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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키고 싶은 순수의 시대

〈유리정원〉의 문근영

‘또르르…’, 눈물이 난다는 뜻의 신조어다. 문근영을 만나면 이미 이 말을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열세 살이던 〈가을동화〉 시절부터, 문근영이 울면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 있었다. 눈 안에 샘이라도 있는 듯 가득 고인 뒤에야 흘러넘친다. 눈물의 결정체를 현미경으로 보면 ‘순도 100%’라고 나올 법한 울음이다. 〈유리정원〉은 문근영의 순도 100%가 담긴 영화다.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진짜’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진제공 : 리틀빅픽쳐스
깨지 않고 싶은 꿈이 있다. 문근영에게 〈유리정원〉은 그런 영화다. 〈유리정원〉의 재연에게 숲이 안식처라면, 문근영에게는 이 영화가 그렇다. 1999년, 열두 살에 연기자가 된 그가 이제 서른이 됐다. 마음의 북소리를 따라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러지 못한 순간들도 많았다. 〈유리정원〉은 길을 잃은 것 같던 그가 다시 마음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인 작품이다.

막상 영화를 찍은 건 두 해 전이다. 영화를 찍고 ‘재연’의 여운을 누릴 새도 없이 공연을 시작했다. 셰익스피어의 고전을 무대에 올린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다. 명멸하는 사랑의 주인공으로 한 시절을 살려 했는데, 급성구획증후군이 찾아와 공연이 중단됐다. 무대에 오르지 못하고 병실에서 지내던 시간, 네 차례의 수술로 건강해진 그는 다시 재연을 만났다. 2년의 편집 과정을 거쳐 〈유리정원〉이 이제 막 세상으로 나오려던 참이었다.


아름답고 잔인한, 순수의 시대


〈유리정원〉은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됐다. 재연은 나무에서 태어난 아이다. 나무처럼 우뚝하고 청청해서 쉽사리 주변에 마음을 열지 못하는 아이다. 반면 한번 마음을 열면, 쏟아져 내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아이이기도 하다. 〈유리정원〉은 한 ‘순수의 시대’가 어떻게 파국을 맞게 되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시대는 문근영의 눈 안에 담긴다. 재연은 순수과학을 하는 과학도다. ‘순수과학’, ‘순수예술’. 이 순수는 때로 사람들을 부담스럽게 만든다. 순수함은 지키기 까다롭고, 그 가치를 증명하려면 기다림이 필요하다. 나무에서 태어나 나무와 자란 재연은, ‘인간도 광합성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가 발견한 건 엽록소 안에 든 생명의 기운이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은 떨떠름하다. 그 지난한 과정을 겪느니, 재연이 발견한 엽록소로 피부 재생 화장품을 만드는 편이 훨씬 세련되고 손쉽다고 본다. 생명은 멀고, 피부는 가깝다. 상처 입은 재연은 숲으로 자신을 숨긴다. 그 안에서 숨을 고르고 다시 살아갈 힘을 충전한다.

“책(시나리오)을 처음 봤을 때부터 재연이 좋았어요. 재연이를 다른 사람에게 보내고 싶지 않았죠. 정확히 뭐가 어떻게 좋았는지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저와 다르면서도 닮은 면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유리정원〉은 〈마돈나〉, 〈명왕성〉 등을 만든 신수원 감독의 작품이다. 두 사람은 영화를 찍는 내내 ‘말이 잘 통했다’고 했다. 서늘함 안에 숨겨진 따스함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공유한 단 하나의 바람은 ‘재연이 미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는데, 유리정원에 숨어든 재연은 겉으로는 ‘자연인’이지만 그 이면에 광기를 삼키고 있기 때문이다.

“재연은 믿었던 모든 것으로부터 배신을 당해요. 숲은 유일하게 재연을 배신하지 않는 곳이죠. ‘나무들은 가지를 뻗을 때 서로 상처 주지 않으려고 다른 방향으로 자란다’는 말이 참 마음이 아팠어요. 유리정원은 말 그대로 ‘유리로 된’ 정원이잖아요. 숨었다고 생각하지만 밖에서는 안이 다 보이죠. 사실 속으로는 누군가 와서 꺼내주기를 바랐을 수도 있고요.”


문근영의 유리정원


밖에서는 안이 다 보이는 ‘유리벽’ 안의 삶은, 문근영이 살아온 삶과도 닮았다. 그는 끊임없이 매스컴을 통해 노출되는 직업을 가졌고, 그 모습을 바탕으로 판단되는 삶을 살았다. 자신에게 주어진 찬사와 굴레를 동시에 극복해야 하는 운명이었다. 한때는 대한민국을 들었다 놓은 ‘국민 여동생’이었지만, 곧 그 이름은 그가 극복해야 할 숙제가 됐다.

2008년 스물하나에 드라마 〈바람의 화원〉으로 SBS 연기대상을 받은 그는 감격하기에 앞서 먼저 눈물을 쏟았다.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죄송하고 무서운 마음이 더 큽니다. 앞으로 연기를 계속 하고 싶은데 이 상이 큰 짐이 될 것 같습니다. 너무 행복한 시간이지만 오늘 밤까지만 기억하고 내일부터는 더 새로운 마음으로 연기하는 배우가 되겠습니다”라고 말한 그의 수상소감은 지금도 회자된다.

실제로 문근영은 이후 다양한 장르의 드라마에 도전한다. 신데렐라가 아닌 그의 언니의 시각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한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 원수연 작가 원작의 만화를 드라마화한 〈매리는 외박중〉, 사극 〈불의 여신 정이〉와 미스터리 드라마 〈마을 : 아치아라의 비밀〉까지 오면 그의 필모그래피 안에서는 공통점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항상 내가 ‘진심으로 연기하고 있나’를 되돌아봤어요. 그 부분에 의심이 가기 시작하면 너무 괴롭더라고요. 현장의 상황이나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그러지 못할 때가 있는데, 그러면 그 상황에 수긍해서 되는 만큼 할 때도 있어요. 그러고 나면 너무 괴로운 거예요. 진심으로 연기하지 않아도, 연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게 무섭기도 하고요.”

〈유리정원〉은 문근영에게 다시 한번 ‘진심으로 연기할 수 있는 힘’을 발견하게 해준 고마운 작품이다. 적어도 이 안에서 그는 ‘재연’이 되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재연으로 살 수 있었다. 숲에 들어가서 나무와 함께 숨 쉬는 모든 순간이 평온했다. 처음으로 나무 아닌 다른 존재에게 마음을 연 수줍음과 그 존재에게 버림받은 애달픔이 숲의 낮과 밤처럼 공존했다.


나무처럼 우직하게, 한결같이

문근영은 가끔 서늘함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그가 찾는 숲이 있다. 그건 그의 어머니이기도 하고, 그의 사무실이기도 하다. 그가 데뷔 시절부터 함께한 어머니와 소속 회사는 그의 든든한 울타리이자 오랜 동지들이다. 특히 소속사 ‘나무액터스’는 그가 직접 이름을 지었을 정도로 대표를 비롯해 모든 식구와 돈독한 사이다.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잖아요. 특히 연예계는 그 속도가 더 빠른 것 같아요. 그런 세상에서 누군가는 자리를 잡고 큰 아름드리나무처럼 사람들을 보듬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나무’가 어떠냐고 의견을 냈죠.”

그의 의견이 채택되어, ‘나무액터스’는 많은 배우의 쉼터이자 울타리가 됐다. 그리고 회사의 창립 멤버이자, 김종도 대표의 오랜 동지인 배우 김주혁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문근영은 창백한 얼굴로 그의 장례식과 발인 절차에 함께했다. 김주혁은 김종도 대표에게 ‘친동생 이상의 동생’이었고, 문근영에게는 ‘친오빠 이상의 오빠’였다. 그런 동지를 잃은 문근영의 눈에는 샘이 터진 듯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흔들림 없이 꿋꿋하게 김주혁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는 문근영의 모습은, 그가 더는 보호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의 마지막을 지켜줄 수 있는 든든한 나무가 되어가고 있는 표시 같았다. 변영주 감독은 〈유리정원〉을 보고 “앞으로도 문근영이라는 배우의 성숙한 모습과 신비로운 순간순간을 한국 영화에서 자주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유리정원〉은 ‘여동생’이던 문근영이 한국 영화의 단단한 뿌리가 되어가고 있음을 확인하기에 충분한 영화다.
  • 2017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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