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고수들

안시내 여행작가

세 권의 책 낸 20대 배낭여행자

글·사진 : 안시내 여행작가

1. 이제까지 총 ( 40 )개국 ( 수많은 ) 도시에 다녀왔습니다.

2. 나를 변화시킨 여행지는 어디며, 이유는요?
인도예요. 수많은 장기 여행자들을 만나 각각의 여행 이유들을 들으며 많이 성장했습니다.

3. 여행이 고플 때는 언제인가요?
문득 어른이 됐음을 느끼고 다시 아이가 되고 싶은 순간.

4. 길을 잃었을 때 어떤 마음인가요?
예상되지 않는 길 속에서 무얼 볼 수 있을지 기대가 돼요.

5. 여행 관련 추천하는 책이 있다면요.
박준의 《ON THE ROAD》. 제가 읽은 첫 여행 책인데 아직도 마음을 울려요.

6. 당신에게 여행이란?
삶을 진하게 녹여낸 것. 수만 가지의 빛깔을 띠고 있는 것.
언제나처럼 짐을 꾸린다. 간만의 배낭여행이다. 옷가지 몇 벌, 슬리퍼, 세안도구와 간단한 화장품, 글을 써내려갈 노트북. 몇 달간의 여행이지만 배낭의 무게는 7kg이 조금 넘는다. 짐을 싸고 푸는 게 이제는 익숙하다. 익숙한 발걸음으로 거리를 나선다. 나이 든 나의 배낭은 다녀온 나라들의 국기들로 겉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벌써 6년이 흘렀다.

찬바람을 맞으며, 무거운 걸음을 옮기며 그 시절을 떠올린다. 스물둘,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1년을 보내겠다며 쓰리잡을 뛰어 모은 돈으로 첫 세계여행을 떠나던 순간. 그때도 지금처럼 차가운 겨울이었다. 두려움 때문인지 추위 때문인지 눈가에 눈물이 흘렀다. 같은 무게의 배낭이지만 다른 종류의 무게가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나는 어리고, 여렸다. 내가 봐온 세상과 다른 것들을 오롯이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배웠던 것들을 부정당할까 봐 느끼는 두려움일까. 하지만 예상과 180도로 다른 새로운 세상은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마음의 경계를 조금씩 풀고, 세상을 온전히 마주하기 시작했다.


물론 평탄하기만 했던 건 아니다. 휴대폰을 도둑맞고, 배낭을 통째로 털린 적도 있다.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사기를 당한 적도, 1000원 때문에 경찰서에 간 적도, 식비가 비싸 빵을 먹으며 한동안 버틴 적도 있다. 이 모든 고생의 기억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러나 돈을 아껴 하루라도 더 머물고자 했던 간절함이 낳은 가난한 여행은, 그 어떤 제약 없이 여행하게 된 지금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를 선물해줬다. 1000원짜리 밥을 함께 먹던 가난한 여행자 친구들과의 대화, 동네 사람들과 길바닥에서 짜이를 마시며 세상을 관찰하던 시간, 여행지에서 만난 잊지 못할 인연들, 그리고 스물둘의 내가 있었다. 걱정과는 다르게 숱한 마음의 짐들을 떨쳐놓고 온 첫 여행이었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고, 힘들 땐 엉엉 울자


부킹닷컴에서 찾아낸 숙소까지 배낭을 메고 택시로 이동하는 길에서, 1000원이라도 더 싼 곳을 찾기 위해 어깨에 빨간 자국을 남기며 더운 여름을 누비던 초보 여행자를 떠올린다. 초라한 행색에도 웃어주던 그곳 사람들의 조건 없는 미소를 떠올린다. 까마득하다.

고단한 여행과 기록하는 습관은 나를 여행작가로 만들어줬고, 이제는 한국에 있는 시간이 더 적을 정도로 수없이 여행을 다닌다. 하지만 여행이 늘어날 때마다 내 여행은 빛이 바랬고, 권태가 느껴지면서 진정한 여행의 의미에 대한 기시감까지 생겨났다. 가장 자연스러운 여행자이던 내 자신이 너무나 그리워졌다. 다시 느낄 수 있을까, 어른이 되어가며 사라져버린 건 아닐까. 이제 내게 여행의 의미가 변질되어버리진 않았을까.

스물여덟 살의 초입인 지금 나는 첫 배낭 여행지였던 태국, 가장 깊은 인상을 줬던 인도, 히말라야로 향하는 네팔로 걸음을 옮긴다. 순수하고 열의 넘쳤던 태국에서의 여행과 나를 내려놓게 만들어준 인도를 떠올리고, 킬리만자로를 생각하며 히말라야로 향한다.


그 시절, 아프리카 최고봉 5895m 킬리만자로로 향했던 이야기를 꺼내어본다. 운동에 관한 센스라고는 정말 눈곱만큼도 없는 내게 킬리만자로 등반은 무리였을지도 모른다. 같이 올라가던 독일에서 온 20대 친구들은 5000m에서 죄다 포기해버렸다. 나 역시 영하 30도의 추위와 고산병으로 정신을 잃었다. 수없이 넘어지고, 한껏 울어버린 내 얼굴은 눈물 자국으로 가득했다. 포기하지 않고 함께 정상으로 가는 사람 중 나는 꼴찌였다.

내 앞에는 손자와 함께 등반 중인 일본인 60대 할아버지가 힘겹게 산을 오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종종 내게 말없이 미소 지으며 간식거리와 미소국을 건네고는 했다. 어느 순간부터 할아버지 얼굴에서도 삶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든 듯한 미소가 사라져갔다. 그의 여윈 뒷모습을 보며 나는 수백 번 포기하려다가도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다. 내가 아는 세상의 모든 욕들이 발끝에서부터 올라왔다. 5600m쯤, 다리의 힘이 풀렸을 때는 기어서 정상을 향했다. 정신을 몇 번이고 놓았지만, 끝내 정상에 도달했다. 그곳 정상에서 발아래로 깔리는 세상을 바라보며 나는 삶을 관통하는 어떤 것을 조금이나마 깨달았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면 된다는 것을, 힘들 땐 엉엉 울고 나면 괜찮아진다는 것을, 걸을 힘이 없을 때는 기어서라도 가면 된다는 것을. 사람의 강함은 체력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는 것, 그리고 마침내 정상을 디뎠을 때 느낀 감정. 무구한 자연에서 작디작은 나의 존재와 나약한 나와 강인한 나를 동시에 마주했던 순간들. 세월을 맞으며 잊어버렸던 소중한 감정들을 떠올리기 위해 배낭을 다시 메었음이 분명하다.


괜찮다, 해보니까 별것 아니다


어쩌면 이제는 그때 그 감정을 다시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히말라야로 향하는 길 위에서 몇 번이고 다시 넘어질 수도 있다. 다만, 남은 삶 중에 가장 젊은 날인 오늘을 제대로 마주하기 위해 나는 또 다른 도전에 나섰다. 가진 게 없어 잃을 것이 없던 지난날의 여행과는 다르게 세 달간의 여행을 위해 포기한 것들이 참 많았다. 비행기 표를 덜컥 끊었을 때는 아직 이래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가볍게 비워질 통장 잔고가 걱정됐다. “참 걱정 없이 산다”는 주변인들의 말이 신경 쓰였다.


문득 그 시절 만난, 지금의 나와 비슷하거나 나이가 조금 많던 다른 여행자들의 말이 떠오른다. 네가 지금 떠나온 건 나중에 돌아봤을 때 너무 잘한 선택일 거라고, 나이가 들수록 떠나기 정말 힘들었다고, 떠날까 말까 망설이다가 결국엔 미루게 된다고, 나중에 정말 잃을 것들이 많아졌을 때 떠나오는 무거움을 몰랐으면 좋겠다고, 또 지금의 선택이 조금 더 가벼운 마음의 너를 만들어줄 거라고.

지금 나는 오랜만의 배낭여행의 시작에 서 있다. 카오산로드는 언제나 반짝인다. 이 익숙한 거리를 걷다가 제 몸만 한 배낭을 메고 있는 스물둘의 나를 마주한다. 외로운 얼굴과 강한 눈빛을 가지고 있다. 멍하니 그를 쳐다본다. 괜찮다고, 해보니까 별것 아니라고, 꼭 다시 자신을 마주하기를 바란다고. 반짝이는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안시내 작가의 여행 꿀팁


1. 한국말 잘하는 현지인은 경계하자
특히 여행자 거리를 걷다 보면 익숙한 한국어가 반갑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들이 구사하는 한국어는, 한국인들을 이용하기 위해 애써 배운 경우가 많다. 먼저 다가오며 친근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사람에게 마음의 벽을 너무 풀지는 말자. 사기당하기 쉽다.

2. 한국에서 챙겨 가면 유용한 의외의 품목들
외국에서 은근히 구하기 어려운 것들이 꽤 있다. 베이비파우더, 대용량 라면 수프, 누룽지는 꼭 챙겨 간다. 베이비파우더는 안 감은 머리와 땀의 배출을 줄이는 데 유용하고, 대용량 라면 수프는 한식이 그리운 한국 여행자들에게 너그럽게 베풀 수 있다. 누룽지는 뜨거운 물만 부으면 그리운 고향의 맛을 쉽게 찾아준다.

3. 배낭의 무게는 전생의 업보다. 배낭은 2/3 정도만 채워 가자
여행을 다니면 짐이 늘어난다. 생필품은 현지에서 다 살 수 있다. 나는 체구가 작은 편이라 7~10kg에 맞춰 다니는데 여행 과정에서 부족함을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배낭을 통째로 털렸을 때는 작은 가방을 하나 사서 3kg 내외로 다녔는데, 오히려 산뜻한 마음으로 여행을 했다.

여행작가 안시내는 직접 보고 경험한 드넓은 세상에서 영감을 받아 평생 글을 쓰며 살고 싶은 스물여덟 철부지다. 《악당은 아니지만 지구 정복》 《우리는 지구별 어디쯤》 《멀리서 반짝이는 동안에》 등 세 권의 책과 서울시립대배 핫도그먹기대회 여성부 1등, 라면먹기대회 통합 3등의 경력이 유일한 자산이다. 지금도 지구 어딘가를 걷고 있다.
  • 2020년 02월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보내기
  • 목록
  • 프린트
나도 한마디
이름      비밀번호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13건의 글이 있습니다. 작성일순 | 찬성순 | 반대순
  하하   ( 2020-02-10 )    수정   삭제 찬성 : 2 반대 : 2
어떤 인생들은 정신승리하며 타인의 도전을 깎아내리는 비난이나 하는 삶을 살고, 어떤 인생들은 과감한 선택을 한다. 신뢰와 부가 통장에 모이는 돈인지? 전문성이라는게 고시패스로만 가능한 사회인지? 꼰대 천지.
  탐정   ( 2020-02-03 )    수정   삭제 찬성 : 6 반대 : 2
글.사진이 본인이라는데... 저 사진은 정말 본인이 찍은 것일까? 트라이포드 놓고 찍었다고? 아무리 봐도 아닐 것 같은데... 그럼 글은 몰라도 사진은 본인이 찍은 게 아니지... 혼자 다닌거 맞냐?
  GDP   ( 2020-02-03 )    수정   삭제 찬성 : 6 반대 : 0
뭔가 한국 GDP 를 깎아 내리는 분 같네요.
  가방가르드   ( 2020-02-02 )    수정   삭제 찬성 : 5 반대 : 1
책을 3권 내었다는 여행가의 여행기보다 댓글들이 훨 가슴에 와닿네여.
  문죄인   ( 2020-02-02 )    수정   삭제 찬성 : 3 반대 : 2
20대에 게임만 하다 허송세월보내는 수많은 젊은이들 보나 낫다. 같은 논리로 20대에 고시패스 의사면허 등 전문직 젊은이들에 비하면 철없이 잘 놀았다라고 평가할 수 있다.

더 볼만한 기사

10개더보기
상호 : ㈜조선뉴스프레스 / 등록번호 : 서울, 자00349 / 등록일자 : 2011년 7월 25일 / 제호 : 톱클래스 뉴스서비스 / 발행인 : ㈜조선뉴스프레스 이동한
편집인 : 이동한 / 발행소 : 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34, 13층(상암동, 디지털큐브빌딩) Tel : 02)724-6875(독자팀) / 발행일자 : 2017년 3월 29일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민희 / 통신판매신고번호 : 2015-서울마포-0073호 / 사업자등록번호 : 104-81-59006
Copyright ⓒ topclass.chosun.com All Rights Reserved.

조선뉴스프레스 | 광고안내 | 기사제보 | 독자센터 | 개인정보 취급방침 | 인터넷신문윤리강령 | 청소년보호정책 | 독자권익위원회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