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살이

‘어니스트 밀크’ 채빛나·별나·소라

제주로 이주한 ‘현실 자매’의 좌충우돌 목장 일기

글·사진 : 서경리 기자

고요한 한밤중, 시골 외딴 젖소 목장. 들판에 풀어놓은 소가 길을 잃고 울타리를 벗어나며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컹컹컹’ 개들이 짖어대고, 그 소리에 더 놀란 소떼가 사방팔방 흩어지며 도로로 뛰어들었다. ‘음머음머’ 소가 울어대는 통에 소몰이하는 목동의 등이 땀에 흠뻑 젖었다. 때 아닌 소들의 난동이 진정될 즈음, 불빛 하나 없이 깜깜한 목장 위로 휘영청 밝은 달 하나가 떠올랐다. 채빛나・별나・소라 세 자매의 좌충우돌 목장 이야기다.
“소가 덩치만 컸지 얼마나 겁이 많은데요. 항상 떼로 우르르 몰려다녀요. 또 자기네들끼리 신나서 뛰어놀 땐 얼마나 귀엽게요. 그날 난리도 아니었지만, 떠올려보면 제일 재밌고 행복했던 순간이에요. 쉽게 경험 못 할 목장의 추억이죠.”(채빛나)

제주도에서 젖소 120마리를 키우는 채빛나·별나·소라 자매. 이들을 만난 건 성산일출봉이 바라보이는 성산읍 성산리 ‘어니스트 밀크’ 매장에서다. 이곳에서 자매는 매일 아침 짜낸 신선한 우유로 요거트를 만들어 판다. 어니스트 밀크는 “정직하게 기른 소로 정직하게 우유를 짜고 정직하게 판다”는 세 자매의 포부가 담긴 이름이다.

이들 자매의 부모는 전북 고창에서 20여 년 동안 젖소 목장을 운영하고 있다. 빛나 씨 말로는 부모님이 젊어서부터 고추, 수박, 땅콩 등 안 키워본 작물이 없는데, 농사에는 영 소질이 없었는지 돈이 벌리지 않았다고 한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도전한 사업이 바로 목축이다. 송아지 세 마리로 시작해 300마리가 넘도록 목장을 키워냈다. 빛나 씨는 “성실하게만 운영하면 유지할 수 있는 게 목장”이라며 웃는다.


1남 3녀 중 장녀인 빛나 씨는 목장일로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동생들을 돌봐왔다. 두 살 터울의 사 남매는 유치원 때부터 늘상 붙어 다니며 컸다. 부모님은 그에게 “네가 사 남매 중 대장이니 동생들을 챙겨야 한다”며 신신당부했다. 어미 소에게 여물을 주거나 송아지 우유 먹이는 일, 또 소가 좋아하는 무를 옮기는 일은 사 남매의 일상이었다. 20kg짜리 사료도 거뜬히 들어올릴 정도로 다들 야무졌다.

목장에서 뛰어놀고, 짚풀 더미에서 뒹굴며 자라난 사 남매는 성인이 되어 각자의 꿈을 찾아 고향을 떠났다. 영화감독을 꿈꿨던 첫째 빛나 씨는 대학에서 영화영상학과를 졸업하고 드라마 스크립터로 일했으며, 둘째 별나 씨는 식품영양학과를 나와 기업체 영양사로 들어갔다. 셋째 소라 씨는 서울의 광고회사에 취직했다. 막내아들인 수오 씨만 일찍이 가업을 이어받을 생각으로 축산학과에 진학하고, 졸업 후 부모님 뒤를 이어 고창의 목장을 운영하고 있다.


아버지의 오랜 꿈이 이뤄지다

목장에서 직접 짠 신선한 우유로 무가당 요거트를 만들어 파는 ‘어니스트 밀크’.
요거트는 미리 주문받아 제작하는데, 일주일에 평균 400L 정도가 팔린다.
꿈을 향해 각자의 길을 가던 세 자매가 다시 뭉친 건 뜻밖에도 제주에서다.

“아버지는 항상 초원이 펼쳐진 목장에 대한 환상이 있었어요. 뉴질랜드나 호주에서처럼 소를 자유롭게 풀어두고 방목을 하고 싶어 하셨죠. 땅 넓고 소 키우기에 좋은 환경을 찾아 제주까지 오게 됐습니다.”(채소라)

8년 전 아버지는 무작정 제주도로 내려와 목초지를 고르고 땅을 샀다. 제주에서는 이곳에서 난 소만 키울 수 있기 때문에 소 파는 목동을 찾아다니다 한 노인으로부터 땅을 빌리고 소 38두를 샀다. 제주 한림읍 금악리, 주변에 인가 하나 없는 ‘깡촌’에 다 쓰러져가는 축사 한 채 덜렁 있는 허허벌판이었다. 아버지는 마침 일을 그만두고 쉬고 있던 둘째 별나 씨에게 도와달라 부탁했고, 2015년 별나 씨가 제일 먼저 제주로 내려왔다.

“가축을 기르는 일은 손이 많이 가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소 젖을 짜고, 집에 돌아와서 좀 쉬었다가 다시 오후에 목장에 나가요. 혼자 1년 정도 목장 생활을 하고 나니 아버지가 저의 영양사 경력을 살려 유가공을 해보자고 권했어요.”(채별나)

가족은 1년 뒤 성산읍 수산리에 제대로 된 축사를 지으며 목장을 옮겼고, 별나 씨도 본격적으로 유가공에 뛰어들었다. 첫째 빛나 씨는 그로부터 2년 뒤인 2017년 8월 제주로 내려왔다.

빛나 씨가 유가공을 결심한 건 둘째 별나 씨와 뉴질랜드로 목장 견학을 다녀오고 나서다. 너른 목초지에서 여유롭게 풀을 뜯는 소떼를 보며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곳에서 갖가지 치즈를 맛보며 자매는 ‘우리도 뭔가 시작할 수 있겠다’는 달곰한 꿈을 키웠다.


‘현실 자매’, 전쟁의 서막


떨어져 있던 시간이 길었던 걸까. 자매가 매일 붙어사니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동생은 몸으로 하는 일에 인이 배었지만, 글 쓰는 일만 해온 빛나 씨에게 목장 일은 고됐다. 너른 벌판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자주 싸웠다.

“한번은 기계가 고장 났는데, 제가 끙끙대며 고치고 있으니까 언니가 뒤에서 ‘수리 기사를 부르면 될 걸 왜 고생하냐’며 투덜대는 거예요. 누가 시골까지 와서 고쳐주나요. 알아서 해야지. 이 일로 엄청 싸웠어요.”(채별나)

“동생이 제게 ‘이제까지 직장 생활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고 하는데 정말 충격이었죠. 하하. 여태껏 동생들을 돌보며 대장 노릇 했는데, 여기 오니 제가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부모님까지 일 잘하는 둘째를 칭찬하며 자랑스러워하셨죠. 내가 왜 여기 와서고생하나, 싶어 소외감을 느꼈어요.”(채빛나)

‘제주도’에서 ‘카페’, 라는 두 단어에 꽂혀 제주행을 택한 셋째 소라 씨도 입이 댓 발 나오긴 마찬가지다. “상상과 현실은 전혀 다르다”는 게 그의 말이다. 자매는 인터뷰 중에도 투닥투닥 싸우다가 또 금세 옛날 얘기를 하며 깔깔 웃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진정한 ‘현실 자매’다.

2017년 10월 첫째 빛나 씨는 유가공품을 판매하기 위해 어니스트 밀크 매장을 열었다. 둘째 별나 씨는 목장을 전담하기로 했다. 각자의 몫을 해내기 시작하며 매일 이어지던 싸움도 잦아들었다. 2018년 가을, 소라 씨까지 합류해 세 자매의 본격 ‘제주살이’가 시작됐다.


행복은 문득 불어오는 봄바람처럼…

제주도 성산읍 수산리에 있는 세 자매의 젖소 농장. 젖소 120여 마리가 평화롭게 노닐고 있다.
둘째가 매일 아침 1.8t의 신선한 우유를 짜면, 첫째는 이를 받아 요거트나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판다. 이탈리아에서 젤라또를 공부한 셋째는 새로운 유가공품 개발에 열심이다. 세 자매가 뭉치니 손발이 척척 맞았다. 최근에는 그동안 번 돈을 모아 가공공장도 열었다. 지금까지는 즉석 제조만 했지만, 공장이 생겼으니 제조업 허가를 받을 수 있고 납품도 가능하다. 이를 발판으로 사업을 확장할 계획이다.

“거창한 계획은 없어요. 이제까지 매출을 계산해본 적도 없고요. 엄청나게 돈을 번 건 아니지만, 세금을 보니 조금 벌긴 했나 봐요. 하하. 가업을 이어받아 오랫동안 목장을 잘 운영하는 게 우리 꿈이에요.”(채빛나)

자매는 제주도에 살며 매 순간 행복을 느낀다고 했다.

“제주의 봄, 오후 4시 해질 무렵. 하늘은 물들고 손에 닿는 바람, 공기의 습도와 온도까지 모든 게 충족되는 때가 있어요.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만 바라봐도 행복하죠. 강아지들은 꼬리를 흔들며 졸졸졸 따라다니고요. 행복은 문득 불어오는 봄바람처럼 곁에 와닿는 것 같아요. 자연이 주는 선물이죠.”(채별나)

세 자매는 “우리에게 매일 건강한 우유를 선물하는 소에게 충분한 보상을 주자”고 늘 다짐한다.

“소가 편안하면 그만큼 질 좋은 우유를 내주게 돼 있어요. 우리 목장에서 자라는 동안만이라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키우고 싶어요.”
  • 2020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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