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음과 (간직)

거창유기 4대 계승자 이혁

엔지니어 출신 공돌이, 놋그릇을 세계에 알리다

글 : 이선주 객원기자  / 사진 : 김선아   / 사진제공 : 거창유기 

경남 거창에서 놋그릇을 만드는 이혁 씨는 3년 전인 2015년까지만 해도 최첨단 자동차기술을 연구하던 엔지니어였다. 서강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후 만도 글로벌 R&D센터에서 일하던 그가 어떻게 우리나라 놋그릇의 역사를 새로 쓰겠다고 결심했을까? 지난 9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적인 라이프스타일 디자인 박람회 ‘메종&오브제’에 참가한 그는 세계인의 눈을 사로잡으면서 우리나라 놋그릇의 세계화 가능성을 증명했다.
거창유기 4대 계승자 이혁(왼쪽) 씨와 그의 아버지이자 3대 계승자 이기홍 장인.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놋그릇을 보고 ‘보석 같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한 인도인은 전시된 반상기 세트를 사고 싶다면서 그대로 싸달라고 했습니다. 인도의 식생활은 우리나라와 전혀 다를 텐데 선뜻 가져가겠다고 해서 제가 오히려 놀랐습니다. 한 스위스인은 옻칠로 두 가지 색깔을 낸 접시를 벽에 걸고 싶다면서 지름 150cm로 만들어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릇이 아니라 작품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영국, 홍콩, 스위스, 오스트리아, 스웨덴 등 여러 나라 바이어들이 관심을 보였습니다.”


거창유기는 1924년 김석이 장인이 거창공방을 설립하면서 출발한 곳으로, 94년 역사 동안 온갖 우여곡절을 거쳤다. 김석이 장인은 일제가 전쟁물자 확보를 위해 놋그릇 제작과 판매를 금지했을 때 끝까지 버티다 고초를 당한 후 광복 직후 사망했다. 그의 문하생이었던 이현오 장인이 1946년부터 그 뒤를 이었고, 그의 아들 이기홍 장인이 1979년부터 대를 이어 유기(鍮器), 즉 놋그릇을 제작해왔다. 이기홍 장인의 말이다.

“보통 숯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산골에서 유기가 발달했고, 거창도 그런 곳 중 하나였습니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거창에 놋그릇을 만드는 공방이 많았어요. 부엌에서 연탄을 사용하고 스테인리스 그릇이 퍼지는 등 생활문화가 바뀌면서 놋그릇은 급속하게 퇴출되었습니다. 연탄가스 같은 유독가스가 닿으면 놋그릇의 색깔이 금방 변하니까요. 요즘은 연탄을 사용하는 집이 많지 않아 변색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때수건으로만 닦아도 새것처럼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1924년 설립, 94년 역사


한 달에 반상기 세트 한 벌도 팔기 어렵던 시절, 그는 징, 꽹과리나 불교용품, 제례용품 등을 만들어 팔면서 버텼다고 한다. 놋그릇의 질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달라지는 식생활에 맞추어 제품 개발도 소홀히하지 않았던 그는 2003년 대한민국 공예품대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

이혁 씨는 이기홍 장인의 장남. 아버지가 놋그릇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알기 때문에 언젠가는 자신이 그 일을 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하면서도 ‘금속의 특징을 잘 파악할 수 있어서 놋그릇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40대까지는 전공을 살려서 직장생활을 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암에 걸리시면서 계획을 앞당기게 되었습니다. 2010년, 제가 학사장교로 군대에 있을 때 아버지가 대장암으로 쓰러지셨어요. 대장암 3기였던 아버지는 거창에서 서울의 병원까지 앰뷸런스에 실려 오실 정도로 위급한 상태였습니다. 열두 차례에 걸쳐 항암치료를 받으시면서 사경을 헤매기도 하셨죠. ‘아버지가 안 계시면 가족과 유기공장은 어떻게 되지?’ 걱정이 되었고, 그때부터 관심을 가지고 놋그릇 산업의 변화를 지켜보았습니다. 대량생산한 값싼 놋그릇이 쏟아져 나오면서 산업 트렌드가 바뀌는 게 느껴졌고, ‘우리나라 놋그릇이 경쟁력을 잃기 전에 뭔가 시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며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결국 2015년에 직장을 나와 아버지 일을 돕기 시작했죠.”

옆에서 듣고 있던 이기홍 씨는 “벌여 놓은 일은 많은데 건강이 좋지 않아 ‘아들이 도와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컸지만, 직장생활을 좀 더 하고 싶다는 아들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기대도 하지 않았을 때 선뜻 와준다고 하니 반갑고 고마웠죠”라고 말한다.


옷칠회화 정상엽 작가 사사


이혁 씨는 거창유기에 합류하자마자 아버지에게 놋그릇 제작기술을 전수하면서 옻칠회화를 하는 정상엽 작가에게 옻칠을 배우려고 서울을 오가기 시작했다. 색깔이나 모양이나 비슷비슷한 놋그릇을 다양화하면서 발전시킬 방법을 고민하다 ‘색감을 입혀보자’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그는 빛에 주목했던 인상주의 화가 모네와 르누아르, 황금빛으로 빛나는 작품을 그렸던 클림트, 색면 추상으로 숭고한 정신을 표현했던 마크 로스코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묘하게도 그가 만든 놋그릇에서 인상주의 작가와 클림트, 로스코가 모두 느껴졌다. 옻칠로 색을 입힌 놋그릇은 인상주의 작품처럼 화사한 색감이 먼저 눈길을 끈다. 군데군데 드러난 놋그릇의 금빛 바탕은 빛을 받아 반짝인다. 두 가지 색을 사용한 접시는 마크 로스코의 색면 추상과 같은 감흥을 일으킨다. 그는 놋그릇에 색을 입힐 뿐 아니라 문양도 넣었다. 삼베 문양을 넣어 옻칠한 반상기 세트를 개발해 호평을 받았다.

“서울 경의선숲길 근처에서 이탈리아 레스토랑 ‘요수정’을 운영하는 신창현 셰프가 경남 거창에서 함께 자란 고향 친구입니다. 그 친구가 거창유기의 놋그릇을 파스타 접시로 사용하면서 다른 셰프들도 많이 소개해주었어요. 셰프들이 어떤 음식을 어떤 그릇에 담고 싶다고 이야기하면 그 용도에 맞는 그릇들을 새로 디자인하면서 빠르게 바뀌는 음식 트렌드를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서울 북촌의 한식당 ‘두레유’나 파리의 한식당 ‘레스토랑 권’의 요청으로 새로운 그릇과 수저받침 등을 디자인했어요. 곰탕집 ‘옥동식’이나 팥빙숫집 ‘옥루몽’을 위한 그릇도 만들었지요. 삼베 문양 놋그릇도 ‘두레유’의 류현수 셰프와 이야기를 나누다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시도하는 일이라 쉽지 않았습니다. 여러 번 시행착오 끝에 주물 유기로 삼베 문양 그릇을 만드는 방법을 개발했고, 현재 특허출원을 해놓았습니다.”


요즘 이름난 식당 중 놋그릇에 음식을 내오는 곳이 많다. 놋그릇을 잘 닦아놓으면 반짝반짝 보석처럼 빛나는 데다 보온이나 보냉 효과도 좋아 뜨거운 음식을 담으면 더 뜨겁게, 차가운 음식을 담으면 더 차갑게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구리와 주석을 합금한 청동으로 만든 놋그릇이 식중독을 일으키는 대장균이나 병원성 비브리오, 유해 미생물을 죽이는 항균효과가 있는 게 밝혀지면서 건강에 좋은 그릇으로 더욱 각광받고 있다. 놋그릇에 음식을 내면 ‘정성껏 대접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고급 식당들이 서로 경쟁하듯 놋그릇을 사용하고 있다.

“고급 자기를 사용하던 식당들이 놋그릇이 비싸기는 하지만 깨지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경제적이라면서 놋그릇으로 바꾸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는 짝을 맞추기도 어렵다면서요. ‘깨지지 않는 그릇’이기 때문에 혼수품으로도 인기입니다.”


군대 중대장 경험이 도움


그는 군대에서 중대장으로서 조직을 이끌고, 직장에서 유럽 출장을 다녔던 일 등 다른 일을 한 경험이 거창유기를 현대화·세계화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그가 합류한 후 거창유기는 더욱 적극적으로 제품 개발을 하면서 2016년과 2017년 연이어 대한민국 공예품대전에서 특선을 하고, 차기 세트, 빙수와 죽 세트, 삼베 무늬 식기 등이 2017년과 2018년 대한민국 우수공예품으로 지정되었다. 2017년 공예트렌드페어에서 상을 받으면서 2018년 ‘메종&오브제’에 참가할 수 있었다.

“놋그릇을 대중화하는 데 초점을 맞출지, 좀 더 부가가치가 높은 수공예 제품으로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출지 고민하다 수공예 제품으로 자리매김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2024년이면 거창유기가 100주년을 맞습니다. 2024년까지 유기공예의 입지를 다지면서 전반적인 인프라를 구축하고, 세계시장으로 나간다는 ‘비전 2024’를 만들었어요. 이번 ‘메종&오브제’는 우리 놋그릇의 시장성을 점검하고, 어떤 방향으로 나갈지 가늠하면서 여러 나라 작가와 교류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참가했습니다.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 놀랐어요.”

최첨단 기술을 연구하던 30대 젊은 장인의 합류로 우리나라 놋그릇의 현대화와 세계화 속도가 빨라질 것 같다.
  • 2018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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