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특별한 배우’ 하정우

차태현, “다시 태어난다면 하정우가 되고 싶다”

하정우는 걷는다. 많이 걷는다. 팔뚝에 만보기를 차고 하루 만 보는 거뜬히, 때로 오만 보까지도 걷는다. 동료 배우 차태현은 “그렇게 많이 먹으면서 살이 찌지 않는 건 아마 걷기 때문일 것”이라며 웃었다.
하정우는 촬영장에 올 때도 걸어서 오고, 약속 장소에도 걸어서 간다. 그의 발은 290mm다. 이 큰 발로 거리를 저벅저벅 걸으면서 그는 길 위의 풍경과 공기를 흡수한다. 그가 이렇게 축적한 에너지가 작품 안에서 어떻게 폭발하는지 우리는 보아서 안다.

사진제공 : 아티스트 컴퍼니, 롯데엔터테인먼트
하정우의 연기에는 안과 밖이 없다. 거리에서 촬영장 안으로 ‘훅’ 하고 들어오듯이, 영화에서 관객의 일상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다. 혹자는 ‘매력이 사람으로 태어나면 하정우’라고 말했다. ‘사람을 끌어, 당기는 힘’이 매력이라면 그가 그 힘을 가진 자임에는 틀림이 없다.

충무로는 2017년의 마지막과 2018년의 시작을 하정우와 함께했다. 그가 저승 차사로 등장한 〈신과 함께-죄와 벌〉이 천만의 관객을 모을 무렵, 그가 당직 검사로 출연한 〈1987〉이 개봉했다.

그보다 앞서, 언론배급시사회는 하루 사이로 열렸다. 이틀 연속 시사회 무대에 오른 그는 사뭇 긴장한 모습으로 “올림픽 결승을 두 번 치르는 기분”이라고 했다. 인터뷰 자리에서 다시 만난 그는 “우산 장수, 짚신 장수를 자식으로 둔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게 됐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두 자녀를 둔 어미가 그러하듯 한 시간 남짓의 이야기 속에서 하정우는 〈신과 함께〉와 〈1987〉을 유연하게 넘나들었다. 판타지와 실화극, 저승의 차사와 이승의 검사라는 커다란 차이도 하정우라는 하나의 캐릭터로 소실됐다.

하정우가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함께 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하나의 작품을 완성해간다. 〈신과 함께〉를 함께 한 김용화 감독은 〈국가대표〉에서 한 번 호흡을 맞춘 바 있다. 〈1987〉을 하게 된 계기도 배우 김윤석과 함께 한 술자리였다. 두 사람은 이미 〈추격자〉와 〈황해〉로 함께 험악한 시절을 보냈었다. 이 자리에 장준환 감독이 합류했고 그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믿음직했다.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들’과의 작업,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들


“김용화 감독님은 저에게 특별해요. 〈국가대표〉라는 작품이 저에게 주는 의미가 커요. 첫 상업영화 주연작이기도 한데, 당시만 해도 제가 연기하는 방식이 아주 엄격했어요. 그렇지 않은데 그런 척하는 걸 아주 민망해했죠. 감독님이 ‘앞으로 네가 하게 될 작품들은 다른 자세가 필요할 수 있다’고 알려주셨어요. 그때 배운 유연함이 아주 소중해요.”

하정우라는 배우가 현장에서 순발력과 즉흥성을 발휘하리라는 예상은 빗나간다. 그는 철저히 준비하는 배우였다. 감정이 올라오면 감사하지만, 그 감정이 오지 않더라도 준비된 연기를 할 수 있는 게 맞는다고 여겼다. 더구나 〈신과 함께〉는 CG로 이루어진 판타지다. 아무것도 없는 블루 스크린 앞에서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 분투해야 했다. 그 정도야 이미 〈더 테러 라이브〉, 〈터널〉 등에서 1인극을 해본 경험이 있기에 겁먹지는 않았다.

“면벽연기(벽을 보고 하는 연기)에는 나름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신과 함께〉가 1편과 2편을 동시에 촬영했다는 점이다. 하정우가 맡은 강림은 1편과 2편에서 감정의 파고가 크다. 1편에서 객관적인 중립자 역할을 취했던 저승 차사들의 사연은 2편에서 풀어진다. 그 때문에 같은 세트 안에서 서로 다른 두 개의 감정을 쏟아내야 하는 일들이 있었다.

“각오는 했지만 쉽지 않더라고요. 카메라도 초밀착으로 촬영했기 때문에 아주 가까이에 와 있었고요. 세팅된 공간이라 제약이 많았는데 그 안에서 감정도 제대로 보여줘야 했거든요. 아마 그런 스트레스 때문에 〈신과 함께〉 현장에서 더 많이 먹었는지도 몰라요. 영화를 보면 제 얼굴이 갈수록 통통해지더라고요. 언제 찍었는지 알 정도로요.(웃음)”


기술적인 이유로 여러 번 촬영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는 마음을 다잡았다. 현장에서 배우의 컨디션이 미치는 영향은 크다. 그도 배우만 할 때는 몰랐다. 하지만 감독을 해보고 나니, 모니터 안에 배우의 감정과 상태가 다 담긴다는 걸 알았다.

“그 전에는 몰랐어요. 티가 안 나는 줄 알았거든요. 근데 제가 모니터 앞에 있어보니까, ‘아 좀 짜증이 났구나’, ‘지금 하기 싫구나’ 그런 게 다 보이더라고요. 그걸 알고 나서는 배우 하정우도 달라졌죠.(일동 웃음)”

그 전에 비해 달라진 건 또 있다. 전보다 좀 더 조용해졌다고 한다. 전에는 늘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이야기하는 사람들과 웃고 떠드는 걸 즐겼는데, 지금은 ‘말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말의 중요성과 영향력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닌데 잘못 전달되거나, 다르게 흘러가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그런 일을 방지하려면 조심할 수밖에는 없다는 생각이 들죠. 하지만 한편으로는 슬퍼요. 점점 재미없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아서요. 전에는 입만 열면 빵빵 터졌는데, 점점 타율이 낮아지고 있어요.”


쉬지 않고 즐겁기


이전의 인터뷰를 복기해보면, 하정우와 함께 하는 현장의 즐거움에 관해 증언한 기록이 꽤 있다. 〈암살〉 촬영 당시 전지현은 ‘하정우를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서’ 곤란했다고 했다. 차태현은 ‘다시 태어난다면 하정우가 되고 싶다’고 할 정도로, 그가 가진 에너지와 유쾌함에 찬사를 표했다. 그 에너지는 인터뷰 현장에서도 고스란했다. 같은 질문, 비슷한 이야기라도 다른 측면, 새로운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다. 다음은 ‘걷기’에 매료된 이유를 묻는 과정에서 나눈 이야기다.

“촬영을 마치고 혼자 하와이에 여행을 간 적이 있어요. 여러 계획이 많았는데, 가자마자 아파서 앓아누웠어요. 여행지에 혼자 있는데 아프니까 정말 고통스럽더라고요. 당장 내일이라도 한국에 가야겠다 생각했는데, 막상 올 생각을 하니까 ‘나 하와이 가니까 한동안 찾지 마’라고 말해둔 게 생각이 나는 거예요. 어떻게든 그 시간은 채워야겠다고 생각하고 버텼죠. 온종일 벤치에 앉아 있기도 하고요. 그때 느꼈어요. ‘아, 내가 정말 쉬는 법을 모르는구나. 혼자서 잘 쉬는 법을 배워야겠다’고요.”

하와이에서도 줄곧 걸어 다녔다. 그는 어디에서든 걷고, 사람들을 만나는데 그게 자신이 소진되지 않고 계속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비결인 것 같다고 했다. 안과 밖의 경계를 두지 않는 것, 자신을 외부로부터 격리하지 않는 것 등이다.

“〈577 프로젝트〉로 국토 횡단을 했을 때 하고 나면 정말 섬광처럼 무언가를 깨달을 줄 알았어요. 마치고 났는데 허망할 정도로 아무것도 남는 게 없는 거예요. 그 느낌이 너무 싫어서 혼자 서울로 올라왔어요.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알겠더라고요. 그때 느꼈던 일들과 얻은 것들이오.”


그 때문에 그는 지금도 마음 맞는 사람들과 모여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걸 좋아한다. 〈1987〉에서 그는 배우 김윤석과 함께 촬영하는 신을 기대하며 기다렸다. 〈황해〉 이후 7년, 그 시간이 서로에게 남긴 흔적을 알고 싶었다. 하정우, 김윤석, 나홍진 감독은 가장 뜨거웠던 시절 만나 가장 치열한 작품을 함께 한 사이다. 김윤석과 촬영하는 날에 하정우는 기념사진도 한 장 남겼다. 그 안에는 세트장 안에서 편안하게 웃고 있는 김윤석과 하정우가 있었다.

“현장에서 여전히 잘 맞더라고요. 주고받는 호흡이 편안했어요. 촬영 마치고 기분이 좋아서 한남동에 있는 황태집에 갔어요. 윤석이 형이랑 제가 술버릇이 비슷해요. 술을 정말 빨리 마시거든요. 안주 나오기도 전에 다 마시고 일어나요.(일동 폭소)”

〈1987〉의 최 검사에게는 하정우의 냄새가 난다. 박처장 김윤석을 위시로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경찰 간부와는 달리 느물느물하고 능청스럽다. “위에서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는 협박에도 “그럼 앞으로 소주 마시면서 살지 뭐”라며 술병을 던질 정도로 배짱도 있다. 그는 〈1987〉의 가장 첫 주자로 등장해 유연하게 바통을 다음 주자에게 넘기고 유유히 사라진다.

“이 일을 실제로 겪으신 분들에게 누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럴 수만 있다면 이 작품이 가진 의미가 훼손되지 않으리라 믿었습니다.”

이들의 바람대로 〈1987〉 역시 〈신과 함께〉와 함께 흥행 돌풍을 이어가며 순항 중이다. 하정우와 하정우의 대결이 ‘하정우의 승리’로 마치는 순간이다.
  • 2018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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