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리즘

블랭크 김요한·김지은 공동 대표

“우리가 살고 싶은 동네를 디자인합니다”

글 : 선수현 기자  / 사진 : 서경리 기자

‘블랭크’는 동네가 가진 색으로 공백을 채운다. 그 색은 공감, 소통으로 짙어지고 하나의 문화가 된다.
비어 있던 공간은 공유 공간이 되어 관계를 회복하는 역할을 한다. ‘블랭크’의 공백이 가득 차오르는 순간, 이들을 로컬 큐레이터, 동네 디자이너, 콘텐츠 기획자 등 뭐라 불러도 무방하다.
왼쪽부터 김지은·김요한 대표, 강성영·김세중 씨
낡은 주택이 옹기종기 자리한 골목, 어지럽게 들어선 전봇대와 얽히고설킨 전선이 묘한 풍경을 자아낸다. 언덕 너머 보이는 남산서울타워는 시공간이 뒤섞인 듯한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골목 모퉁이, 빨간 벽돌 건물 역시 뭔가 부조화스러우면서도 조화롭다. ‘우리가 살고 싶은 동네, 후암동’이란 네온사인이 돋보이는 곳, ‘블랭크’가 운영하는 ‘공집합’ 2호점이다. 1~2층은 파스타, 샐러드 등을 판매하는 커뮤니티 다이닝 바, 3층은 작은 영화관을 지향하는 후암거실로 운영하고 있다. 동네 주민이 주 고객이지만 SNS를 보고 찾아오는 이도 적지 않다.

“공집합은 동네에서 ‘술 한잔하러 갈까?’ 하고 가볍게 찾을 수 있는 곳이에요. 오래된 동네에 가면 메뉴나 술 종류가 한정돼 있잖아요. 젊은 취향의 사람들이 갈 만한 곳은 동네를 벗어나야 하더라고요. 일상의 범위 안에서 다양한 선택지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았어요. 술을 매개로 동네 사람들이 교류할 수 있는 장소가 되길 바랐고요.” (김요한)

공집합이 운영하는 커뮤니티 바는 동네 사랑방을 자처한다. 동네 술집을 매개로 단골을 형성하고 서로 교류할 수 있는 아지트다. 그 특징은 ‘호스트 나이트’에 잘 묻어난다. 한 달에 한 번, 동네 주민이 1일 호스트로 변신하는 날이다. 공간 운영이나 바텐더를 경험해보고 싶은 이들에게 주는 기회다. 술을 판매하는 일방적 공간이 아니라 쌍방의 공간을 조성하도록 한 것이다.


공유 공간 중심으로 늘어난 로컬 상점


미용실, 수선가게 등 동네에서 쉽게 볼 수 있던 것들이 하나둘 사라지며 일상의 모습도 변해갔다. 상권은 번화가 위주로 형성되고 동네는 노후화됐다. 젊은 수요층은 외부에서 소비하며 주거와 생활 지역이 점차 분리돼갔다. 관계도 단절됐다. 블랭크는 유휴 공간을 공유 공간으로 만들어 관계를 회복하고자 했다. 첫 시작은 2013년 상도동에 문을 연 공유 부엌 ‘청춘플랫폼’. 문승규 공동 대표는 월 임대료 30만 원의 작은 공간을 빌려 동네 사람들과 함께 밥을 지어 먹고 공연이나 전시를 열었다.

공간을 찾는 주민이 늘어나며 2015년 공유 작업실 ‘청춘캠프’를 열었다. 공간 한쪽은 블랭크 사무실로 쓰고 나머지는 로컬 프리랜서, 1인 기업 등이 저렴한 비용으로 사용토록 했다. 이 무렵 김요한, 김지은 대표가 합류했다. 다양한 분야의 청춘들이 한 공간에 모이니 자연스레 협업하며 교류가 늘었다. 동네 잡지 《상도동 그 청년》 《상도동 그 가게》 《상도동 그 소설》도 그 결과다. 블랭크는 2017년 공유 주택 ‘청춘파크’로 영역을 확장했다. 독립된 방 외에 나머지 생활공간을 공유해서 사용하는 구조다. 대신 입주 청년은 임대료를 낮출 수 있었다.

이 공간들은 청년들이 처한 현실을 대변한다. 도시에 취업한 청년들은 다수가 원룸에서 생활한다. 공간이 작아지며 기존 집에 있던 거실과 주방은 없어졌다. 공유 부엌 청춘플랫폼은 집안의 생활공간을 밖으로 내온 공유 공간이다. 공유 주택 청춘파크와 공유 작업실 청춘캠프도 자본금이 적은 청년들에게 인큐베이터 공간이 되어주었다.

“전에는 강남에 있는 큰 빌딩에 출근했다가 퇴근하는 생활을 반복했어요. 스트레스를 받으며 돈을 벌고 그 돈을 쓰며 스트레스를 풀고 다시 오피스텔에 가서 잠만 자고 출근했죠. 비단 저만이 아닐 거예요. 도시에서 일하고 살아가는 청년들의 라이프스타일이죠. 이 사이클에 염증이 생기더라고요. 그런 삶에서 튕겨져 나오며 대안을 찾았어요.” (김지은)

살 곳과 일할 곳은 갖췄으나 여전히 즐길 곳이 부족했다. ‘그래, 이것도 만들자!’ 상도동 주민들이 블랭크의 취지에 동조하며 50만 원, 100만 원씩 자금을 모았다. 공고 첫날 목표 자금을 채울 정도로 참여도 적극적이었다. ‘공집합’ 1호점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제 번화가에 가지 않아도 주거, 업무, 유흥 모든 게 동네에서 가능해졌다.

공유 공간이 하나둘 늘어날 때마다 지역 네트워크가 형성됐고, 이를 기반으로 또 다른 공간이 생겨났다. 30년간 운영한 동네 책방이 문 닫을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이 커뮤니티에 뜨자, 젊은 부부가 인수를 결정했고, ‘대륙서점’이 만들어졌다. 공유 작업실을 사용하던 청년이 보증금 문턱이 높아 창업을 고민하던 때, 공집합과 공간을 나눠 쓰기로 하면서 제로웨이스트 식료품·카페 공간 ‘지구’가 생겼다.

블랭크는 이 과정을 실험이라 부른다. 상도동 실험은 삶 자체를 흔드는 계기가 됐다. 작게는 블랭크 멤버들의 생활 패턴이, 크게는 동네 주민들의 생활 반경이 달라졌다. 블랭크는 동네에 변화를 던지는 당사자인 동시에 변화를 필요로 하는 당사자였다. 공동 대표 모두 상도동에 살고 있었기 때문. 내부에서 변화를 견인하는 힘은 견고했다.

“골목이 남아 있는 동네는 그 분위기를 갖고 있어요. 오래된 가게와 가게 사이로 단골이 있고 이야기가 연결되죠. 골목 네트워크랄까요? 그런데 동네 중심의 커뮤니티가 없어지면서 골목이 폐쇄적으로 변하고 있어요. 사람을 만나고 싶어도 도시는 점점 반대 방향으로 발전하는 거죠. 그에 대한 반발심일 수도 있어요. 도시에 쌓인 기억이 사라지고 새로운 걸로 채워지기 바쁘니까요.” (김요한)

“어느 동네를 가든 복사한 기분 안 드세요? 몇몇 프랜차이즈를 중심으로 비슷한 마을이 조성되잖아요. 사람들의 취향은 다양해지고 있어요. 동네에 특색이 강한 가게가 많아지면 하나의 콘텐츠가 돼서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와요. 프랜차이즈가 소화할 수 있는 곳은 소화하되, 동네만의 콘텐츠를 유지해서 균형을 이루는 게 필요해요. 우리는 다양한 선택지를 심어주면서 동네가 선순환을 이루도록 실험하고 있는 거예요.” (김지은)


동네정미소, 무중력지대 G밸리, 유유기지…


블랭크의 실험은 다른 동네로 확장되고 있다. 외부 설계 프로젝트는 블랭크의 주요 수입원이기도 하다. 동네가 활력을 찾도록 낡은 공간을 고치고 생산과 소비가 이뤄지도록 설계한다. 동네정미소(성산·서교·광교), 만화 카페 즐거운 작당 등이 블랭크의 손을 거쳤다. 무중력지대 G밸리, 서울시 일자리 카페, 인천 청년 공간 유유기지 등의 공간도 기획했다. 구성원 일곱 명 중 절반이 건축을 전공해 가능한 일이었다. 블랭크는 실험 무대를 점차 지방 유휴 공간으로 넓혀 지방 공간 자원이 갖고 있는 매력과 가치를 증명해 보이려 한다.

“우리나라는 한 길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어요. 서울·대도시, 대기업·공무원처럼 하나씩만 보이는 거죠. 다른 선택지도 있다는 걸 알리고 싶어요. 서울에서 대기업에 다니는 삶보다 로컬에서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는 삶이 자연스러워지는 움직임으로 이어질 수 있을 거예요. 로컬리즘이 과밀화 문제를 해소하지 않을까 기대해요.” (김요한)

블랭크가 채색하는 공백(블랭크)이 늘어날수록 우리가 살고 싶은 동네는 점점 다양한 색을 발산하지 않을까.
  • 2019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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