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r TILT’ 주영준 마스터

책 대신 술잔을 선택한 괴짜 바텐더

글 : 한정림 객원기자  / 사진 : 김선아 

대중화된 와인에 비해 아직은 낯선 싱글몰트위스키. 그만큼 관련 서적도 적다. 책으로 술을 배울 순 없겠지만 100종이 넘는 싱글몰트위스키의 세계에 무지몽매한 상태로 뛰어들 수는 없는 법. 입문서 정도는 읽고 시작하고 싶은 게 술꾼의 마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싱글몰트위스키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이라는 부제를 달고 세상에 나온 《위스키 대백과》(데이비드 워셔트 지음, 금요일)는 술꾼에게 있어 매우 반가운 책이다. 싱글몰트위스키의 역사, 향미 분류 등의 기본 개념부터 스코틀랜드에 있는 100여 곳의 증류소까지 방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게일어로 된 증류소와 싱글몰트위스키의 이름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 역시 쉽지 않았을 것이다. 역자는 원석 같은 원서를 갈고닦아 빛나는 보석 같은 번역서를 만들어냈다. 이토록 술에 대해 해박하고 게일어 지명까지 샅샅이 뒤진 성실한 번역자는 누굴까 궁금해졌다.
당신의 마음을 달래줄 술 한잔

《위스키 대백과》 를 번역한 사람은 신촌에서 4년째 ‘바 틸트(bar TILT)’를 운영하고 있는 바텐더 주영준(31)씨다. 술을 다루는 바텐더가 어떻게 번역까지 하게 됐을까.

“손님 중에 식음료에 관심 많은 출판편집자가 있었어요. 어느 날 그분이 위스키에 관한 책을 번역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해서 하게 됐어요.”

세상의 모든 바텐더가 위스키에 대해 정통하진 않을 것이다. 하물며 번역하는 바텐더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다. 출판편집자라는 그 손님이 함께 위스키 번역서를 내자고 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터. ‘바 틸트의 바텐더’ 이전의 주영준씨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사회학 이론의 대가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그래서 의대에 가라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문계 수능을 보고 연세대 사회학과에 들어갔죠. 좋아서 갔으니까 수업도 열심히 들었고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학점도 좋았어요. 대학원에서 공부할 당시 다음 순서는 당연히 유학이었죠.”

그렇다면 그의 연구 주제가 ‘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 이런 것이었을까. 술과 사회의 상관관계를 연구하다 술에 매료되어 바텐더라는 직업을 택하게 됐다는 그런 스토리가 아닐까.

“석사 논문 주제는 성소수자의 연애 패턴이었는데요. 친구의 커밍아웃이 계기가 됐죠. 친한 친구였는데 그 친구가 털어놓을 때까지 전혀 몰랐어요. 아주 오랜 시간을 함께했는데도 말이죠. 굳이 술과 연관된 것이라면 알코올중독자 자활에 관한 연구를 한 적이 있다는 정도일까요? 알코올중독자 그룹을 심층 인터뷰한 내용이었는데 평가가 좋았어요.”

글 쓰고 책 만드는 일을 좋아해 연세교지 편집위원회에서 편집위원으로 교지를 만들었다. 언젠가는 글 쓰는 일로 먹고살 거라는 막연한 믿음도 있었다. 번역서지만 책을 내고 잡지에 칼럼도 썼으니 잘못된 믿음은 아니었다. 남들보다 영어를 조금 더 잘해서 번역 아르바이트도 했다. 이런 그의 과거를 출판편집자는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주영준씨가 만들어낸 칵테일 잭 로즈. 아름다운 장밋빛을 띠며 애플 브랜디를 베이스로 하는 달콤한 맛의 칵테일이다.
바 틸트의 잭 로즈는 기본 레시피에 식용 장미와 허브를 가미했다.
그런데 열정적으로 공부에 매진하던 사회학도가 어느 날 갑자기 바의 주인장이 됐다. 이 급작스러운 전환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주영준씨가 바를 차리고 위스키 번역서까지 내게 된 것은 역시 그가 술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술을 좋아했다”고 말하는 그에게 그게 몇 살 때였는지는 묻지 않았다. 우리 모두 학창시절 술에 관한 말 못 할 추억 한두 개쯤은 갖고 있으니 말이다.

“석사 논문을 쓰면서 제 자신의 한계와 맞닥뜨렸어요. 유학 준비란 게 영어공부에서 시작해서 전력을 다해야 하는 일인데 많이 지쳐 있기도 했고요. 한 템포 쉬면서 장래에 대해 다시 고민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당시 바텐더 일을 배우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바의 주인이 가게를 인수해보지 않겠냐는 말을 던진 것이 방향키가 됐다.

“결과적으로 그 바를 인수하진 못했지만 나도 이런 작은 바를 해보면 어떨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죠.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한 학생들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바, 내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작은 바를 말이죠. 블루오션일 수도 있고 쫄딱 망할 수도 있는 위험한 도박이긴 했지만요.”

학원강사로 일하며 차곡차곡 돈을 모았다. 대학 시절부터 10년 가까이 지내온 신촌에 가게 자리도 확보했다. 최소한의 돈으로 직접 인테리어를 하고, 바의 무기가 될 술을 매입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문제는 부모님이었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부모님을 찾아갔어요. 저녁식사 자리에서 이야기를 꺼냈는데 예상을 뒤엎고 흔쾌히 허락하신 거예요. 나중에 들었는데 그날 밤에 두 분이서 대체 왜 그랬느냐며 엄청 후회하셨대요. 저는 그게 저녁 밥상에 곁들인 술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글 쓰는 바텐더로 살아가기


“바의 카운터 판은 아주 두껍고 무겁죠. 손님의 고독, 미움, 슬픔, 괴로움, 절망하는 영혼, 이렇게 너무나 무거운 마음을 단단히 지탱하기 위해섭니다.”

(만화 《바텐더》 중)


바텐더는 손님이 바 문을 열고 들어와 자리에 앉으면 손님의 그날 기분에 맞춰 술을 낸다. 마치 환자에게 의사가 약을 처방해주듯이 말이다. 이렇게 잔에 담긴 술은 손님의 마음을 달래주는 약술이 되기도 한다.

“술을 취급하는 업소 중에 바만큼 손님과의 거리가 가까운 곳은 없을 거예요. 손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죠. 그런 만큼 바텐더가 서 있는 카운터 너머의 이 자리는 굉장히 무거운 자리이기도 해요. 그나마 대학 시절 인터뷰를 많이 해본 덕분에 사람들 이야기 들어주는 일에 익숙해요. 잘하기도 하고요.”

술을 못하는 사람도 바 또는 바텐더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란 이런 걸 거다. 남한테 털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도 털어놓을 수 있는 곳, 편안한 이야기 상대.

손님들은 각기 다른 사연을 안고 바를 찾는다. 물론 그중에서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연애 이야기. 만화가 김보통씨는 바 틸트를 배경으로 손님과 바텐더의 이야기를 담은 한 컷 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서로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SNS상에서 이루어진 협업이었다는 것이다. SNS에 올라온 한 컷 만화를 보고 찾아오는 손님도 꽤 된다고 한다.

“번역할 때도 SNS는 큰 도움이 됐어요. 증류소 이름이나 위스키 이름 같은 고유명사는 게일어 사전에도 안 나오는 게 태반이거든요. SNS상에서 스코틀랜드에서 바를 운영하는 바텐더를 찾아내 정확한 발음이 어떻게 되냐고 물어봤죠. 구글 지도는 하도 들여다봐서 이젠 스코틀랜드 어디에 뭐가 있는지 다 외울 정도예요.”

만화가 김보통씨와 ‘바 틸트’ 마스터 주영준씨의 협업 작품. 서로 알지 못하는 상태로 SNS상에서 진행한 재미있는 작업이다.
ⓒ김보통 ⓒ주영준
《위스키 대백과》의 번역을 끝낸 지금 주영준씨는 새로운 책 작업에 들어갔다. 번역서가 아닌 칵테일을 주제로 한 자신만의 책이다.

“칵테일은 매력적인 주종이에요. 베이스로 들어가는 술은 모두 저렴한 공산품이지만 바텐더의 노력 여하에 따라 맛있는 술이 될 수 있거든요.”

인터뷰 중 주영준씨가 내놓은 잭 로즈라는 칵테일이 바로 그 예였다. 칼바도스에 레몬 주스, 그레나딘 시럽을 넣은 기본 레시피에 식용 장미와 허브를 가미해 그만의 잭 로즈를 만들어냈다.

“앞으로도 바텐더를 하면서 책도 쓰고 번역도 할 거예요. 돈을 좀 더 벌면 바 틸트와는 다른 분위기의 가게를 하나 더 내고 싶어요. 그리고 돈을 좀 많이 벌면 증류소를 만들 거예요. 그럼 좋아하는 술을 돈 걱정 안 하고 마음껏 즐길 수 있겠죠(웃음).”

마지막으로 ‘바 틸트’를 찾아가고픈 고민 많은 청춘을 위한 꿀 같은 팁 하나. 바의 문을 열고 들어가 카운터에 앉아 이렇게 말해보자.

“마스터, 네그로니 한 잔.”
  • 2015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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