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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과 실패 속에서도 구원을 꿈꾸는 사람들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 천명관 작가

글 : 이선주 객원기자  / 사진 : 김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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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극본 〈응답하라…〉를 쓴 이우정, 웹툰 〈미생〉을 쓴 윤태호, 미국 드라마 〈보드워크 엠파이어〉를 쓴 테렌스 윈터, 박찬욱 감독 같은 분이 우리 시대의 진정한 작가가 아닐까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반영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 이야기에 많은 사람이 공감하면 되지, 그게 꼭 소설이란 형태를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장편소설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를 펴낸 천명관 작가는 문학의 순수성과 우월성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 시원한 펀치를 날린다.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는 20억짜리 밀수 다이아몬드와 35억짜리 종마를 손에 넣으려고 뒷골목 건달들이 좌충우돌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욕망을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허점투성이 남자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작가의 천연덕스러운 입담과 블랙유머는 여전하다. 하지만 이전 작품들에 비해 이야기 구조가 단순하고 가벼운 데다 장면 전환도 빨라 영화 한 편을 보는 듯한 느낌이 더욱 강해졌다.


빠르게 바뀌는 시대에 낙오된 인물들이 주인공

“로맨스나 무협 같은 장르소설을 올리는 웹소설 플랫폼인 ‘카카오 페이지’에 연재했던 작품입니다. 정색하고 무거운 소설을 쓰는 곳이 아닌 데다 저도 그런 소설을 쓰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소설은 보통 인물들이 멈춰 서서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을 그려내는데, 제 소설 속 인물들은 생각을 하지 않아요. 무조건 달려가고 보죠. 그러니 내면묘사보다 사건에 대한 서술이 많고, 그게 비문학적으로 보일 수도 있어요. 그렇다고 새로운 형식은 아니에요. 미국은 영화적 기법이 소설 속으로 들어온 지 벌써 오래됐거든요. 우리만 옛 방식을 고수하느라 새로운 글쓰기가 잘 나타나지 않으니 제 소설을 보고 ‘낯설다. 영화적이다’라고 하지, 미국에서는 아주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글쓰기입니다.”

2003년 문학동네 신인상에 단편소설 〈프랭크와 나〉가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는 이듬해 장편소설 《고래》로 문학동네 소설상을 받았다. 《고래》는 시집간 지 하루 만에 소박 당한 박색 노파, 산골 소녀에서 소도시 기업가로 변신한 금복, 지적장애아인 금복의 딸 춘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전쟁과 근대화 등 시대적 배경을 뒤로하고 인간 욕망의 분출과 흥망성쇠가 대서사시처럼 펼쳐지는 이 작품에는 남미소설의 환상적인 요소와 전통설화의 세계가 뒤섞여 있다. ‘소설에 대한 기존 상식을 훌쩍 비켜나 낯섦과 기이함, 당혹스러움을 안기면서 숨 가쁘게 몰입하게 만드는 대단히 특별하고 매력 넘치는 소설’이라는 게 당시 평이었다. 소설가 은희경은 “이 작가는 전통적 소설 학습이나 동시대의 소설 작품에 빚진 게 별로 없는 듯하다.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냈다는 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이후 그는 소설집 《유쾌한 하녀 마리사》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장편소설 《고령화가족》 《나의 삼촌 브루스 리》 등을 내놓으며 독자들이 다음 작품을 기다리는 작가가 되었다. 《고령화가족》은 윤여정, 박해일, 공효진 등이 주연한 영화로 만들어졌고, 《나의 삼촌 브루스 리》는 곽경택 감독이 영화로 만들고 있다.

그의 작품에는 건달, 창녀, 백수, 에로영화 감독, 한물간 배우, 대리기사 등 우리 사회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들이 중심인물로 등장한다.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에 등장하는 초짜 건달 울트라는 커다란 덩치에 단순무식한 싸움꾼이다. 하지만 훔쳐낸 종마의 아름다움에 반해 애지중지 돌볼 만큼 엉뚱한 데다 순박한 인물이기도 하다. 울트라는 다이아몬드를 손에 넣은 창녀 출신 지니 그리고 종마와 함께 사라진다. 엎치락뒤치락 한바탕 소동의 최종 승자는 울트라인가? 가만 보면 천명관 작가의 작품에는 울트라 같은 인물이 자주 등장한다. 《고래》에서는 키가 팔 척이 넘는 장골의 사내인 걱정, 《고령화가족》에서는 120kg 거구에 밥만 축내는 백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가족애를 보여주는 형, 《나의 삼촌 브루스 리》에서는 이소룡을 동경하고 한 여자에게만 순정을 바치는 삼촌이다. 이런 인간상에 작가가 특별히 애정을 느끼는 게 아닌지 물었다.

“그런지도 모르겠네요. 자기만의 세계가 있지만 빠르게 흘러가는 시대에서 낙오된 인물, 약지 못한 데다 단순하고 우직한 인물들이죠. 우리나라를 선진국으로 만들고 싶었던 역대 정권들은 후진적이고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 요소들을 계속 제거해나갔잖아요? 이전에는 〈옥이이모〉 〈파랑새는 없다〉 〈서울의 달〉 같이 서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드라마도 많았지만, 요즘 텔레비전에는 재벌2세만 나오잖아요?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은 혐오의 대상이 되어 눈앞에서 사라지고 부자들만 살 만한 나라가 되었죠.”

1964년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난 그는 농촌 공동체와 서울의 근대화 과정을 모두 지켜보면서 성장했다고 말한다.

“용인이 지금은 서울에서 출퇴근하는 도시가 되었지만, 제가 어릴 때는 전형적인 농촌이었습니다. 방학 때면 청량리에서 가겟방을 하시는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서 지내며 답십리, 수유리, 금호동, 석관동 등 서울의 친척집을 돌아다녔죠. 연탄재로 새까매진 골목길이나 카바이드 등을 켜놓은 노점상 같은 1970년대 서울의 빈민가들에 대한 기억이 많아요. 청량리 일대 극장들을 다니며 무협영화에 심취하기도 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군대에 다녀온 다음에는 여의도와 압구정동 등 부자 동네의 골프 숍에서 일하고, 기업 대상 보험 판매원으로 일하면서 노조들을 많이 만나 사회의 다양한 면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농촌과 서울이 변화하는 모습을 모두 경험한 게 작가로서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올해는 영화 시나리오 작업과 연출에 집중


그의 장편소설이 주로 옛 시대를 다루고 있는 데 대해 작가는 “너무 가까운 현재는 총체적인 시각을 갖기 어렵습니다. 시간이 지나봐야 그 시대를 전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요즘 영화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있다. 절친한 작가 김언수의 장편소설 《뜨거운 피》를 각색해서 연출까지 맡을 예정이다. 그는 30대를 고스란히 영화에 바쳤고, 영화감독은 그의 오랜 꿈이었다.

“군대 동기 중 영화 하던 친구가 있어 걔 만나러 오가다 영화 일을 시작했습니다. 보험회사에 다니다 지쳐 새로운 일을 좀 해보고 싶던 차였습니다. 영화사 직원, 제작부 일, 시나리오 작업 등 감독만 빼고 해보지 않은 일이 없습니다. 〈북경반점〉 〈총잡이〉 〈이웃집 남자〉의 시나리오를 썼고,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라는 양귀자 소설을 영화로 각색했죠.”

영화감독이 되려고 시나리오를 들고 다녔지만 감독 데뷔는 쉽지 않았다. 40대로 접어들 때 문학도였던 동생이 소설을 써보라고 했다. 소설을 쓰기 시작한 지 3개월 만에 문학동네 신인상을 받고, 다시 3개월 동안 쓴 장편소설로 문학동네 소설상을 받으면서 소설가로 변신했다. 10여 년 만에 다시 영화로 돌아가는 그에게 소설과 영화 중 무엇에 더 애정을 느끼는지 물었다. “옆에 있는 여자보다 멀리 있는 여자를 그리워하잖아요? 소설을 쓰는 동안에는 영화를 그리워했지만, 영화를 하게 되면 소설을 더 사랑하게 될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영화보다 소설에 더 재능이 있는 게 아니냐고 물으니 “영화는 아직 만들어보지 않았으니, 해보기 전에 알 수 있나요? 쉰 살이 넘어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이미 성공했고 행운아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답한다.

“저는 사색적인 인간이 아니에요. 제 소설 속 인물들처럼 일단 움직이고 보죠. 골방에 처박혀서 하는 일을 사실 잘 못 견뎌 합니다. 학교 다닐 때는 1시간도 앉아서 공부해본 적이 없어요. 혼자 있는 것조차 싫어하죠. 영화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고 회의하고 조율하고 여럿이 함께 하는 일이라서 좋습니다.”

소설을 쓰기 전 가진 것은 없고 그저 먹고살기 위해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었다는 그. 그의 소설이 가진 힘은 그런 삶의 현장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소설을 내면서 그는 “따지고 보면 작가가 하는 모든 이야기는 어디선가 다 주워들은 이야기입니다. 나에게 멋진 이야기를 들려준 세상 모든 이야기꾼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그의 소설을 좋아할까? 그의 이 말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실패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며 부서진 꿈과 좌절된 욕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사람들이 소설을 읽는 이유가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불행과 실패 속에서도 여전히 구원을 꿈꾸며 꾸역꾸역 살아가는 사람이 자기 혼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2017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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