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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슬의 커피코피해피 (마지막회)

아낌없이 주는 탱자나무

글 : 강이슬 

ⓒ gettyimages
어릴 적 할머니 집 대문 바깥에는 아름드리 탱자나무가 서 있었다. 할머니는 탱자나무에 보석처럼 박힌 흰 꽃으로 봄을 실감했다. 뒷짐을 지고 탱자나무를 올려다보던 할머니 옆에서 나도 눈을 가늘게 뜨고 괜히 할머니의 말투를 따라 했다. “참말 봄이구먼.”

탱자나무에서 나는 모든 것은 나와 사촌들의 훌륭한 놀이도구였다. 초록 잎을 찧어 소꿉놀이를 하고, 가시 박힌 녹색 가지를 툭 꺾어 칼싸움을 했다. 어느 여름, 할머니 집에 맡겨진 날, 홀로 탱자나무 그늘에 쪼그려 앉아 조금 심심해하며 이파리를 찧고 있었는데 어깨 위로 뭐가 뚝 떨어졌다. 내 손가락보다 훨씬 굵은 호랑나비 애벌레였다.

시골에서 자라 온갖 벌레에 거부감이 없었던 나에겐 만화영화에서나 볼 법한 비주얼의 애벌레를 발견한 것이 큰 자랑이었다. 그것을 플라스틱 통에 담아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마주치는 모든 또래 애들을 붙잡고 “이거 우리 할머니 집 나무 위에 엄청 많다”고 자랑했다. 동네 순회공연을 마치고 할머니 집에 돌아왔더니 퇴근한 아빠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엔 너무 길게 느껴졌던 하루가 금세 간 것이 연두색 애벌레와 그걸 선물해준 탱자나무 덕인 것 같아 나는 아빠의 도움을 받아 애벌레를 탱자나무 이파리에 얌전히 올려두고 나무줄기에 꾸벅 인사했다.


계절을 알리는 탱자나무

가을에는 주먹만 한 샛노란 탱자가 주렁주렁 열렸다. 꼭 황금이 열리는 나무 같았다. 할아버지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잘 익은 탱자를 거둬 오는 날엔 온 집 안이 상큼한 향기로 진동했다. 그즈음엔 집 안 어린이들에게 즐거운 벌이 내려졌다. 말짓을 하면 식구들 보는 앞에서 탱자 한 조각을 먹는 것이었다. 탱자를 콱 깨무는 순간 극단적으로 쓰고 신 맛이 콧구멍과 입 안에 확 퍼지면서 순식간에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변했다.

누군가 벌을 받을 때면 온 가족이 모여 그 모습을 배를 잡고 웃으며 놀렸다. 어린이들은 할머니와 가족을 웃기고 싶어 자신이 저지른 죄를 할머니 앞에 순순히 고했다. 잘못이 없을 땐 만들어서라도 벌을 받았다. 할머니가 엄숙한 얼굴로 건네는 노란 탱자를 받을 땐 가족 앞에서 재롱(?)부릴 생각에 비실비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아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할머니도 눈에 빤히 보이는 손주들이 귀여워서 일부러 더 엄한 표정을 지었던 것 같다.


가족의 추억이 곳곳에

아빠는 탱자나무를 의리 있는 친구로 여겼다. 둘의 우정은 스물둘이었던 아빠가 결혼 허락을 얻기 위해 엄마 집에 갔을 때 시작됐다. 할머니는 “남자란 자고로 배통이 커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고 할아버지는 “남자란 자고로 술통이 커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다행히 아빠는 ‘배통’에서도, ‘술통’에서도 어디 가서 진 적 없는 남자였다.

엄마 집에는 과연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많은 음식이 차려져 있었지만 아빠는 의연했다. 할머니가 밥그릇을 꺼내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빠 말에 의하면 냉면 사발에 밥이 한 고봉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할머니는 “국그릇이었네, 이 사람아” 하고 정정하긴 했지만 어쨌든.) 간신히 한 그릇 비우면 할머니는 “자네 모자라나?” 하며 한 고봉을 더 채워줬고, 좀 미적거리면 “남자가 밥통이 작아서 어디다 쓰나” 하며 작은 소리로 혀를 찼다고 한다.

고봉밥 세 그릇을 간신히 웃는 낯으로 비운 아빠는 잠시 바람을 쐬고 오겠다며 나가 탱자나무 아래 모든 것을 게워 냈다. 집으로 돌아오니 밥상이 거둬진 자리에 술상이 그득 차려져 있었고 할아버지의 ‘술통’ 시험이 시작됐다. 그날 아빠는 탱자나무를 껴안고 울면서 토했다고 한다. 그 요란을 어떻게 안 들켰냐고 물어보니 아빠가 토할 때마다 탱자나무가 가지를 흔들었다고, 그 소리 덕에 들키지 않았다고 했다.

내가 탱자나무에서 떨어지는 퉁퉁한 애벌레를 징그러워하게 됐을 무렵, 할머니 집 옆에 빌라 한 채가 들어오면서 나무가 잘려 나갔다. 그 소식을 듣고 할머니 집에 갔더니 정말 아름드리 푸른 나무가 있던 자리에 나이테가 드러난 낮은 나무줄기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아빠랑 나는 감히 그곳에 앉지도 못하고 괜히 이파리 우거졌던, 이제는 허공뿐인 맨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글쓴이 강이슬은 〈SNL 코리아〉 〈인생술집〉 〈놀라운 토요일〉 등의 TV 프로그램에서 방송작가로 일했다.
제6회 카카오 브런치북 프로젝트 대상을 수상했으며, 《안 느끼한 산문집》 《새드엔딩은 없다》 《미래를 구하러 온 초보인간》을 펴냈다.
  • 2022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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