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ssue - 덕후력

《더쿠 THE KOOH》 고성배 편집장

어떤 이야기든 300명 독자는 있다

글 : 김민희 기자  / 사진 : 김선아 

‘십만 덕후 양성 프로젝트’, ‘본격 덕질 장려 잡지’. 2014년 창간한 잡지 《더쿠 THE KOOH》가 표방하는 슬로건이다. 혼자 놀기, 집착, 은폐엄폐, 공상, 중2병, 배회, 만화 등 덕후스러운 사람들의 습성을 하나씩 파고들어 한 권씩 만들어냈다. 《더쿠》는 고성배(34) 편집장이 발간하는 1인 독립잡지. 편집장 혼자서 취재와 기사 작성, 촬영과 편집디자인, 인쇄 감리는 물론 홍보와 마케팅까지 다 한다. 인쇄는 딱 300부. 매호 거의 품절이다. 5호까지는 샘플조차 남아 있지 않다.

고 편집장의 덕후 양성 프로젝트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장르와 형태를 달리해 가지치기를 한다. 잡지 외에도 두 줄기의 출간 프로젝트가 더 있다. 《더쿠》에서 한 겹 더 후벼 파고들어가 ‘덕후 오브 더 덕후’를 위한 단행본 시리즈, 잊히는 것들을 기억하는 작업인 ‘닷텍스트(.text)’ 등이 그것. 《더쿠》는 8권, 단행본 시리즈는 4권, 닷텍스트는 6권을 발간했다. 이 모든 작업 또한 혼자 했다.

《더쿠》 편집장, 일명 ‘덕집장’의 작업실은 서울 중랑구 사가정역 부근에 있다. 키치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을 작업실을 훔쳐보고 싶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다른 작업자와 공용하는 공간이라 폐가 될 것 같다며 끝끝내 거절했다. 대신 사가정역 부근 작은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자분자분한 말투마다 덕후스러움에 대한 분명한 철학이 묻어났다.



마감 중이라고 했는데, 작업 중인 책은 뭔가요.

“이름 모를 중2 소녀의 일기장을 기억하는 작업으로 ‘닷텍스트’ 시리즈의 하나예요. 제목은 ‘L로부터’. 1986년에 중2였던 친구의 일기장인데 경매로 구매했습니다. 일기장에 실명이나 고유명사가 없어 특정인을 추정할 만한 단서가 없어요.”


일기장에 특별한 이야기가 담겼나 봅니다.

“없어요. 평범한 중2 소녀의 이야기죠. 그 또래라면 누구나 할 법한 학업과 연애에 관한 고민.”


‘닷텍스트’는 무슨 뜻인가요.

“사람들의 잊어버린 이야기를 모아 아카이빙하는 작업이에요. 닷텍스트는 메모장의 확장자잖아요. 이전 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근무할 때 메모장을 많이 사용했는데, 갑자기 키보드를 잘못 누르면 사라져 버렸죠. 기록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리는 것에 화가 났어요. 기억도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릴 때의 기억, 중요한 순간들이 어느 순간 사라지는 게 안타까웠어요. 인식은 하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아카이빙하고 있습니다.”


《더쿠》 잡지를 낸 계기는.

“모든 사람이 덕후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덕후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지만 4~5년 전만 해도 다소 부정적이었죠. 애니메이션이나 피겨(figure)를 좋아하거나 집에 혼자 있는 사회부적응자, 히키코모리 같은 부류로 치부했잖아요. 이해가 안 됐습니다. ‘왜 뭔가를 좋아하는 종류가 다르다고 해서 비웃고 격하할까’ 하는 의구심이 일었죠. 내가 《더쿠》라는 잡지를 만들고 덕후의 습성으로 잡지 주제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5권을 모으면 오덕후, 10권을 모으면 십덕후가 되는 거죠. 십덕후가 목표예요. 10호까지 만들고 폐간하려 합니다.”


《더쿠 THE KOOH》
1호. 혼자놀기 / 2호. 집착 / 3호. 은폐엄폐 / 4호. 공상 / 5호. 중2병 / 6호. 배회 / 7호. 만화 / 8호. 제작
이제까지 8호가 나왔으니 두 권 남은 셈이군요.

“네. 잡지 형태로는 그만하려 해요. 아쉬워하는 이들이 많으면 ‘주니어’ 같은 레이블을 붙여서 갈 수도 있겠죠.”


각 호의 주제는 어떻게 탄생하나요.

“오타쿠적인 습성을 뽑아서 하나씩 파고들었습니다. 주제에 맞게 소재를 선정하죠. 내가 좋아하고 사람들이 키치하게 볼 수 있는 내용을 담으려 합니다. 가장 쓸모없어 보이도록 만들어요.”


쓸모없는 것들의 쓸모를 보여주려는 건가요?

“아니요. 그냥 쓸모없어 보이는 것 그대로 보여줍니다. ‘이런 걸 누가 돈 주고 사지?’라는 생각이 들도록. 어떤 이야기를 하든 대한민국에는 300명의 독자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활은 됩니까.

“책 판매 수익이 나쁘지 않아요. 최근 출간한 단행본 《동이귀괴문집》은 온라인 펀딩 플랫폼 텀블벅을 통해 제작비를 마련했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8881명이 1억 4000만 원을 후원해주셨죠. 《동이귀괴문집》은 한국의 괴물과 귀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출간의 전 과정을 혼자 다 하려면 버겁지 않나요.

“전혀요. 재미있어요. 스트레스도 없고요. 사람들이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 생활하고 경제성을 갖는 게 목표예요. 계속 쓸모없는 것으로 작업하는데 ‘어, 생각보다 잘사네,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네, 사랑도 꽤 받네’라는 반응을 얻고 싶어요. 사회에서 말하는 ‘쓸모’와 ‘경제력’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하면서 살아도 생활에 문제가 없다는 걸 보여주고 싶습니다.”


단행본
《만화 여행책》 만화 속 장면을 그대로 따라 여행해서 만든 책.
《만화 요리책》 만화 속 요리를 그대로 현실로 재현해서 만든 책.
《GIMMICKS》 초기 SF 영화들의 과학 장치들을 모아 기록한 책.
이미 목표를 이룬 셈이네요.

“20~30대를 지나면서 내가 꿈꾼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어차피 인생은 내가 계획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구나’를 뼈저리게 깨달았죠. 그렇다면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목표는 접어두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에 최선을 다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봤어요. 그래서 쓸데없이 고퀄리티로 만들고 있습니다.”


20~30대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했는데, 어떤 꿈을 꿨나요.

“저는 건축학을 전공했습니다. 건축사무소에 다니다가 카피라이터를 하게 됐는데, 회사생활도 너무 잘했죠. 문득 무서웠어요. 그건 제가 꿈꾼 생활이 아니었거든요. 30대가 되면 건축사무소를 차려서 누군가에게 작업물을 공개하는 삶을 그렸죠. 그런데 32세가 돼 보니 회사에 적응 잘하는 회사원이 돼 있더라고요.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대부분 다 그렇게 사니까요. 그러다 회사생활을 좀 더 잘해보려고 잡지 제작 수업을 듣게 됐는데, 이 수업이 궤도 전환의 계기가 됐습니다.”


‘덕집장’, ‘팬싸움회’, ‘세상은 넓고 덕후는 많다’ 등 고 편집장이 만든 기발한 표현들이 보여요.
카피라이터로서도 능력 발휘를 했겠군요.


“클라이언트의 글을 써주는 일은 생각보다 소모적이었어요. 많이 지쳤죠. 내 시간에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싶어서 잡지 만들기 수업을 들었고, 실험삼아 《더쿠》 1호를 만들어 본 것이 여기까지 왔네요. 4호까지는 회사에 다니면서 만들었어요.”


뭔가에 몰입하고 파고든다는 점에서 ‘덕후’와 ‘전문가’는 비슷합니다.
이 둘의 차이가 뭘까요.


“‘쓸모’와 ‘경제성’의 차이라고 봐요. 잡지를 예를 들어볼까요. 기성 잡지를 만들면 덕후라고 하지 않지만, 독립잡지를 만들면 덕후스럽다고 하죠. 뭔가를 파고드는데 ‘저게 돈이 돼?’라는 시선을 받는다면 덕후가 아닐까요?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


《더쿠》 잡지를 내면서 스스로 “나는 덕후가 아니다”라고 했지요.
아이러니합니다.


“일종의 퍼포먼스 같은 거예요. 사람들은 흔히 뭔가를 좋아하면 자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누군가가 OO를 좋아한다고 하면, ‘그래? 그러면 이거 봤어? 저 차이는 알아?’라며 검증하려 하잖아요. 이런 상황을 비꼬고 싶었어요.”


덕후와 마니아의 차이는 뭘까요.

“좋아하는 대상에 대한 집중도의 차이라고 봅니다. 서브컬처가 될수록 폭이 좁아지니 더 집중할 수 있죠. 가령 ‘영화덕후’라고 하면 영화가 워낙 많으니까 쉽게 덕후라는 말을 하기 어려워요. 끝이 첨예할수록 덕후라고 지칭할 수 있는 여지가 많죠. 덕후는 특정한 누군가를 지칭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높은 덕후’, ‘낮은 덕후’가 아니라 그냥 덕후인 거죠. 누군가 ‘얼마만큼 좋아하는데’라고 물으면 ‘그건 모르겠는데, 그냥 좋아해’라고 답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앎’의 정도가 아니라 ‘좋아함’의 정도?

“네. 덕후 레벨을 검증하는 한 TV 프로그램이 있었죠. 좋아하는 것을 검증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좋으면 좋은 거지, 아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잘 몰라도 많이 좋아할 수 있고, 많이 알아도 좋아하지 않을 수 있잖아요.”


닷텍스트(.text)
《꿈 수집가》 다른 이들의 꿈을 수집하다.
《L로부터》 중2 소녀의 일기장
《유성》 이름 모를 사람들의 사진 모음. 모든 사람은 별이고, 잊힌 사람도 별이다.
《더쿠》를 내면서 세상을 보는 시각이 변했을 것 같습니다.

“조금 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아도 되겠다’는 확신이 섰어요. 대부분은 내가 하고 싶은 일보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좋은 일을 많이 하면서 살잖아요. 강연을 다니다 보면 ‘돈은 버세요?’라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저 생각보다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굳이 사회에서 박아놓은 틀대로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누구나 한 번쯤 하고 싶은 걸 꾸준히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인생 길잖아요. 하다가 다시 돌아와서 다른 걸 하면 되죠. 사실 쉽지 않은 일이긴 해요. 한 번에 바꾸기보다 조금씩 바꾸다 보면 역전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역전이라뇨.

“사회가 만들어 놓은 기존의 프레임과 나만의 프레임의 역전이죠. 점점 나만의 프레임이 생기는 걸 느껴요.”


고 편집장의 경우 역전되는 순간은 언제였나요?

“일단 해보는 것이 중요해요. 하고 싶은 것 10개가 있으면 7~8개는 시도해보려 해요. 카페도 그 경우죠. 길을 지나다 작은 카페를 보고 ‘이런 카페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시도했어요. 수중에 있는 500만 원으로요. 운영이 쉽지 않아 얼마 안 가 접었지만 좋은 경험이었어요. 하고 싶은 걸 과감하게 하다 보면 나만의 프레임이 점점 커지는 것 같아요.”


덕집장으로서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문득 좋아하는 걸 하고 싶어지면 해도 괜찮다’는 얘길 하고 싶어요. 너무 많이 고민하거나 재다 보면 인생이 재미없어져요. 문득 해 보는 일이 인생에서 어떤 갈래로 펼쳐질지 모르잖아요. 삶의 관점에서 크게 보면 밥 먹고 자는 일 이외의 일은 다 쓸모없는 일 아닐까요? 그중 쓸모없는 일 한두 개 추가한다고 문제가 생기지 않아요. 나를 위한 쓸모없는 일 하나쯤 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 2018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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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건의 글이 있습니다. 작성일순 | 찬성순 | 반대순
  히도   ( 2018-07-27 ) 찬성 : 9 반대 : 9
인터뷰 잘 봤습니다!
 덕집장님이 앞으로 낼 출간물들을 기대하겠습니다: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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