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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에서 이룬 것은 모두 네팔의 것입니다

‘지구촌 사회적기업’ 쥬네리 차승민 대표

글 : 김미량 객원기자  / 사진 : 김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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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의 유일한 한국인 디자이너 차승민, 사람들은 그를 쥬네리(JuNeLi) 디디(didi)라고 부른다. 주네리는 네팔어로 보름달의 달빛을, 디디는 언니라는 뜻이다. 그는 네팔의 패션 브랜드 ‘쥬네리’를 론칭하고, ‘메이드 인 네팔’ 의류를 세계에 수출하고 있으며, 네팔 여성들의 직업교육과 경제적 자립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CEO이자 사회운동가다.

사진제공 : 쥬네리
한복디자이너, 네팔로 향하다

쥬네리는 한국인 차승민 디자이너가 만든 네팔의 여성의류 및 패션소품 브랜드다. 2010년 홀로 네팔로 날아가 옷을 만들 때부터 그는 “네팔 사람들이 만드는, 네팔 사람들을 위한, 네팔의 브랜드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6년이 흐른 지금, 쥬네리는 그의 바람대로 ‘메이드 인 네팔’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성장했다.

차 대표의 전공은 한복이다. 한 생활한복 기업의 디자이너로 근무했고, 베스트셀러 디자인으로 인정도 받았다. 그러나 2004년 한국국제협력단(KOICA) 국제봉사단을 통해 낯선 나라 네팔의 여성들을 만났고, 인생항로가 바뀌었다.

“제가 담당한 봉사 프로그램은 ‘기초 봉제’였는데, 저는 그게 싫었어요. 기껏해야 배냇저고리 정도를 만드는 게 아니라, 바지, 재킷 등 팔 수 있는 옷을 만드는 기술을 배우라고 설득했죠. 그래야 취직도 하고 돈도 벌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당시 네팔 여성들은 그의 제안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카스트제도의 영향으로 ‘봉제기술’은 낮은 계급 사람들의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2년의 즐거운 봉사를 마치고 그는 중국으로 갔다. 외국 의류 브랜드의 중국지사에 근무하며 사업의 꿈을 키웠고, 4년 후 운명처럼 다시 네팔과 만났다.

“휴일에 중국의 의류 쇼핑몰에 갔는데 네팔의 상인들을 만났어요. 무게로 판매하는 마지막 떨이 옷을 사다가 네팔 여성들에게 팔 거라고 하더군요.”

참 기가 막혔다. 중국 여성과 체형이 달라 몸에 잘 맞지도 않을 텐데, 자국 브랜드의 옷이 없는 네팔 여성들은 선택권이 없었다. 그는 네팔 여성들을 위한 옷을 만들기로 했다. 2010년 또다시 네팔행 비행기에 오른 그의 수중엔 현금 3000만원과 옷 몇 벌이 전부였다. 하지만 두려움은 없었다. 마치 오랜만에 고향을 찾는 것 같은 그리움과 새로운 도전을 향한 설렘만이 있었을 뿐이다.


사회적기업을 선택한 까닭

네팔 중산층 여성을 겨냥해 문을 연 쥬네리 숍 전경과 내부.
“네팔 여성들을 위한 옷을 만든다고? 차라리 한국이나 미국으로 수출하는 옷을 만들면 어때?”

4년 전 카트만두의 의상실 점원에서 어느새 작은 봉제공장의 사장이 된 옛 친구의 반응은 무척 회의적이었다. 내수시장이 작고, 여성의 경제력도 낮고, 무엇보다 네팔 사람들은 ‘메이드 인 네팔’ 브랜드를 구매하지 않는다고 했다. 극구 말리는 그에게 차 대표는 “할 수 있다”며 오히려 동업을 제안했다. 기가 막힌 듯 한참 얼굴을 바라보던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결국 차 대표의 손을 잡았다.

2010년의 네팔은 4년 전과 크게 달라져 있었다.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여성들이 증가하면서 전통의상 대신 일반 옷에 대한 수요가 많았다. 시장은 이미 질 낮은 중국산 옷이 점령하고 있었지만, 좋은 디자인과 적절한 품질의 옷이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카트만두의 도심에 작은 숍을 열고, ‘쥬네리’ 간판도 달았다. 하지만 출발은 역시 순조롭지 않았다. 네팔 여성들의 마음을 잡을 디자인 개발에 무려 1년여 시간이 걸렸고, 예고도 없이 가게에서 쫓겨나는 일도 여러 번 겪었다.

판로를 확보하기 위해 제품을 들고 인근 도시의 쇼핑몰도 일일이 방문했다. 한국인이 만든 좋은 옷이라며 관심을 갖던 사람들은 쥬네리가 네팔 브랜드라는 사실을 알고선 모두 거절했다. 심지어 “당신이 한국인이니까 ‘메이드 인 코리아’로 해달라”거나 “네팔 브랜드일 리가 없다”며 “직접 공장을 방문해 (거짓말을) 확인하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는 “브랜드를 바꿔달라”거나 “차라리 레이블을 떼어달라”는 상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저 “일단 매장에 걸어두기만 해 달라”고 사정하고 설득했다.

우여곡절 사정도 많았지만 1년 6개월여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가 찾아왔다. 디자인과 품질에 대한 입소문이 나고, 방송국의 취재까지 이어지면서 쥬네리는 빠르게 자리를 잡아갔다.

그즈음 옛날 국제봉사단으로 왔을 때 만났던 여성들이 그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모두 ‘기술을 배워 취업을 하고 싶다’고 했다. 차 대표는 그들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휴무일인 토요일에 강좌를 열었고, 직접 공장으로 데려가 실무를 익히도록 했다. 교육이 끝난 후에는 자신의 공장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네팔에 있는 한국 및 국제 NGO들이 그의 조언을 듣기 위해 찾아왔다.

“많은 NGO의 실수는 원조(봉사) 이후를 생각하지 않는 겁니다. 지원이 끝나면 무료 교육이 유료가 되고, 배움을 지속할 수 없어요. 또 창업하라며 점포를 내주는데, 서비스와 마케팅을 모르니 대부분 금방 망해요. 원조가 끝난 후에도 프로그램이 자생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해요.”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직접 실험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2015년, 우연히 코이카와 함께 일하는재단이 진행하는 ‘지구촌 사회적기업 육성사업’을 알게 됐다. 그는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섰다.

2010년 판매 직원 1명과 동업자의 공장 식구 5명으로 시작한 쥬네리는 6년 만에 판매직원 3명, 공장 식구 11명으로 규모가 커졌다. 해외 OEM생산과 쥬네리 브랜드의 수출로 3배 이상 매출이 커졌고, 바이어의 주문도 해마다 증가하고 있었다. 사업 규모를 확대할 수 있는 단계로 접어든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의 선택은 사회적기업이었다.

그는 지원금으로 공장 위층에 교육장을 만들었다. 디자인반, 패턴반, 재단반, 봉제반으로 나누고, 수업과 동시에 제품을 생산할 수 있도록 커리큘럼을 구성했다. 교육시간에 생산한 제품의 판매 수익이 고스란히 교육에 재투자되도록 한 것이다. 제품의 판매는 쥬네리가 담당했다. 아래층 공장은 기존의 비즈니스를 하며 일자리를 창출하고, 위층의 교육장은 쥬네리와 협업하며 교육에 필요한 안정적 수익을 확보하는 이원적 구조 덕분에 외부의 지원이 끝난 지금도 무료 교육은 지속되고 있다.


교육을 넘어 지속가능 경제모델을 꿈꾸다

쥬네리 공장 교육센터에서 봉제수업을 받는 여성들.
“승민! 너 진짜였구나. 정말 돌아왔구나.”

지난해 네팔을 덮친 진도 7.8의 강진이 잦아진 몇 달 후, 그는 잠시 네팔을 떠났다. 딸 걱정에 잠 못 이루는 부모님을 위한 짧은 귀국 일정을 마치고, 서둘러 네팔로 돌아갔을 때 직원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그토록 험한 지진을 겪었으니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그날 이후 직원들은 그를 ‘디디(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나이 많은 직원들이 언니라고 부르는 게 불편했던 차 대표가 이유를 물었다. 직원들은 “존경의 의미”라고 수줍게 답해줬다.

차 대표는 카트만두 인근의 도시 트리슐리에서도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집집마다 한 대씩 갖고 있는 재봉틀을 모아 봉제센터를 열었는데, 소문을 듣고 찾아 온 사람이 무려 178명에 이른다. 그는 향후 트리슐리에 기념품 숍을 열 계획이다. 전 세계 트래커들이 목적지 포카라에 가기 전 들르는 곳이 바로 트리슐리다. 이곳에 기념품 숍을 열고 교육생이 만든 제품을 판매하면, 교육의 재투자뿐만 아니라 지역경제에도 보탬이 될 수 있다.

“저는 언젠가 네팔을 떠날 외국인이고, 쥬네리는 지금도, 앞으로도 직원들의 것입니다. 그때까지 봉제센터와 같은 취업교육 모델이 더 많은 소도시에서 자생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습니다. 5년 후엔 가능하지 않을까요?”

모든 것을 네팔에 돌려준 후의 행선지를 묻자, 그는 “한국, 네팔, 혹은 제3국일 수도 있다”고 답했다. ‘재능으로 누군가를 돕는 일을 할 곳은 많다’는 그의 5년 후가 정말 궁금하다.
  • 2016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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