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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아르는 파국을 향해 달려가는 그 쓸쓸함이 좋다”

한국 영화의 아름답고 슬픈 얼굴 〈미옥〉의 배우 김혜수

사진제공 : 호두엔터테인먼트, 강영호 작가
김혜수가 한국 영화에서 짊어지고 있는 무게는 어느 정도일까. 적어도 그가 한국에서 태어나 배우로 활동하는 여성으로서 끝없이 새로운 길을 내기 위해 분투 중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질문을 바꾸어, 한국 영화계는 김혜수를 담을 준비가 되어 있을까. 〈미옥〉은 김혜수가 가진 저력의 합보다 영화가 가진 함량의 합이 적었을 때 나타나는 애석한 영화다.

한 컷의 이미지로 기억되는 영화가 있는데 〈미옥〉이 그렇다. 현정의 삶을 사는 미옥은,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는 그 소박한 꿈마저 짓밟히려는 찰나 혈혈단신으로 적진에 들어가 조직을 박살낸다. 그 과정은 퍽 고독하고 고단하다. 고단한 얼굴의 현정이 담배를 물고 비열한 거리에 총구를 겨누는 1분 남짓의 시간은, 〈미옥〉을 위해 쓴 90분이 아깝지 않게 만든다. 하지만 나머지 89분의 성패도, 김혜수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포스터에는 은발에 붉어진 눈으로 총을 겨누는 김혜수가 홀로 담겨 있다. 거기에 ‘미옥’이라는 두 글자가 아로새겨져 있다. 미옥으로 인한 모든 영광과 수모도 김혜수의 몫이라는 뜻이다.

— 〈미옥〉은 전에 없던 장르의 영화입니다. ‘여성 누아르’라는 말이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누아르의 중심에 미옥이 있는 건 분명하죠.

“평소 누아르라는 장르를 좋아했어요. 파국을 향해 달려가는 그 쓸쓸함이 좋았어요. 〈차이나타운〉을 마치고 시나리오를 처음 봤어요. 몇 번의 수정을 거쳐 지금의 〈미옥〉이 되었습니다. 미옥이 ‘평범’을 꿈꾸는 여자라는 게 좋았고, 각자의 관점에 따라 미묘하게 어긋나는 관계가 흥미로웠습니다. 결국 그 관계의 뒤틀림이 파국을 만들죠.”

— 의미 있는 시도였음은 분명하지만, 아쉬운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건 김혜수라는 배우에 대한 아쉬움이라기보다는, 여성을 전면에 내세우고도 여성의 문법이 온전히 이해되지 못한 아쉬움입니다.

“그건 정말 중요해요. 영화계가 기울어진 운동장이긴 하지만, 그 안에는 의미 있는 시도가 많이 있어요. 최근에 나온 〈용순〉 같은 영화는 굉장히 훌륭하죠. 잘 드러나지 않아도 그런 노력들이 계속되고 있고 마침내 이루어지는 날이 오리라 믿어요. 하지만 아직은 노력해야 할 때인 것 같아요. 한 번에 놀랄 만한 성취를 보여주는 작품이 나오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하더라도 용기를 내보는 거죠.”


— 그렇게 용기를 낼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올까요?

“사실 제가 굉장히 소심해요. 걱정도 많고 생각도 많아요. 처음에는 연기라는 게 뭔지를 몰랐고, 알게 된 다음에는 생각이 많아지더라고요. 알게 된다고 꼭 잘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로 인한 고민과 생각이 정말 괴로운 것 같아요. 그런데 또 잘하고 싶거든요. 그래서 열심히 하게 되고요. 배우가 열심히 하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만요.(웃음)”

— 영화를 보니 이번에도 고생 많이 했을 것 같습니다.

“액션이 처음이다 보니 걱정을 많이 했죠. 다행히 정말 좋은 팀을 만났어요. 〈시그널〉에서도 같이 호흡을 맞춘 팀이라, 저에 대해 잘 이해를 해 주셨고요. 누아르는 비주얼도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비주얼에도 다 의미를 담으려고 했어요. 현정이 악어가죽으로 만든 긴 코트를 입고 싸우는데, 그건 멋도 있지만 실제로 악어가죽이 칼로 뚫기가 제일 어렵대요. 그에게는 나름의 방탄복이자 전투복인 거죠. 혼자서 이 장정들을 상대해야 하는데, 무기가 필요하잖아요. 한때는 현정의 아랫사람들이었고 이 삶을 겪어봤기 때문에, 이들과 어떻게 싸워야 할지도 알고요.”

—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정말 다행이죠. 저보다 이희준 씨가 고생이 많았어요. 수조 안에서 찍은 신은 정말 힘들었을 거예요. 물속에서 버둥거리다가 몸이 뒤집힐 수 있거든요. 근데 우리는 다 그가 연기를 너무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뒤집혀서 버둥거리면서도 촬영을 중단시키지 않고 끝까지 해내더라고요. 그 공포를 알아요. 제가 〈도둑들〉에서 물 신 찍다가 겪어봤거든요. 그때 그 공포가 살아나서 전 지금도 그 영화를 못 봐요.”


좋은 배우가 더 좋은 배우가 되는 경우


— 김혜수 씨와 함께 호흡을 맞춘 동료, 후배들은 함께한 현장이 얼마나 감동이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이선균 배우는 자신이 나오지 않는 순간에도 100%를 주는 김혜수 씨에게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건, 당연한 것 아닌가요? 안 그런 배우도 있나요? 연기라는 게 서로 주고받는 건데, 내가 안 나온다고 안 주는 건 연기가 아니죠. 그건 제가 칭찬받을 일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현장에서 그러지 않는 배우가 있다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일이죠. 설마 그런 경우가 있을까요?”

— 화난 건 아니시죠?(일동 웃음) 관객의 입장에서도 김혜수 씨가 있어서 감동적인 순간이 있습니다. 앞장 서 분투하는 모습에 응원하게 되기도 하고요.

“좋은 배우가 정말 많아요. 좋은 배우가 더 좋은 배우가 되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제가 놀라는 건 관객분들이에요. 이분들은 진심으로 ‘좋은 영화’가 나오기를 기다려요. 그 영화에 손뼉을 쳐줄 준비가 되어 있고요. 좋은 영화에 대한 고민은 영화인들만의 것이 아니라, 관객의 것이기도 한 거죠. 그런 토양에서 더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다만 관점이 아직 바뀌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이 있죠. 정말 좋은 책(시나리오)이 있는데, 투자가 안 되는 경우도 있고요.”


— 〈미옥〉은 김혜수 씨의 영화 중에서 어떤 위치에 놓이게 될까요? 이 영화가 본인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정리가 되고 있나요?

“〈미옥〉은 작년 1월부터 4월까지 찍었어요. 이제 1년 6개월 정도가 지났죠. 중간중간 여러 번 수정 작업을 지켜보기도 했고, 열심히 의견을 내기도 했어요.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이 순간에도, 이 영화는 제게 어려운 영화이기도 해요. 어떤 의미를 남겼는가는 앞으로 두고두고 더 생각해야 할 부분일 것 같아요.”

— 요즘엔 어떤 영화를 보세요?

“평소에 영화를 그렇게 많이 찾아 보는 편은 아니에요. 그런데 최근에는 평소에 보려고 적어 둔 영화들을 좀 찾아 봤어요. 〈미스 슬로운〉 재밌게 봤고요, 〈빅 쇼트〉도 흥미로웠어요. 〈레이디 맥베스〉도 봤고요. 한 인물의 감정선이 영화 끝까지 관객을 사로잡는 게 대단하더라고요. 어쩜 그렇게 연기를 잘하는지 깜짝 놀랐어요.”

— 영화보다는 책을 더 좋아하나요?

“제 성향이 그런 것 같아요. 평소에는 TV도 잘 안 켜요. 소음이 없는 고요한 상태가 좋아요.”


어쩌면 우리는 모두 지금 과도기를 지나고 있는지 모른다.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도, 영화를 연출하는 사람도 모두 남성이라면 그들의 관점에서 영화가 풀려나간다. 그럼에도 영화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담기를 바라고, 남성과 여성을 넘어 다양한 관점이 열리기를 바란다. 적어도 〈미옥〉은 그런 바람을 담은 영화다. 이 영화가 이 순간 모두를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해도, 그 이상향을 향해 나아가는 징검다리가 될 것임은 부인할 수 없다. 김혜수는 그 징검다리 하나를 놓기 위해 자신이 쌓아온 것들을 걸었다. 〈미옥〉은 김혜수가 지금껏 쌓아온 적금을 깨는 영화가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용기가 값진 것은, 덕분에 우리는 그다음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 2017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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