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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희의 속 깊은 인터뷰

피아니스트 임동혁 ②

아픔을 직시하는 음악가가 된다는 것

임동혁
퀸 엘리자베트·쇼팽·차이코프스키 등 세계 3대 콩쿠르를 석권한 피아니스트. ‘피아노의 여제’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추천으로 최연소로 클래식의 명가 EMI에서 발표한 데뷔 음반은 ‘황금디아파종상’을 수상했다. ‘쇼팽 스페셜리스트’로 불리며 데뷔 20주년을 맞았다.

장소협찬 : 오드 메종(@ode.seoul, 010-4057-4091)
데뷔 20년 동안 얻은 것과 잃은 것이 있다면요.

“삶의 지혜를 얻고 건강을 잃었어요. 건강을 잃었다는 건 비단 신체적 건강만 의미하지는 않아요. 마음의 건강까지 포함해요. 나이 들수록 아픔에 취약하고 아픔을 더 많이 느끼면서 피폐해지기 쉬워요. 만약 내 자식이 있다면 나와 같은 길을 안 걸었으면 해요. 이 길이 그렇게 건강한 길이 아니거든요.”


음악적으로는요?

“아무래도 음악에 대한 열정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한동안 열정이 좀 식었거든요. 노는 게 너무 좋았어요. 친구들과 만나서 술 마시고 얘기하는 시간들. 지금은 음악이 더 절박하고 절실해졌어요. 그만큼 음악이 아주 소중하고요. 과정 하나하나의 퀄리티를 훨씬 더 신경 쓰고 많이 고민해요. 예전에는 감성이 강한 연주를 했다면, 지금은 이성이 더 들어간 연주를 하려 해요. 잃은 것이라면 음악적으로 충실하지 못했던 시간들이 있었는데, 그때의 시간이 아쉬워요.”


연습은 매일 합니까?

“그렇진 않아요. 공연이 잡히면 매일 하지만. 그런데 요즘엔 음악을 사랑하게 돼서 연습을 매일 하려 해요. 예전에는 연습이 너무 싫었어요. 엄마가 너무 억지로 시키셔서 심리적 트라우마가 있었어요. 그것 때문에 한동안 연습을 멀리하기도 했고요.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돼서야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게 됐어요. 제가 강아지를 키우다 보니 유년기 때의 경험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걸 알겠더군요. 제때 사회화가 되지 않으면 커서 문제를 일으킬 확률이 높다는 거죠. 마찬가지예요. 저 역시 유년기에 학대에 가까운 혹독한 연습량을 소화하다 보니 피아노에 트라우마까지 생겼던 거예요.”


학대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심적으로 힘들었군요.
깊은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뭐였나요.


“극복하기까지 오래 걸렸어요. 시간이 약이에요. 한때는 피아노를 뭔가를 이루기 위한 도구로 봤어요. 콩쿠르에 입상하기 위한 도구 식으로요. 30대 중반이 되니까 삶의 일부라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됐어요. 마치 쌀밥이 맛있어서가 아니라 습관처럼 먹듯, 일어나서 양치하고 세수하듯 그렇게요. 이렇게 되기까지 시간이 좀 오래 걸렸어요. 조금 늦은 것 같기도 해요. 연습을 진짜 안 했던 시기가 있었거든요. 1년에 100시간도 채 안 했던. 그런데 워낙 10대 때 훈련받은 게 있어서 테크닉은 쉽게 사라지지 않더라고요.”


대화하다 보니 어떤 면에서는 해탈한 듯, 경지를 넘어선 것처럼 보입니다.

“그 과정으로 가고 있어요. 법륜 스님의 즉물즉설 같은 콘텐츠도 많이 보면서. 저는 행복해지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이에요. 예전에는 나이키 신발, 삼성 애니콜 휴대폰만 사도 행복했는데, 이젠 그런 시기가 지났잖아요. 행복도 배워야 해요.”


어떤 곡이든 감성을 살려서 노래하듯 연주하지요.
섬세한 감성의 뿌리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재능이라고 봐야 할 것 같아요. 피아니스트에게는 두 가지 재능이 요구돼요. 소프트웨어적으로는 ‘소울’, 하드웨어적으로는 ‘테크닉’, 소위 손이 얼마나 잘 돌아가느냐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음악은 이 두 가지만으로는 완성되지 않아요. 만약 두 가지가 전부라고 한다면 집시들이 가장 잘할 거예요. 집시들 얼마나 감성적인가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철철 넘쳐흐르죠. 그렇게 해서는 좋은 음악을 할 수 없어요.”


그러면 좋은 음악이란 어떤 겁니까.

“음악은 학문이에요. 저는 물리·화학·수학·천문학 같은 학문을 하는 학자예요. 그런데 학자이면서 감정도 담아야 하고, 테크닉적으로 손가락도 잘 돌아가야 해요. 그래서 좋은 음악가의 길이 어려운 거예요. 세 가지 요소를 다 갖춰야 하거든요. 어릴 때는 감정과 테크닉만 있어도 가능해요. 용서가 돼요. 하지만 마흔 살이 돼서도 똑같은 음악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공부는 노력으로 채울 수 있지만 감성과 테크닉은 퇴화할 수밖에 없을 텐데요.

“나이 들면서 퇴화하는 건 자연의 섭리죠. 저는 아직 그럴 나이는 아니에요. 다만 10대 때처럼 테크닉이 화려한 라흐마니노프 곡이나 〈라 캄파넬라〉 같은 곡을 겁 없이 칠 수 있는 시기는 지났다는 거죠. 감성은 퇴화되지 않아요. 정제돼요. 훨씬 더 섬세한 음악을 할 수 있게 돼요.”


연주할 때 얼굴 근육의 움직임이 워낙 풍부하죠.
팬들은 ‘도토리를 잃어버린 다람쥐’라는 별명을 달아줬고요.
그 고양된 순간에 어떤 감정을 느낍니까.


“아주 행복하죠. 카타르시스, 오르가슴 같은 중독성 강한 느낌. 감정이 고양되면서 이 음악적 세계를 내가 다 장악하고 있는 것 같아요. 아주 슬프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이 세상의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다 느껴지죠. 그 감정을 못 잊어서 계속 연주하는 거예요.”


20주년 전국투어 연주곡으로 선택한 슈베르트 후기 소나타 얘기를 해볼게요. 평소 슈베르트에 대해 “나에게 가장 잘 맞는 옷”이라고 표현했는데요. 그럼 연습량이 좀 적어도 본인이 만족할 만한 수준의 연주가 나오나요?

“슈베르트는 그렇지 않아요. 쇼팽은 그럴 수도 있지만. 슈베르트 소나타는 곡이 워낙 커서 구조가 굉장히 중요해요. 웅장하고 으리으리한 건축물 같거든요. 한 곡이 40분짜리 4악장으로 구성돼 있어요. 이 곡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를 치밀하게 고민하고 연구해야 해요. 어느 부분이 기반이 되고, 뼈대가 될지, 또 어떤 부분이 오르나멘트(장식)가 될지를 철저하게 구상하는 거예요. 슈베르트 곡을 연주하려면 제어하고 절제하는 연습을 방구석에서 끊임없이 해야 해요. 무대 위에서는 맥박이 빨라져서 절제하기 쉽지 않거든요. 어느 곡이든 마찬가지겠지만 슈베르트 음악은 특히 과잉된 감정이 금물이에요. 쇼팽 곡의 경우 상황에 따라 과잉된 감정도 허용되지만, 슈베르트 곡은 감정이 앞서면 음악이 천박해져요. 대곡을 연주할 때는 그만큼 음악적 소양과 교양이 중요해요. 사실 어느 곡이나 마찬가지죠. 제가 보여드릴게요.”


그는 벌떡 일어나더니 스타인웨이 피아노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특유의 표정과 함께 시작되는 연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이었다. 처음 연주는 ‘쿵쾅쿵쾅’ 귀가 좀 따가웠다.

“이건 좀 산티 나잖아요. 다른 곡도 마찬가지예요.”

이어지는 연주는 임동혁의 레전드로 불리는 베토벤 소나타 〈월광〉. 그는 잠시 여기가 어디인지, 본인이 무엇을 하던 중인지를 잊어버린 듯 연주에 몰입했다. 건반의 합주는 선율이 되어 노래처럼 흘렀다. 좌중에서 “와~” 하는 탄식이 터져나왔다. 나도 나지막이 읊조렸다. ‘이 곡을 여기에서 듣게 되다니.’ 연주를 멈춘 임동혁이 말을 이었다.

“비교가 되죠? 힘을 빡, 줘서 치는 것과 이렇게 치는 것, 뭐가 더 음악적이에요? 이게 더 음악적이잖아요. 절제할 줄 알아야 해요.”



절제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군요.

“뭔가를 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하지 않는 것도 중요해요. 저는 정통 클래식에 진심인 삶을 살려 합니다. 이 음악에만 헌신하려면 딴 길을 기웃거리면 안 돼요. 설령 다른 분야의 음악과 협업하면 100배 더 유명해질 수 있다고 해도 저는 그 길을 가지 않을 거예요. 이 길이 맞고, 저는 잘 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고, 그만큼 열정도 있어요. 얼마나 아름다워요? 제가 좋아하는 고귀한 음악을 할 수 있다는 게.”


감성이 올라와도 이성으로 제어할 필요가 있겠군요.

“그건 좀 다른 문제에요. 감성은 볼륨 조절하듯 자의적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음악적으로 쌓인 지식과 교양이 충분하면 고귀하고 정제된 감정이 올라오게 돼 있어요.”


쇼팽과 슈베르트 중 누구와 더 음악적 일체감을 느낍니까.

“쇼팽을 더 많이 닮긴 했어요. 슈베르트는 인간적인 면이 닮은 것 같고, 동경하는 음악가입니다. 베토벤도 되게 동경해요. 그런데 베토벤 연주를 많이 안 하는 건 제가 연주하는 베토벤과 제가 생각하는 베토벤에 간극이 있기 때문이에요. 지향하는 베토벤 음악을 구현하려면 내 자신이 아닌 것처럼 연주해야 해서 조련이 많이 필요합니다. 쇼팽이나 슈베르트는 닮은 점이 많아서 비교적 편안하게 연주할 수 있고요.”


슈베르트 연주는 스스로 원하는 수준에 어느 정도 도달했나요?

“많이 도달했어요.”


성장할 여지가 더 남아 있다는 뜻인지요.

“성장이라기보다 바뀔 여지가 더 남았죠. 성장과 변화는 다른 거예요. 성장에는 긍정·부정의 의미가 내포돼 있지만 바뀌었다는 건 그런 가치 판단이 거세된 거죠. 그저 바뀐 거예요. 어떤 면에서는 제가 10대 때 더 잘 친 연주도 있거든요. 앞으로 바뀔 여지는 충분히 있어요.”


나이 든다는 건 각자가 겪어낸 삶의 편린들이 세포에 조각조각 새겨지는 과정인지 모른다. 음악가에게 그 편린들은 자신의 음악 세계를 변주하고 성장시키는 질료가 되곤 한다. 임동혁에게는 유독 아픔과 슬픔의 편린이 많았다. 그 스스로는 지독히 고통스러웠겠지만 회피하거나 돌아가지 않고 직면하는 시간들은 그에게 음악가로서 깊이를 더하는 쓴 약이 되어줬다. 그 깊이가 시간과 함께 쌓이면 얼마나 더 농축된 연주를 하게 되는 걸까. 연주자로서 ‘최연소’라는 타이틀을 주렁주렁 달고 다녔던 그가 먼 훗날 ‘최고령’이라는 수식어를 갖게 되길 기대해본다.

임동혁의 데뷔 20주년 콘서트는 광주 남한산성아트홀(5월 12일),
울산 현대예술관(5월 13일), 서울 예술의전당(5월 24일),
아트센터인천(6월 1일)에서 이어진다.
  • 2022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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