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소리, ASMR

재즈 보컬리스트 임경은

해녀를 노래하다

글·사진 : 서경리 기자

“숨비소리란 해녀가 물질하다 물 위로 올라와 ‘휘’ 하며 참았던 숨을 내쉬면서 내는 소리입니다.
그 소리가 투명하면서도 강인하고, 슬프면서도 아름답죠.”
#처음_목소리를_내다

삶은 느리고 무료했다. 뭔가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찾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잘 몰랐다. 책가방에는 립스틱 하나. 영어를 잘하고 싶어 영문과에 진학하려 했지만 뜻처럼 되지 않았다. 레코드 가게를 기웃거리며 아르바이트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인생이 즉흥적으로 흘러갔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무엇. 턱밑까지 차오른 허무를 뚫고 숨구멍을 틔워준 건 재즈였다.

“노래를 불러봐도 될까요.”

1990년대 홍대 라이브 재즈 바 블루문. 1세대 재즈 드럼 연주자인 최세진 선생이 반주하고 무대에는 재즈 보컬 김현정, 지금은 대중가수가 된 빅마마 BMK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무대 옆에는 음악가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박수 치는 분위기도 아니고 음식에 곁들여 나오는 사이드 메뉴처럼 음악을 듣는 곳이었다. 누구 하나 유명하지 않았던 그때. 그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냈다. 재즈 보컬리스트 임경은의 이야기다.

“그렇게 노래를 시작했어요. 별거 없죠? 그때는 그렇게도 노래하고 재즈가수가 되던 시절이에요. 보컬리스트가 별로 없는 데다 재즈 클럽이 흥했을 때라 노래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 임경은
임경은이 재즈를 시작한 건 스물여섯 살 때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쳐서 악보를 보고 화성을 쌓을 줄은 알았지, 노래를 제대로 배워본 적은 없었다.

“홍대 음반 가게에서 아르바이트했어요. 지금은 음악평론가로 활동하는 정만섭 선생님이 사장이었는데, 1년 넘게 일하며 재즈를 듣는 귀가 열렸다고 할까. 무식했으니까 용감했습니다.”

노래에 발을 들이고 나니 시간이 정신없이 흘렀다. 여기저기 찾는 곳이 많았고 그만큼 돈이 쌓였다. 악보만 털어도 일당으로 받은 돈 봉투가 우수수 떨어질 만큼. 하지만 벌이가 좋아질수록 어딘가 채워지지 않는 부족함을 느꼈다. 서른세 살, 무작정 친구를 따라 네덜란드로 유학을 떠났다.

소리를 찾아 떠난 길은 춥고 외로웠다. 소리를 내기 위해 앓고 또 앓았다. 풍진으로 온몸에 열꽃이 돋았다. 힘든 시절 그에게 의지처가 되어준 건 처음 활동한 밴드의 베이시스트였던 김호철이다. 네덜란드 왕립 유학원을 2년 만에 조기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뉴욕으로 떠났다. 이번엔 혼자가 아닌 인생 반려자 김호철과 함께였다. 뉴욕시립대에서 마스터 과정을 마치고 돌아온 2009년, 첫 앨범을 냈다.


#숨비소리를_노래하다


음악 하나에 미쳐 전투적으로 살던 때가 있었다.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고 남들보다 늦게 연습실을 나왔다. 치열했던 그에게 변화를 준 건 아이다. 아이를 키우며 ‘나’를, 욕심을 내려놓는 법부터 배웠다. 나이 마흔을 넘기며 엄마이자 아내이자 가수로, 삶에서 균형을 찾는 데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숨비소리’를 만났다.

“해녀 문화를 콘텐츠로 풀어내는 공모사업이 있기에 재즈로 풀어보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인류무형문화유산을 지켜야 한다는 소명감보다 ‘어머니’라는 단어 하나에 끌림이 있었습니다.”

해녀를 노래하게 된 건 우연이지만, 인연처럼 찾아온 기회였다.

“숨비소리란 해녀가 물질하다 물 위로 나와 ‘휘’ 하며 참았던 숨을 내쉬면서 내는 소리입니다. 그 소리가 투명하면서도 강인하고, 슬프면서도 아름답죠. 다큐멘터리 영화 〈물 숨〉을 보면 ‘온종일 숨을 참은 대가는 이승의 밥이 되고, 남편의 술이 되고 자녀의 공책과 연필이 됐다’는 대목이 나와요. 인생을 사는 모습입니다. 문득 삶의 모습이 재즈의 소리와 닮았다고 느꼈어요.”

© 해녀박물관
임경은의 자작곡 ‘숨비소리’는 처음에는 가사가 없는 스캣 곡이었다. 스캣은 ‘스두루루루’ 식의 의미가 없는 음절을 가지고 즉흥적으로 노래하는 재즈 창법이다. 해녀가 물 위로 나와 숨을 뱉어내는 ‘휘’ 소리가 마음속 얘기를 토해내는 스캣과 닮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가사를 붙인 건 한참 뒤다.

‘거친 휘파람 소리 가슴에 품고 물살을 가른다, 뭇별처럼 빛나던 그리움 총총히 새겨두고’

가사를 읊으며 그는 뜨거운 숨을 울컥 뱉어냈다.

“해녀에 대해 대중이 가진 강인하고 억척스러운 이미지가 아닌 아직 여리고 보호받아야 하는, 한 여인, 한 사람으로서 그렸어요. 바다 앞에서 삭이는 마음. 노래하는 내내 마음이 아팠습니다.”

20년 경력의 아티스트에게도 해녀의 삶을 풀어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앨범에는 총 8곡이 들어간다. ‘숨비소리’ 외에도 상상의 섬 이어도의 전설에서 모티브를 얻은 ‘이어도’와 엄마의 테왁(물질 도구)을 의미하는 ‘바다 꽃’ 등 4곡의 작사와 작곡을 맡았다. 연주곡 ‘Blues for 해녀’와 ‘Sea Lady’ 등 4곡은 남편 김호철과 함께 만들었다. 무더웠던 지난여름, 부부는 한 계절을 꼬박 작업에 쏟아부었다.


#나에게_소리란_이야기


재즈에서는 모든 소리가 언어다. 숨을 참는 그 순간도, 호흡도, 정적도 하나의 소리고 이야기다.

“재즈만큼 보컬 색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장르가 또 있을까요? 재즈 안에는 다양한 컬러가 담겨 있어요. 감미로웠다가 강렬해지고, 굵고 거칠면서도 달콤하죠. 인생을 사는 것과 비슷합니다. 어려서부터 소리에 예민했어요. 부모님이 맞벌이하셔서 홀로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피아노 치거나 노래 부르며 시간을 보냈죠. 자유로움을 표현하는 데 익숙했어요. 재즈는 듣고 싶고 또 부르고 싶은 소리였습니다.”

재즈는 악보가 끝나도 계속되는 변주로 마디를 이어간다. 악기와 보컬이 주거니 받거니 하며 즉흥으로 곡을 만드는 거다. 고도의 트레이닝이 된 보컬만이 노래를 이어갈 수 있다.

“재즈에는 다양한 언어가 많아요. 저마다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이야기를 풀어내죠. 스캣으로 ‘스두루루’ 하고 표현하지만, 그 안에서 마치 이야기가 들리는 것 같아요. 가사 없는 이야기랄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품고 소리를 내야 곡을 부르는 내내 중심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에게 소리란 일상의 이야기다.

“어느 날부턴가 소리를 낼 때 힘을 빼요. 호흡을 이용해 최소한의 힘으로 노래하죠. 떨림 없이 쭉 담백하게 이끌어 가는 소리를 좋아해요. 과하지 않은 일상의 소리와 같은. 노래할 때 소리는 말할 때의 목소리와 똑같아요. 가장 편안하게 들릴 수 있는, 모나지 않은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가는 게 좋아요. 잘 불러야겠다는 욕심보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표현하는 데 더 애쓰고 있습니다.”

‘욕심을 내지 말아야지. 여기까지만’하고 참았던 숨을 몰아 뱉어내는 숨비소리. 일상처럼 노래하고 싶다는 그의 바람이 해녀의 숨을 닮았다.
  • 2018년 11월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보내기
  • 목록
  • 프린트
나도 한마디는 로그인 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201812

201812

구독신청
낱권구매
전체기사

event2018.12

event
event 신청하기

더 볼만한 기사

10개더보기
상호 :㈜조선뉴스프레스 / 등록번호 : 서울, 자00349 / 등록일자 : 2011년 7월 25일 / 제호 : 톱클래스 뉴스서비스 / 발행인 : ㈜조선뉴스프레스 이동한
편집인 : 이동한 / 발행소 : 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34, 13층(상암동, 디지털큐브빌딩) Tel : 02)724-6875 / 발행일자 : 2017년 3월 29일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민희 / 통신판매신고번호 : 2015-서울마포-0073호 / 사업자등록번호 : 104-81-59006
Copyright ⓒ topclass.chosun.com All Rights Reserved.

조선뉴스프레스 | 광고안내 | 기사제보 | 독자센터 | 개인정보 취급방침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