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을 하며

텍스트형 인간

텍스트형 인간인 저는 쓰면서 기억합니다. 써놓아야 기억이 어디로 도망가지 않고 저장소에 보관됩니다. 그래서 씁니다. 쓰지 않으면 그저 쓱 지나쳐버릴 것들을, 이내 흩어질 생각들을 한 자 한 자 쓰면서 낚아채고 새깁니다. 그렇게 포획된 기억과 생각의 뭉치를 부여잡고, 더 깊은 심연으로 끌고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많은 것들을 조우합니다. 쓰지 않으면 도저히 알 수 없었던 비정형의 감정과 개념의 덩어리. 이것들을 정면으로 직시하고, 언어로 명명해나갑니다. 어쩌면 저에게 기록이란, 나중에 잘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잊지 않기 위한 과정일지 모르겠네요.

그 기록의 여정엔, ‘타닥타닥’ 컴퓨터 자판보다 ‘사각사각’ 연필이 더 좋습니다. 타닥타닥으로는 잡히지 않고 미끄러져 내리는 생각의 줄기들이 사각사각으로는 ‘착!’ 잡히곤 하는 신기한 경험을 합니다. 연필의 시간이 안기는 선물이지요.

이번 달 커버스토리로 다룬 옌스 휘브너(Jens Hübner) 인터뷰 보셨는지요. 자전거로 전 세계를 누비면서 도시의 순간을 스케치하는 그는 자전거와 연필 예찬론자입니다. 작가 김훈도 꼭 같은 톤으로 자전거와 연필을 예찬했지요. 자전거와 연필은 느린 삶의 은유입니다. 두 다리를 굴려 몸을 쓰는 만큼, 종이에 대고 손가락을 움직이는 만큼, 딱 그만큼의 수고로움에 대한 대가를 안기지요. 그 대가는 정직하고 농밀합니다. 느린 대신 깊이가 있습니다.

최첨단 시대에도 종이와 연필의 수요는 여전합니다. 기성세대뿐 아니라, 디지털 원주민 세대인 밀레니얼과 Z세대 중에도 아날로그 도구에 열광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종이에 연필로 작업한 결과물을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에 올려 스타가 되기도 합니다. 이번 호에 〈topclass〉가 만난 극사실 크리에이터 전숙영 작가, 이야기를 수집해 그림과 손글씨로 남기는 조은별 작가, 취향 일기를 손으로 그려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심다은 작가 등이 그들입니다.

기록이 일상인 이들은 말합니다. 기록이란, 내 존재의 실체론적 증명이자, 나를 알아가는 성찰의 과정이라고. 한 해가 저물어갑니다. 매년 이맘때면 관성적으로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누군가에겐 눈부신 추억 덩어리로, 누군가에겐 회한 깊은 성찰의 언어들로 새겨지겠지요.

12월 호, 헤어짐과 만남이 교차합니다. 킬러 콘텐츠였던 ‘최인아의 책갈피’, 속 깊은 밀레니얼 친구 ‘이슬기의 슬기로운 퇴사생활’, 마니아 팬층을 거느린 ‘까칠언니 은열의 회사생활’은 이번 호까지만 연재합니다. 세 분 덕분에 〈topclass〉가 한층 빛날 수 있었습니다.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2020년 1월 호부터는 ‘강이슬 작가의 카피, 코피, 해피’, ‘장석주·박연준 시인 부부가 예술가에게 보내는 편지’가 새롭게 찾아갑니다. 올 한 해 독자님 덕에 따뜻했습니다. 고맙습니다.
  • 2019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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