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과 기억

‘휴먼스 오브 서울’ 프로젝트 박기훈 아트 디렉터

길에서 만난 우리들

글·사진 : 서경리 기자

“내 인생의 잊지 못할 한 순간이요?
음, 처음 사진을 배우러 스튜디오에 들어갔을 때!
실장님이 ‘넌 앞으로 사진을 어떻게 하고 싶어?’라고 질문하셨어요.
저는 ‘사진을 마스터하고 싶습니다’라고 답했어요.
주변에서 키득거렸죠. 마스터라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예술 분야를 마스터한다니.
그런데 실장님은 ‘음, 네 마음 알 것 같아’라며 고개를 끄덕여주셨어요.
사실 제 뜻은 마스터할 수 없기 때문에 평생 사진을 하겠다는 말이었어요.
그날 실장님이 고개를 끄덕여주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오지 못했을 거예요.
웃긴 건요, 제가 스튜디오를 운영한 지 12년 만에 저와 똑같이 말하는 친구를 만난 거예요.
그 친구가 내일 처음 출근합니다!”
_
박기훈 아트 디렉터
‘휴먼스 오브 서울(Humans of Seoul)’은 SNS를 기반으로 평범한 서울 시민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인터뷰 콘텐츠다. 박기훈 아트 디렉터와 정성균 편집장이 합심해 2013년 11월 프로젝트 그룹을 세웠고, 지금까지 1600여 명의 이야기를 사진과 글로 담아냈다. 30만 명이 그들의 콘텐츠를 본다. ‘휴먼스 오브 ○○’은 전 세계 200여 도시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 2010년 미국 뉴욕에서 시작된 ‘휴먼스 오브 뉴욕’이 시초다.

휴먼스 오브 서울의 인터뷰는 길거리에서 즉흥적으로 이뤄진다. 짧으면 5분, 길게는 한 시간씩 걸린다. 인터뷰 대상의 이름이나 나이, 직업, 연락처 등은 되도록 먼저 묻지 않는다. 그저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손잡고 거리를 걷는 노부부에게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함께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라고 묻기도 하고, 길 가는 아이에게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어요?”라고 말을 건넨다. 데이트하는 연인, 홀로 앉아 볕을 쐬는 노인, 엄마 손을 잡고 나온 아이 모두가 인터뷰 대상이다. 서울 강남의 한 스튜디오에서 박기훈 아트 디렉터를 만났다.


휴먼스 오브 서울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신문에서 보는 유명인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진솔한 삶을 보여주기 위해 시작했습니다. 길거리에서 무작위로 섭외한 사람들이 대상으로, 살면서 종종 잊지만 우리 삶의 토대를 이루는 행복, 슬픔, 용기 등에 관해서 묻습니다. 그때마다 모두 똑같아 보이던 낯선 사람들에게서 고유한 이야기들을 발견하게 돼요. 누구나 소중하고 특별한 이야기 하나쯤 있고 그런 ‘날것’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인터뷰 대상을 섭외하는 방식은요.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길거리의 일반인을 무작위로 섭외해 인터뷰합니다. 예정 없이 만난 인물들에게서 가장 보편적인 정서가 담긴 이야기를 찾을 수 있어요. 그래서 유명인의 인터뷰 요청도 정중히 거절하죠. 친구나 지인도 섭외하지 않습니다. 신기한 건 오랜 시간 진행해오면서 인터뷰 대상이 겹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거예요. 인터뷰어가 바뀔 때마다 내용도 다양해지고요.”


콘텐츠 제작 과정이 궁금합니다.


“인터뷰어와 포토그래퍼가 길거리에서 인터뷰하고, 전체 인터뷰 내용 중에서 공유할 만한 메시지를 선별해 편집장과 함께 검토합니다. 내용에 맞춰 아트 디렉터인 제가 사진을 선별해 편집하죠. 그다음엔 내용을 번역팀에 보내 영문으로 번역하고요. 작업한 글과 사진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텀블러 및 포털사이트에 올립니다. 이렇게 SNS에 올리기까지 짧게는 한 달 반에서 석 달까지 걸리기도 해요.”

휴먼스 오브 서울은 박기훈 디렉터와 정성균 편집장, 제이미 포각스 영문 편집장을 포함해 20여 명의 인터뷰어와 포토그래퍼, 번역가가 참여해 콘텐츠를 만든다. 멤버 모두 각자의 본업이 따로 있어 점심시간이나 주말을 이용해 틈틈이 인터뷰한다.

이들은 하루 한 건 포스팅을 지향한다. 한 달 동안 서른 건 이상을 올리는 게 목표다. 강제성은 없다. 책임감을 갖고 자발적으로 활동한다. 이를 두고 박기훈 디렉터는 “가치 있는 취미생활”이라고 표현했다.


팀원들이 각자 본업이 따로 있으면서, 이 프로젝트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수익 모델이 있다면요.



“휴먼스 오브 서울은 이익을 추구하는 회사나 법인체가 아닙니다. 그저 콘텐츠를 만드는 프로젝트 그룹이에요. 회사가 아니기에 대표도 없어요. 자신들의 역할만 있을 뿐이죠. 누구도 휴먼스 오브 서울을 통해 돈을 벌지 않아요. 간혹 행사나 광고로 수익이 생기면 상의를 해서 공평하게 나누거나 공금으로 씁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돈보다 가치예요. 대의를 위한 건강한 시스템을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아요. 각자가 바른 역할을 하고 있으면 세상이 더 좋아지지 않을까요?(웃음)”


사람들의 기억을 끄집어내 기록하지요.
끄집어내는 과정이 쉽진 않을 것 같습니다만.


“이 일도 오래하다 보니 선무당처럼 사연 있는 사람들이 보여요. 낯선 사람들이 보내는 주파수를 맞추는 작업이죠. 처음에는 거절을 많이 당했지만, 지금은 사람 만나는 시간이 익숙해졌고, 더 좋은 인터뷰로 가는 방향을 잘 알게 됐습니다. 옆에 있는 친구조차 몰랐던 집안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들도 종종 있어요. 가까운 사람일수록 속을 드러내기 어려울 수 있죠. ‘낯섦’이 오히려 벽 하나만 허물면 ‘고해’할 수 있는 용기를 만들어줍니다. 기억을 끄집어내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치유가 되기도 하고요. 사람에 대한, 이야기에 대한 애정과 본질을 흐리지 않고 유지해왔기 때문에 우리 시간을 지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기록 매체로서 사진이 갖는 의미는 뭘까요?

휴먼스 오브 서울의 박기훈 아트 디렉터(왼쪽), 정성균 편집장.
“인생의 흐름에서 한 부분을 발췌해 시선으로 묶어둔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기록에서 사진은 가장 기본이 되는 콘텐츠입니다. 사진 수백 컷이 모여 하나의 영상이 되죠. 순간이 모여 인생을 이루듯 말이에요. 우리는 사람들의 장편 서사 중 기승전결 어느 지점인지 모르는 한 부분을 끄집어내 이야기합니다. 이야기를 하나의 소설이라 한다면, 우리 인터뷰는 한 편의 시인 거죠. 그래서 더 울림을 줄 수 있고요. 사진도 그래요. 인생 영화에서 뽑아낸 한 컷의 시가 바로 사진입니다.”


휴먼스 오브 서울이 추구하는 기록의 가치는 어떤 건가요?

“기억 속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세상에 전하는 것, 기록의 가치죠.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어요. 좋은 향기가 나는 존재로. 세상에는 다양한 냄새가 있어요. 향기롭기도 하고 악취가 나기도 하죠. 우리가 세상 한쪽에서 묵묵히 좋은 향기로 영향력을 끼치고 있으면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그들이 기록한 건 각자의 얼굴이자 이야기다. 평범해 보이지만 절대 평범하지 않은 우리 이웃의 일상이 ‘휴먼스 오브 서울’로 기록되고 있다.
  • 2019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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