못하는 건 없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현경 제주박스 대표를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에서 만났다.


30% 틈새에서 답을 찾다

이현경 대표가 물류창고를 확인하고 있다.
배송 불가, 높은 비용, 느린 배송. 제주도민이라면 감내하고 살아야 하는 현실이다. 이 대표 역시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 제주로 옮겨오면서부터 육지와의 단절은 늘 불만이었고 탈제주를 꿈꿨다. 그가 대학 진학을 위해 서울로 올라갈 때까지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제주에서는 탈제주를 꿈꿨지만, 제주를 벗어나니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보였다. 기회가 많다는 뜻이기도 했다.

“제주는 섬이에요. 물류비가 많이 들죠. 상품이 파손되면 판매자 입장에서 반품이 골치 아프니까 소비자가 많지 않은 제주에는 판매하지 않는 거예요. 제주에 산다는 이유로 선택에 제약이 생기는 게 부당하게 보였어요. 서울에 살다가 다시 제주로 오니까 같은 사회에 사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단절이 크더라고요.”

그의 눈에 들어온 건 제주로 들어가는 화물차의 유휴 공간이었다. 월 1만 5000대 이상의 차량이 물품을 싣고 제주로 향하지만 평균 30%는 빈 상태였다. 가득 차봐야 85%. 절반이 비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유휴 공간은 곧 틈새시장을 의미했다. 그는 안성물류센터에서 목포항을 통해 제주로 들어오는 3PL(물류전문업체 아웃소싱) 업체를 통하기로 했다. 물류에 공간 비즈니스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제주박스의 이용 방법은 간단하다. 먼저 고객들이 제주박스 홈페이지에서 배송 요청을 한다. 인터넷·홈쇼핑으로 물건을 주문할 때 고객은 받는 곳에 안성물류센터 주소를 적는다. 오후 7시 전 안성에 모인 물건들은 5톤 트럭에 실려 밤새 배를 타고 아침이면 제주물류창고에 도착한다. 제주 내에서는 배송 시스템이 잘돼 있어 당일이면 물건을 받아볼 수 있다.

제주박스는 2019년 실리콘벨리에서 진행한 ‘유스 스타트업 피칭 데이’에 참여해 공차율 해결 아이디어를 제시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 제주박스
이 대표는 6개월 이상의 테스트 기간을 거치는 동안 소형 물품부터 대형 화물, 신선식품류까지 다뤄봤기에 자신이 있었다. 혹시 옮길 수 없는 물품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더니 “없다”고 단언했다.

제주박스 이용객 가운데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건 제주 이주민이다. 특히 제주 한 달 살기 열풍에 가세한 고객의 이용이 늘었다. 과거에는 육지에서 사용하던 물건을 모두 남겨두고 제주로 와야 했는데, 제주박스를 통해 물건을 옮길 수 있게 되면서다. 제주에 오랜 기간 거주한 사람들도 제주에서 받아볼 수 없던 물건을 받게 됐다. 예기치 못한 불편함에서 벗어난 덕에 제주박스의 자체 조사 결과 재이용 희망률은 100%, 고객 만족도는 5점 만점에 4.8점을 기록했다. 고객들은 빠른 배송에 높은 점수를 줬다.

소형 물품 역시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소형 택배는 비용을 추가하면 받아보는 데 큰 지장이 없지만 물품이 여러 개면 얘기가 달라진다. 가령 A, B, C 쇼핑몰에서 각각 주문을 하면 업체별로 2500~5000원의 비용이 부과되지만 제주박스를 이용하면 안성물류센터에서 묶음처리가 가능하다. 비용은 2000원이 추가되고, 안성에 도착한 다음 날이면 받아볼 수 있다.


도서 지역 공차율 해결, 해외에서도 주목

© 제주박스
이 대표는 매일 오전 물류창고에서 주문을 확인한다. 직접 지게차와 화물차를 운행하며 물품을 나른다. 오후에는 고객의 문의전화를 응대하고, 트럭을 몰고 물건을 배송하기도 한다.

“물류는 소비자와 기업이 직접 만나는 지점이 많아요. 그럼에도 물류산업에서 놓친 부분이 고객 서비스라고 생각합니다. 고객이 원하는 배송 시간대, 가격, 애로사항 등을 모두 고려해야 만족도가 높아지겠죠. 제주박스는 그 부분에 가장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어요.”

지난해는 B2B(기업 대 기업) 성장 가능성도 확인했다. 제주 전 지역 교육기관에 컴퓨터를 보급하는 과정에서 제주교육청은 서울에 있는 업체에 컴퓨터를 주문했다. 서울의 업체는 파손 우려가 있는 제품을 적정한 가격대에 배송할 곳을 찾다가 제주박스에 문의를 해왔다. 제주박스는 파손 주의를 요하는 컴퓨터를 납기일에 맞춰 우도, 추자도까지 제주 140여 곳에 배송을 마쳤다. 이 대표는 “이후 기업 고객이 눈에 띄게 늘었다”고 했다.

제주박스의 또 다른 관심사는 제주에서 나가는 화물차량의 적재율 해소다. 제주에 들어오는 화물차량의 30%가 빈 현실도 문제지만 제주에서 나가는 차량은 세 대 중 두 대가 빈 채로 나가 더 심각한 상황이다. 이 대표는 이 문제를 공유경제로 풀려고 한다. 유휴 공간이 있는 차주와 배송을 희망하는 화주를 플랫폼으로 연결해 제주의 물류 수준을 높이는 게 목표다.

도서 지역 배송 불가는 해외에서도 주목하는 사안. 제주박스는 지난해 실리콘밸리에서 진행한 ‘유스 스타트업 피칭 데이(Youth Startup Pitching Day)’에 참여해 혁신적이란 평가를 받으며 우승을 차지한 바 있다. 이 대표가 구상하는 플랫폼이 현실화되면 제주뿐 아니라 해외 도서 지역에서도 공차율을 해결하는 방안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아마존도 처음에는 책만 팔았지만 지금은 없는 게 없잖아요. 제주박스도 점차 제주 물류 전반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업으로 키워가고 싶어요. 소비자는 권리를 회복해서 좋고, 공차율 문제도 해결하면 국가 산업에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요?”
  • 2020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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