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ssue - 덕후력

덕업일치의 조건 #2 즐겨라

미국 변호사 이철재 / “일상을 덕후처럼”

글 : 김민희 기자  / 사진 : 김선아 

갈수록 덕후와 전문가의 차이가 모호해지고 있다. 덕후가 자신의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면 ‘전문가’로 평가받는 세상이다. 소위 ‘성덕’으로 승격하는 것이다. 덕후들이 꿈꾸는 궁극의 지점은 ‘덕업일치’다.
클래식 음악 저작권 전문 변호사 이철재 씨도 그 경우다. 클래식 음악이 좋아서 클래식 덕후로, 외국어 공부가 재미있어서 외국어 덕후로 살다 보니 그 둘의 소질을 결합한 일을 하고 있다.
덕후와 전문가. 둘 다 한 분야를 깊이 파고들어 전문지식을 갖췄다는 공통점이 있다. 차이는 뭘까? 이 둘의 차이를 ‘분야’에서 찾는 것은 구시대적이다. 그보다 ‘동기’에서 둘을 가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덕후는 ‘내가 그저 좋아서’, 전문가는 ‘뭔가를 이루기 위해’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시 말해 덕후는 ‘과정 중심’, 전문가는 ‘결과 중심’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덕후 중에도 목표가 분명한 덕후가 많고, 전문가 중에도 그저 좋아서 하는 이가 많다.

이철재 씨는 덕후스러운 전문가다. 일상의 모든 대상을 덕질하듯 산다. 그에게 미국 변호사는 1%도 계획에 없었던 시나리오다. 클래식 음악이 그저 좋아서 클래식 덕후로, 외국어 공부가 좋아서 외국어 덕후로 꾸준히 몰입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남들은 묻는다. “영어로 된 법률용어도 어렵고 클래식 음악도 어려운데, 클래식 음악 저작권을 영어로 다루는 미국 변호사가 어떻게 되셨나요?” 하고. 그의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좋아하는 분야라서 깊이 팠어요.”

각각의 분야에서 단행본도 냈다. 《나도 바흐를 즐길 수 있을까》는 클래식 덕후로서의 족적이고, 《보통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영어책》은 외국어 덕후로서의 족적이다. 전자는 음악감상, 후자는 영어공부에 관한 책이지만 시중에 즐비한 실용서적과는 성격이 사뭇 다르다. ‘음악감상법’이나 ‘영어공부법’의 노하우를 알려주지 않는다. 책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다룬다. ‘이렇게 하면 나처럼 잘할 수 있습니다’가 아니다. ‘나는 음악감상 하면서 이런 걸 느꼈습니다’, ‘나는 영어공부를 하면서 이것과 저것의 차이를 알게 됐습니다’를 말한다. 책을 읽다 보면 저자가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킥킥’거리며 말을 걸어오는 듯하다. “글쎄, 이런 걸 발견했지 뭐에요, 너무 재미있지 않아요?”라고.


달인 경지의 언어능력


이철재 변호사의 영어실력은 원어민도 울고 갈 수준이다. 미국 유니버설뮤직 그레이엄 파커(Graham Parker) 회장은 그를 두고 “달인의 경지에 다다른 언어능력”이라고 평가했다. 그 스스로는 자신의 영어실력을 보여주는 일화로 친구의 장례식장 이야기를 꺼냈다.

“암으로 세상을 떠난 20년 지기의 장례식장에서였어요. 가족의 부탁으로 앞에 나가 친구를 추억하는 이야기를 했죠. 슬픈 얘기뿐 아니라 웃긴 이야기도요. 10분 동안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된 듯했어요. 사람들이 너무 웃어서요. 저도 민병철 생활영어에서 쓴 표현을 외웠다가 하나 써먹는 데에도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던 시절이 있었어요. 지금 이렇게 아무 원고도 없이, 사전 준비도 없이 미국 사람들을 울리고 웃길 수 있게 된 상황이 저 스스로도 감격스럽죠. 내 영어가 멀리 왔구나 하고요.”

클래식에 대한 조예도 만만치 않다. 자신을 ‘풍월당 1호 손님’이라고 소개한다. 풍월당이 채 문을 열기도 전에 가오픈한 상태에서 음반을 구매한 첫 손님이라고. 여섯 살 때 바이올린을 처음 배운 이후 클래식에 매료된 그는 대학 오케스트라에서 제2바이올린 섹션리더로 활약할 정도로 수준급 연주력을 갖췄다. 클래식 관련 책을 쓴 이유 또한 분명하다.

“저 때문에 단 몇 명이라도 클래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썼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됐고요. 클래식 관련 책을 더 내자는 제안이 있는데 거절했어요. 내가 음악감상 책을 또 쓰면 내가 느낀 걸 또 다른 사람들한테 강요하는 것 같았죠. 감상을 책으로 하면 자기 감상은 언제 하나요.”


세상에 헛된 노력은 없다

이철재 변호사의 덕후스러운 영역은 영어와 클래식이 다가 아니다. 외국어는 영어뿐 아니라 불어, 이탈리아어, 라틴어도 일상에서 의사소통이 가능한 수준이다. 요리는 또 어떤가. 잡채, 갈비찜, 궁중떡볶이, 만두 등 한식부터 피치 카블러(Peach Cobbler), 애플 크로스타타(Apple Crostata) 등 디저트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제대로’ 혼자 다 하고, 커피에 대한 지식도 넓고 깊다. 멘토처럼 따르던 노교수가 백혈병 진단을 받았을 때는 간병인을 자처해 2년간 혈액학을 파고들었다.

뭔가에 꽂히면 파고 또 파는 이철재 변호사. 다방면으로 뻗어있는 그의 덕후스러운 분야는 시간이 갈수록, 나이가 들수록 빛을 발한다. 그의 덕질 분야는 여전히 미개척 분야가 많다. 무엇을 보든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관찰하고 파고드는 그에게 세상만사가 그렇게 재밌느냐고 물었다. 그는 ‘실버 라이닝(Silver Lining)’이라는 표현을 꺼냈다.

“영어에 ‘실버 라이닝’이라는 말이 있어요. 미국에서 은은 최고의 가치를 지녀요. 금수저 대신 ‘실버스푼을 입에 물고 나왔다’고 하잖아요. 실버 라이닝은 아주 가느다란 희망을 뜻해요.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라도 뭔가는 건질 게 있다는 표현이죠. 한국말로는 ‘불행 중 다행’ 정도? 과정과 노력에 가치를 둔 미국적 사고를 반영한 말이에요. 결과와 관계없이 과정을 즐기는 것이 몸에 밴 것 같아요.”

미국인도 인정하는 영어 달인이지만, 그는 요즘에도 영어 공부를 단 하루도 쉬지 않는다고 한다. 매일 사전을 뒤적이고, 일주일에 한 번씩 영어문제 풀이를 한다.

“영어를 잘하려면 반복이 필수인데, 반복이 재미있지만은 않아요. 즐겁지 않아도 파야 합니다. 힘들지만 즐거워질 수 있어요. 힘들지 않다는 말이 아니에요. 내가 좋아하는 영어실력이 향상되는 게 눈에 보이면 그보다 더 큰 즐거움이 어디 있겠어요.”

그는 기막힌 비유를 덧붙였다.

“미국 사람처럼 영어를 잘하고 싶었어요. 그 지점까지 가는 게 목표였죠. 전쟁터를 예를 들어볼까요? 전쟁터에서 도망가다 보면 가시밭길을 맨발로 뛰어가잖아요. 도망이라는 목표가 있으니까 발이 아픈 줄도 모르죠. 같은 차원이에요.”

그와의 인터뷰는 그 후로도 30분 이상 계속됐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선율을 꿈꾸듯 표현했고, 장기하, 심수봉, 패티김, 조용필의 노래에 대해 마치 갖고 싶던 장난감을 손에 쥔 아이처럼 좋아하며 설명하고 또 설명했다.

약속 시간에 늦었다며 헐레벌떡 나서며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세상에 헛된 노력은 없습니다. 어딘가에 꼭 쓰여요.
  • 2018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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