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과 기억

극사실화 크리에이터 ‘드로잉 핸즈’ 전숙영 작가

선(線)들의 시간

글·사진 : 서경리 기자

극사실화를 그리는 전숙영 작가는 ‘드로잉 핸즈(drawing hands)’라는 유튜버로 활동하며 30만 구독자들과 소통하고 있다. 단국대 서양학과를 졸업하고 목동에서 10년간 입시미술 강사로 일했으며, 결혼과 육아로 일을 그만뒀다가 3년 전 유튜브 크리에이터로 새 직업을 찾았다.
주 콘텐츠는 방탄소년단(BTS), 트와이스, 블랙핑크 등 K팝 가수나 만화 캐릭터, 영화 주인공들이다.
네 시간에서 열 시간 걸리는 작업 과정을 3~4분 정도 길이로 압축해 영상에 담아낸다.
날 서고 차가웠던 20대. 모나미 볼펜으로 온종일 구석에 틀어박혀 그림만 그렸다. 100호짜리 커다란 캔버스에, 손바닥만 한 집 하나를 그리는 데 서너 시간이 걸렸다. 붓으로 채우면 쓱싹 한 번에 끝날 것도 볼펜으로 선을 하나하나 그어가며 공들여 면을 채웠다. 시간을 채웠다는 말이 차라리 맞다.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값싼 볼펜을 그림 도구로 택한 것은 우연이면서도 필연이었다. 형편이 어려워 앞날이 캄캄할 때,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뭐든 집어 그렸다. 결혼해 아이를 낳고 나서도 그랬다.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면서 우울감이 그를 좀먹어갔다. 아이에게 엄마의 자리는 크다. 아이를 위해 모든 순간을 쏟아야 하는 나날. 아이가 힘들 땐 엄마도 힘들었다. 점점 ‘나’를 잃어가던 그때 다시 ‘나’를 살려내기 위해 색연필을 들었다.

‘극사실화 크리에이터’는 전숙영 작가가 유튜브에 영상을 올리며 붙은 수식어다. 사진과 구분이 안 될 만큼 세세하게 묘사하는 과정을 영상으로 찍어 올렸다. 극사실화는 실제를 똑같이 그려내는 작업이 아니다. 실제와 세밀하게 닮으면서도 작가만의 감각을 명징하게 남기는 작업이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옮기기까지 감각이 전환되는 찰나에 작가의 해석이 들어간다. 인물화는 더더욱 그렇다. 피부 주름, 눈빛, 입꼬리 하나에 ‘작가가 바라본 그’가 담긴다.

아날로그 방식으로 그린 그림은 차곡차곡 쌓여가지만, 그리는 과정의 기억은 희미해져간다. 그 과정을 다시 담아낸 것은 뜻밖에도 디지털이다. 전 작가는 유튜브에 그림 그리는 과정을 올리며 그 순간을 기록했다.

“영상으로 기록하면 그림을 그릴 때의 순간이 기억돼요. 그 당시 어떤 생각을 했는지도 떠오르죠. 실수했던 순간이나 그날의 감정, 환경, 모든 것들이요.”

그림에 담기는 얼굴은 지금 이 시대를 격정적으로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영화 스크린이나 무대 위의 그들이 때로는 세상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그는 이슈를 따라가면서 작업하지만, 그 이슈는 기록으로 남아 후대에 전해진다. 지금 당장 ‘반짝이는 별’도 언젠가는 소멸해 사라진다. 기록이 필요한 이유다.

20대의 그가 모나미 볼펜으로 그린 그림은 아직도 그의 방에서 살아 숨 쉰다. 보관을 제대로 못해 비에 젖고 망가졌지만, 이 또한 시간의 기록이다. 그림도 사람처럼 나이 들어 빛이 바래고 언젠가 소멸한다.

“볼펜으로 남긴 선이 하나하나 모여 면이 됩니다. 정성을 다해 채워낸 한 폭의 ‘시간 기록’이지요. 인생도 똑같아요. 버텨온 시간에 대한 채움이랄까. 유리 조각이 바다에 버려지면 갈리고 갈려 동그랗게 되잖아요? 모나고 날 선 나의 20대가 시간에 닳고 닳아 지금의 내가 됐듯이. 빛바랜 그림은 나에 대한 기억이고 기록입니다.”


전숙영에게 그림이란 버텨온 시간을 채우는 과정이다.
그래서 그에게 그림은 시간의 기록이고 기억이다.


ball point pen on canvas, 160.2×130.3cm, 2005
서울은 전국 각지에서 찾아든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다. 오래된 골목에는 악착같이 버텨낸 시간들이 응집돼 있다. 그네들의 삶은 집 하나하나에 담겼다. 집은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하나의 생명체처럼 살아낸 흔적을 남긴다. 전숙영 작가가 그린 집들의 기록이 그러하다. 그림은 14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방에서 살아 숨 쉰다. 시간 속에서 빛바래 점차 소멸돼간다. 하지만 기록이 남긴 기억은 오랜 시간을 두고 빛으로 채워진다.

  • 2019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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