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리즘

‘호랑가시나무 창작소’ 정헌기 대표

“광주의 어제와 오늘을 잇습니다”

글·사진 : 서경리 기자

점과 점이 선을 이루고, 선이 뭉쳐져 면을 만든다. 도시재생 사업에서 ‘점・선・면’ 정책은 그 힘을 발휘한다.
여러 군데 거점을 두고 지점을 연결한 선이 만들어지면 그 안에서 마을이 활기를 되찾는 식이다.
로컬 기획자인 정헌기 대표는 광주 양림동을 문화 마을로 이끄는 데 하나의 거점을 만들었다.
문화예술 법인체 ‘아트주’를 운영하는 그는, 6년 전 선교사들의 사택 터에 ‘호랑가시나무 창작소’를 열고 예술가들을 지원하고 있다.
아트디렉터로 활동해온 정헌기 대표가 지역 문화에 관심을 가진 건 2005년, 전남 광주 사직공원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예술가 집단 ‘비둘기들’을 만들면서다. 사직공원은 동물원이 있어서 광주 시민은 물론 호남 지역에서 두루 사랑받던 장소였다. 하지만 1991년 동물원이 옮겨가며 사람들의 발길이 하나둘 끊겼고, 텅 빈 공원을 보고 정 대표는 ‘이렇게 좋은 공간에 왜 사람들이 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인적 드문 공원에 모이를 주면 비둘기들이 모여들어요. 그 장면에서 예술가의 공연이 떠올랐어요. 광주는 문화 수도를 추구하는데, 그렇게 되려면 거리 곳곳에서 문화예술 공연이 열려야 한다고 봤어요. 예술가 모임을 만들어 창작 활동을 하면 사람들이 다시 공원으로 모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예술가 모임을 만들자, 광주는 물론 각지에서 예술가들이 찾아들었다. 매주 공연이 열렸고 지원금도 받았다. 하지만 지원금 운영 등의 문제가 불거지면서 3년 만에 해체됐다. 이후 그는 좀 더 단단한 모임을 구상했다.


“사직공원과 문화예술 그리고 사업을 결합할 방법을 고민했어요. 과거 동물원이 있던 사직공원은 추억을 공유하는 공간이었어요. 그렇다고 다시 동물원을 만들 수는 없었죠. 도시 한복판의 분뇨 냄새, 동물 울음소리도 문제고, 관리도 쉽지 않죠. ‘그렇다면 동물 없는 동물원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동물 없는 동물원, ‘아트주(ART ZOO)’의 시작이다.

“문화예술로 채우는 동물원을 콘셉트로 잡았어요. 작품으로 구현되는 동물원인 거죠. ‘떠나간 동물들이 사직공원 어딘가에서 예술 작품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에서 기획했습니다.”


그는 아트주가 만들어지면 공원 관리인이 필요하고, 문화예술인을 교육할 수 있는 장이 열리고, 청년들이 들어오면서 다양한 일자리가 창출될 거라고 봤다. 일종의 ‘사회적 기업’이 되는 셈이다. 2009년 광주정보문화산업진흥원에 아트주 사업 지원서를 냈고, 운 좋게도 선정됐다. 사업이 실제로 구현된 건 2년이 지나서다.

“‘렛츠 이매진(Let’s imagine), 상상으로 표현하는 것에는 한계가 없다’는 주제로 첫 공모전을 열었어요. 상상 이상의 작품이 모였죠. 동물을 얘기했을 뿐인데 정크아트, 냉장고에 사는 북극곰 등 사회 문제, 환경 문제까지 거론됐어요. 2011년 5월 5일, 20년 만에 사직공원에 동물원이 다시 열렸고, 오픈 당일 공원관리소 추산 12만 명이 찾아왔어요. 사직공원 역사상 하루 평균 가장 많은 인원이었다고 합니다.”

정 대표는 쇼케이스의 성공에 힘입어 아트주 사업을 더 키워볼 계획이었다. 하지만 수익성 문제로 확장하는 데 한계에 부딪혀 결국 접어야 했다. 그가 시도한 아트주 사업은 이후 서울과 지방 곳곳에서 유사한 형태로 열렸다. 그의 손에서 시작된 ‘기획’이 변형된 형태로 떠돌게 된 셈이다.


양림동 선교사 터를 거점으로


아트주 사업이 단발성에 그치면서 정 대표가 눈을 돌린 건 사직공원의 동남쪽 끝자락, 양림동이다. 양림동 골목에 있는 갤러리에서 마을의 이야기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동네의 문화 콘텐츠가 자리 잡기 위해서는 장소와 추억, 기억이 결합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유럽은 과거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합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예요. 이야기 하나 없는 곳이 어디 있겠어요. 그 가치를 모를 뿐이죠. 양림동에 대한 마을 주민들의 긍지가 대단합니다. 동네가 품고 있는 ‘이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아트주 쇼케이스의 성공은 ‘추억이 담긴 이야기’가 있어 가능했다. 자신이 어릴 적 뛰어놀던 동물원을 자식들에게 다시 보여줄 수 있다는 데서 광주 시민들은 자부심을 느꼈다. 그는 이곳만의 스토리에 힘을 줬다. “다른 곳의 성공 사례를 가져와서 채워 넣는 것이 아니라, 우리만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도시재생 철학이다. “그런데 한국은 전국이 하나의 패턴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광주 양림동은 ‘풍장터’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 풍장은 장례 문화일 뿐 이곳에서만 풍장이 이뤄졌던 것은 아니다. 양림동의 역사는 1904년 선교사들이 정착해 살면서 시작된다. 개화기 선교사로 유명한 유진 벨과 오웬 선교사가 사택을 지어 첫 예배를 드린 자리가 바로 양림동이다.

과거 양림동은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근대 문물을 일찍 접한 덕분에 많은 예술가를 배출해냈다. 천재 음악가로 불리는 정추, 중국의 3대 음악가로 활동한 정율성, ‘북한 영화의 아버지’ 정준채 등이 이곳을 거쳤다. 또 시인 김현승이 청년기를 이곳에서 보냈고, 소설가 황석영이 대하소설 《장길산》을 집필하기도 했다.

호랑가시나무 예술창작소는 선교사들이 머물던 사택을 개조해 세워졌다. 정헌기 대표는 2005년 양림동을 산책하다 우연히 이 사택과 마주했다. 사람이 떠난 지 오래돼 흉가처럼 방치됐던 이 공간을 보며 그는 새로운 작당을 꿈꿨다.

“예술가를 위한 창작소와 게스트하우스를 만들자고 제안했는데, 주변에서 모두 반대했어요.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기획안을 쓰는 것과 직접 운영해보는 것은 다를 거야. 직접 해보면서 한계를 알아가자’고 생각했죠.”

정 대표는 추진력 있게 밀어붙였고, 2013년 봄 ‘호랑가시나무 창작소’를 열었다. 선교사 터의 소유권을 가진 호남신학대학교로부터 10년간 임차했다. 선교사 사택은 예술가들의 창작 공간으로, 사택 옆에 딸린 차고는 전시실로 꾸몄다. 또 일부 공간은 게스트하우스로 운영했다. 호랑가시나무 창작소의 이름은 선교사 사택 옆에 심어진 수령 400년의 광주시 기념물 제17호 호랑가시나무에서 따왔다.


6년간 40명의 예술가가 거쳐 가다


창작소가 만들어지고 게스트하우스가 문을 열자, 그의 새로운 아트주에 작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치 모이를 주면 모여드는 비둘기처럼. 과거 선교사들의 공간을 예술가들의 창작 활동소로 이어가는 동시에 새로운 문화 공간을 만드는, 양림동의 어제와 오늘을 잇는 작업이 그때 시작됐다.

창작소에는 6년간 40여 명의 예술가가 거쳐 갔다. 2015년에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선정, 지역예술특성화지원사업 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총선을 앞둔 2016년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로 이곳 게스트하우스에 묵고 가기도 했다.


“한 가지만 봤어요. ‘작가의 삶 중 한 점에서 영감을 주고 경험을 주는 공간을 만들자. 작가의 생각을 구현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자’, 이렇게 생각을 바꾸니 답이 보이더군요.”

창작소가 자리 잡은 지 6년이 지났지만, 그는 아직 부족하다고 말한다.


“도시재생은 나 하나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거점과 거점을 잇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소마다 활성화가 잘돼야 깊이를 더할 수 있습니다. 2024년에는 양림동의 모든 점이 훨씬 깊어질 거라 봅니다.”

그는 자신을 ‘꿈꾸는 기획자’라고 칭한다. “문화예술은 결국 가진 사람들의 놀이를 대중에 나누자는 문화 민주주의”라는 것이 그의 생각. 그의 꿈이, 그의 생각이 우리나라를 문화 선진국으로 잇는 중요한 점을 찍고 있다.
  • 2019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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