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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트트랙 유망주에서 아시아 ‘빙속 장거리 최강자’로

한국인 최초 동계아시안게임 4관왕 이승훈

‘빙속 장거리 최강자’ 이승훈(29)은 2017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2월 19~26일)에 출전해 한국 선수 최초로 ‘동계아시안게임 4관왕’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1만m 금, 5000m 은)과 2014 소치 동계올림픽(팀추월 은)에서 금메달 1개와 은메달 2개를 딴 그는 이번 대회에서 아시아 정상의 자리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이승훈은 내년 2월 열리는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도 유력한 금메달 기대주로 꼽힌다.
동계아시안게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이승훈을 한국체육대학 실내 빙상장에서 만났다. 그는 대회 폐막 다음 날부터 다시 훈련에 돌입하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2주일 뒤에 노르웨이에서 열리는 국제빙상연맹(ISU) 스피드스케이팅 월드컵 파이널(3월 11~12일)에 나갈 준비 중이에요.” 그는 “아시안게임에서 할 만큼 했으니 쉬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면서도 “몸 상태가 좋은데 여기서 시즌을 마무리하기가 아쉬워 조금만 더 해보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정강이 부상과 좌절 딛고 얻은 소중한 승리

7년 넘게 아시아 장거리 최정상을 지키는 이승훈의 하루는 새벽 4시 30분 시작된다. 매일 그때 일어나서 한국체육대학 소속 쇼트트랙 선수들과 훈련을 시작한다. 많을 때는 하루에 쇼트트랙에서 50km를 돈다. “역설 같은 이야기지만 400m 롱트랙 훈련에 최고는 쇼트트랙입니다. 가파른 코너가 계속 있기 때문에 롱트랙보다 다리 힘과 체력을 기르는 데 더 효과가 있어요. 코너링 훈련은 말할 것도 없지요. 유럽 선수들은 인라인 스케이트나 자전거를 타면서 체력훈련을 하는데, 저는 쇼트트랙 코스를 오래 도는 훈련법이 더 맞더라고요.”

이승훈은 이번 동계아시안게임을 불과 열흘 앞두고 정강이가 찢어지는 부상을 당해 출전조차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그는 평창 올림픽 테스트 이벤트인 ISU 종목별 세계선수권대회(강릉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 팀추월(2월 10일)에서 스텝이 엉켜 넘어지며 8바늘을 꿰맸다. 주변에선 “평창 올림픽이 가장 중요하니 이번에 무리해서 나가지 마라”고 만류했지만 그는 출전을 강행했다.

그는 “꿰맨 부분이 스케이팅을 할 때 조금 당기는 느낌이 있었지만, 달리는 데 큰 문제가 없어 나가게 됐다”고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주변 사람들의 증언은 달랐다. 이승훈 매니지먼트사 브라보앤뉴 관계자는 “대표팀 최고참인 이승훈은 함께 팀추월을 준비한 후배들에게 피해 주기를 원하지 않았다”며 “한국 선수단의 목표(금메달 15개 이상, 종합 2위)에도 보탬이 되겠다는 의지가 커 팀추월뿐 아니라 1만m에도 나섰다”고 전했다.

이승훈은 출전한 4종목(5000m·1만m·팀추월·매스스타트)을 석권하며 한국의 역대 동계아시안게임 최고 성적(금 16·은 18·동 16) 달성에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는 하루에 3시간 간격으로 벌어진 1만m와 팀추월(3200m)에서 동시에 금메달을 수확하는 저력을 과시했다. 빙상인들마저 ‘하루에 마라톤 풀코스(42.195km)를 뛰고 다시 하프코스를 뛰는 거나 마찬가지’라며 감탄했다. 팀추월 결승선을 통과하는 이승훈의 얼굴에선 힘든 기색을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이승훈은 “체력적으로 아주 힘들었지만 남들도 힘든 거 다 아는데 굳이 얼굴 찡그릴 이유가 없었다”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일곱 살 때 취미로 쇼트트랙을 시작하며 빙상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IMF 외환위기가 찾아와 차를 처분한 탓에 아버지 이수용(59)씨가 아들을 빙상장에 데려다줄 수 없었지만, 꼬마는 혼자 버스를 타고 가겠다고 씩씩하게 집을 나섰다. 리라초 4학년 재학 시절 그는 일기장에 “축구 황제 펠레처럼 ‘쇼트트랙의 황제’ 이승훈이 되고 싶다. 그렇게 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썼다. 어린 시절부터 승부욕이 강하기로 소문난 그는 “운동선수 중에 승부욕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며 “내 승부욕은 평범한 수준”이라고 웃어 보였다.

쇼트트랙 유망주였던 그는 국제대회에서도 두각을 나타냈지만, 스물한 살이던 2009년 돌연 스피드스케이팅으로 ‘종목 전향’을 했다. 2009년 4월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쇼트트랙에는 안현수(32), 이호석(31), 성시백(30), 곽윤기(28) 등 그가 물리쳐야 할 쟁쟁한 경쟁자가 너무 많았다. “쇼트트랙은 양궁처럼 국가대표 선발전이 곧 올림픽 성적과 다름없어요. 국가대표에서 떨어지고 거의 폐인처럼 시간을 보냈는데 결국 제가 있어야 할 곳은 ‘얼음판 위’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종목을 바꿔서 다시 도전하기로 했죠.”

이승훈은 종목을 바꾼 지 1년도 채 안 돼 출전한 밴쿠버 올림픽 1만m에서 금메달을 따며 세계무대를 놀라게 했다. 유럽과 북미 선수들이 독점하다시피 한 1만m에서 아시아 선수가 정상에 오른 건 극히 이례적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장거리(5000m·1만m)에서 다소 주춤했지만 평창 올림픽부터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매스스타트’에서 압도적인 실력을 자랑한다. 매스스타트는 최대 28명 선수가 지정된 레인 없이 400m 트랙을 16바퀴 돌아서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한 선수가 우승하는 종목이다. 자기 레인이 없다 보니 자리싸움에 익숙한 쇼트트랙을 경험해본 선수가 유리하다. 그는 현재 매스스타트 세계 랭킹 1위에 올라 있다.


‘쇼트트랙 DNA’ 가진 스피드스케이팅 선수


스피드스케이팅 선수인 이승훈에겐 ‘쇼트트랙 DNA’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붙는다. 쇼트트랙에서 터득한 몸싸움과 코너링 기술의 도움을 많이 받으며 매스스타트를 포함한 장거리 종목에서 승승장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쇼트트랙은 나에게 ‘애증’의 대상”이라고 했다. 먼저 시작한 쇼트트랙에서 정상을 맛보지 못하고 전향한 ‘아쉬움’과 쇼트트랙에서 배운 기술로 스피드스케이팅 정상에 오른 ‘감사함’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처음 종목을 바꾸고 나선 쇼트트랙은 쳐다보기도 싫더라고요. 그런데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로 2010 밴쿠버 올림픽 1만m 금메달, 5000m 은메달을 따고 나서 이상하게도 쇼트트랙에 대한 미련이 생겼어요.” 그는 밴쿠버 대회 직후 이듬해 열린 2011 아스타나·알마티 동계아시안게임에 스피드스케이팅뿐 아니라 쇼트트랙 국가대표로도 나가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고심 끝에 그는 2010년 9월 기자회견을 열고 “스피드스케이팅에서 계속 도전해 빙속 부문에서 누구도 이루지 못한 일을 해내고 싶다”며 쇼트트랙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스피드스케이팅에만 전념하기로 결정했다.

“종목을 바꾼 만큼 더 잘하고 싶었어요. 종목을 전향한 제가 실패할 거라 말했던 사람들에게 할 수 있다는 걸 꼭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지금의 이승훈에게 쇼트트랙은 어떤 의미일까. 그는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발판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쇼트트랙을 안 했으면 지금처럼 스피드스케이팅을 할 수도 없었을 거예요. 제가 가진 기술은 모두 쇼트트랙에서 나온 거예요. 이제 더는 쇼트트랙에 미련이 없어요.”

이승훈은 내년 평창 올림픽에서도 네 종목에 모두 출전할 예정이다. “주종목인 매스스타트와 팀추월에서 금메달을 따고 싶어요. 5000m와 1만m에도 나가서 동메달이라도 따야죠.”

쉴 틈 없이 운동하는 그의 취미 생활은 영화 감상과 휴식이다. “평소에 너무 많이 움직이다 보니 영화 보거나 조용히 커피 마시면서 쉬는 걸 좋아해요.” 인터뷰 내내 그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의 금반지가 조명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반지가 예쁘다’고 하자 이승훈은 멋쩍어하며 “제 나이에 아직 연애도 안 하고 있으면 이상한 것 아니냐”며 “유명인이 아니라 상대를 밝히긴 어렵다”면서 웃었다.
  • 2017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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