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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실로 짜낸 ‘쓸모 있는 미술’

현대미술 작가 정원연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의 인구는 약 7000여 명. 청동기시대부터 이어져온 마을의 역사는 4000년 가까이 된다. 문경시 바로 아래쪽에 위치한 이 작은 마을은 ‘명주의 고장’이라고는 하나 우리나라 역사에서 단 한 번도 주목을 받은 적이 없다. 한 살 아기부터 백 살 넘는 노인까지 700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 함창의 살아 있는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 나왔다.
현대미술 작가 정원연(43) 씨가 펴낸 《함창_보이지 않는 이야기들》이다.

사진제공 : 정원연
캔버스 밖으로 나온 화가

정 작가는 이화여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스물셋이 되던 해에 독일로 떠났다. 베를린 미술대학에서 자유미술로 디플롬 학위를 받은 뒤 마이스터 슐러* 과정을 마쳤다. 미니멀리즘의 거장 카린 잔더(Karin Sander)가 그의 스승이다.

“베를린에서 10년을 보내고 나니 남의 나라말 쓰면서 비자 받아가며 사는 삶이 싫어졌어요. 우리말을 사용하고 비자 없이 살 수 있는 내 나라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정했죠. 외국인 작가로서 접근할 수 있는 소재에도 한계가 느껴졌고요. 무엇보다 그 나라 일이 내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어요.”

2006년에 기사의 제목과 상관없는 인물이 언론의 카메라를 직시하는 보도사진만을 모은 〈뜻밖의 시선〉으로 데뷔했다. 이후 동서독 출신의 작가 여섯 명과 함께 탁구대를 싣고 한반도의 휴전선을 서에서 동으로 횡단하는 퍼포먼스 〈핑퐁: 동-서-남-북〉, 서울의 재개발 지역에서 채집한 물건과 서울의 지도를 실로 연결하는 〈사람이 살던 자리에 남아 있는 것들〉 등 사회적 문제를 작품 속에 녹여내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모든 작업은 호기심에서 나온 질문으로 시작돼요. 나는 학교를 20년 동안이나 다녔는데 탈학교 아이들은 그 시간 동안 어디서 무얼 하는지, 나는 이런 이유로 결혼을 안 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왜 결혼을 안 했는지. 일부러 그런 사람들을 만난 게 아니에요. 작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사람이 사회 주변부에 있을 뿐이죠. 예술가의 습성은 권력이 제시하는 비전, 자본이 원하는 것이 아닌, 사회에서 배제된 주변부를 주목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작가적 호기심은 사회의 시선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로 향했다. 결혼하지 않는 사람들, 탈학교 아이들, 경계성인격장애를 가진 청년들, 노숙자, 비무장지대 마을 주민, 농촌 사람들 등을 만났다.

“몇 년 동안 죽도록 그림 그려 전시해봤자 한가한 사람 몇 명만 볼 뿐이고 그 몇 명이 사회를 변화시킬 사람도 아니죠. 아무리 예술의 본질이 무목적, 무가치라 해도 쓸모 있는 예술이란 무엇일지 고민하게 됐어요.”

2010년에 진행한 〈미술로 풀어보는 인생 이야기〉 프로젝트는 고민 해결의 단서가 됐다. 일반인 참가자와 함께 서사가 있는 현대미술을 보며 각자의 인생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업이었다.

“참가자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봤어요. 그때부터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어요.”


언젠가는 전설이 될 이야기들

〈백육십에 이백〉, 160×200㎝, 설치, 실, 2015. 제목인 ‘백육십에 이백’은 쪽방의 가로세로 길이다. 미아리 집창촌의 한 쪽방을 손수 짠 레이스로 둘렀다. 이곳에 살던 성매매 여성들이 가장 입고 싶어 했던 옷이 하얀 레이스가 달린 원피스였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
《함창_보이지 않는 이야기들》도 이와 같은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다.

마을미술추진위원회와 경북 상주시가 공동으로 주관한 마을 미술 프로젝트 〈2015 함창 예고을: 금상첨화(錦相添花)-비단이 협동해 예술이 되다〉의 초청을 받아 내려간 함창읍은 밝고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작은 마을이었다.

정 작가는 약 한 달 동안 함창읍에 머물며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했다. 아홉 살부터 여든 아홉 살까지 주민 40여 명을 만났다.

“함창에 내려가면서 구전되는 신화나 전설, 민담 같은 것을 모아서 기록하려고 했는데 요즘에는 그런 게 남아 있지 않았어요. 기본적으로 이야기가 전승되려면 오랜 시간 앉아서 손으로는 무언가를 하되 입은 자유로운 단순하고 반복적인 수공업이 살아 있어야 하거든요.”

함창은 누에를 키우고 명주를 짜고 비단을 만드는 마을로 유명했지만 지금은 그런 수공업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정 작가는 과거의 신화가 아닌 현재의 삶을 이야기로 담기로 했다.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언젠가는 이 고장의 신화나 전설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2015년의 이야기를 모아보기로 했죠.”


마을 주민 대부분은 함창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을 때 미담이나 위인 등 자랑거리를 늘어놓았다. 급사가 공장을 차지해 사장이 된 이야기, 형제간 재산 싸움, 바람난 식당 안주인 등 숨겨놓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기도 했다.

“작가라는 정체성으로 주민들에게 접근했을 때 가장 듣기 쉬운 이야기는 소위 말해 마을의 ‘자랑거리’죠. 만약 제가 비구니나 티켓 다방 아가씨로 마을에 가서 이야기를 들었다면 전혀 다른 내용이 됐을 거예요. 사람들의 이중적 태도를 통해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속으로 곪아 있는 이야기를 밖으로 꺼내 보이고 싶었어요.”

20여 일 동안 머물며 기록한 이야기는 40시간 분량. 녹취를 푸는 데 함창에서 머문 시간의 배 이상이 들었다. 지역 사투리와 입말로 구성된 이야기는 250여 쪽의 책이 되어 나왔다. 정 작가 자신이 출판사 등록도 했다. 국립도서관에 입고시키기 위해서다.

“《함창_보이지 않는 이야기들》은 과정 중심의 현대 미술에서 남길 수 있는 중요한 결과물이죠. 언제 어디에서 누군가의 손에 들려 읽힐지 모른다는 데에 의미가 있습니다.”

정 작가가 마을 곳곳을 찍은 사진들과 책은 갤러리 공간으로 사용되는 마을 목공소에 전시돼 있다. 찬찬히 마을의 기억을 들여다보고 싶은 사람은 앉아서 책을 읽어볼 수도 있다.


예술이라는 그릇에 담긴 우리 모습

한 주민이 《함창_보이지 않는 이야기들》에 실린 인터뷰 내용의 삭제를 요구해, 작가는 책의 일부분을 도려냈다.
커뮤니티 아트(공동체 예술)는 소수자의 발언을 사회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이야기를 통해 사람 사이의 끊어진 관계를 잇는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시골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대도시 안에서 배제된 성매매 노동자의 지워진 역사를 들춰낸다. 사회 속에 엄연히 존재하지만 부정되는 가치를 다양하게 보여주는 것이 예술가의 역할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재개발로 사라져버린 마을에도 삶이 있었고, 미아리 텍사스촌에도 빳빳하게 다린 교복을 입는 것이 꿈인 여성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어요. 우리 사회는 하나의 가치만을 중요하게 여기고 나머지는 외면해 버리죠. 그런 것들과 마주보는 작업을 통해서 곪은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정 작가는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고도 성장기 등 역사 속에 내재된 폭력성이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는 작업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트라우마의 족보Ⅰ: 이씨가 되고 싶었던 김씨를 중심으로〉가 그 작업의 일환이다. 한 가계를 중심으로 다년간 관찰한 기록이 응축된 작품이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다 보면 그 안에서 내 이야기를 발견하게 돼요. 개인뿐 아니라 사회가 외면하고 싶어 했던 기억, 감추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꺼내보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올해 계획 중인 작업은 ‘유전되지 못하는 질병’에 관련된 것이다. 사람들이 결혼을 안 해서, 또는 콘돔과 같은 피임 도구를 사용해서 대물림이 끊기는 것들에 대해 3040 세대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작업이다.

“사회에서 일어난 사건이 개인한테 어떤 영향을 미치고 개인의 트라우마가 어떻게 대물림되는지가 앞으로의 연구 과제예요. 감추고 싶어 하는 것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으면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 개인이 입은 상처는 치유될 수 없습니다.”

* 마이스터 슐러: 디플롬과 별도의 학위로 교수가 직접 제자로 인정하는 학위.
  • 2016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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