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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슬의 커피코피해피 #24

아빠와 비닐장갑

글 : 강이슬 

일회용 비닐장갑에도 보온 기능이 있을까? 맨손으로 눈사람을 만드는 것보다는 일회용 비닐장갑을 끼는 편이 그래도 덜 추울까? 이과인 친구에게 물어봤더니 걔는 내가 장난을 친다고 생각했는지 “차라리 눈사람도 사람이 될 수 있는지 물어보지 그러느냐”고 핀잔했다. 나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우리 아빠가 비닐장갑을 끼면 정말 덜 춥댔어.”

아빠를 증인으로 내세우자 친구는 좀 전보다 성의 있는 표정으로 골똘하더니 “글쎄, 아무래도 끼는 편이 덜 춥긴 하려나?” 하고 되물었다.


썰매 타러 간다며 공원에서 귤박스?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린 겨울이었다. TV에서는 겨울 레저를 즐기기 딱 좋은 날씨라며 스키장과 눈썰매장 풍경을 시도 때도 없이 보여줬다. TV 속 작은 사람들이 눈밭에서 구르고 미끄러지는 게 즐거워 보였다. 아무도 추워 보이지 않아서 화면에 가득 찬 저 설경이 실은 솜으로 빚은 가짜 눈은 아닐까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나는 아빠가 퇴근하길 기다렸다. 겨울방학이니까, 눈이 이렇게나 많이 내렸으니까 우리 가족도 겨울 레저를 즐기러 떠나자고 말할 참이었다. 만약 안 된다고 하면 울고 떼를 써서라도 아빠의 약속을 받아내리라고 필요 이상으로 비장한 다짐까지 했다.

마침 토요일이었다.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빠의 어깨와 머리에는 흰 눈이 쌓여 있었다. TV에서 본 것과 같은 물질일까 의심될 정도로 아빠 몸에 쌓인 눈은 무겁고 차가워 보였다. 매운바람에 시달린 아빠의 두 뺨이 빨갛게 거칠어져 있었다. 썰매장에 간다면 울 아빠도 솜처럼 가볍고 따뜻한 눈 위에서 언 몸을 녹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빠에게 썰매장에 가자고 말했다. 그럴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어느새 눈물까지 뚝뚝 흘리며 우리 반에서 나만 썰매장에 못 가봤다고 거짓말까지 하고 있었다. 아빠가 잉잉 우는 나를 번쩍 안아 들더니 까짓 썰매장 가면 되는 건데 왜 우냐며 나를 달랬다. 언제 갈 거냐는 내 물음에 아빠는 지금 당장 가자고 말했다. 믿을 수 없어서 “지금?” 하고 몇 번을 되물었는지 모른다. 순식간에 겨울옷으로 중무장한 우리는 차를 타고 달려 자주 가던 공원 앞에 도착했다.

“이게 뭐야! 썰매장 간다면서?”

속았다는 기분에 부아가 치민 나는 발을 쿵쿵 구르며 항의했다.

“기다려봐 임마! 아빠 따라와!”

입을 삐죽 내밀고 발을 턱턱 끌며 아빠 뒤를 쫓았다. 아빠는 공원 한편의 쓰레기 더미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근처 사는 친구에게 들킬까 봐 가슴이 졸아들었다. 쪼그려 앉은 아빠의 등을 바라보며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빨리 빨리” 하며 아빠를 재촉했다. 한참 만에 아빠가 허리를 펴고 일어났다. 커다란 손에는 흰색 귤박스가 들려 있었다.

“썰매 찾았다!”

의아해하는 내 손을 잡고 아빠는 공원 잔디밭을 성큼성큼 올라가며 당신 어릴 적에 눈이 오면 비료포대 하나로 해가 질 때까지 놀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야트막한 언덕에 올라 아빠는 박스를 북북 찢어 코팅된 면이 아래로 가게 놓은 다음 그 위에 다리를 벌리고 앉았다. 나는 어느새 조금 신이 난 채로 아빠의 가랑이 사이에 앉아 출발을 외쳤다. 아빠가 긴 다리를 훅훅 굴렀다. 추진력을 받은 박스썰매가 아래를 향해 빠르게 미끄럼질 쳤다. 발자국 하나 없던 공원에 우리 썰매 자국이 길게 남았다. 공원에 있는 언덕마다 우리가 미끄러진 자국을 남겼다. 아무도 밟지 않은 깨끗한 눈밭을 엉덩이로 무참히 휩쓸어버리는 희열은 짜릿했다. 엄청나게 커다란 도화지에 온몸으로 그림을 그리는 기분이었다. 한참을 놀다 보니 어느새 사위가 어두워지고 있었다. 비료포대 하나만으로 해가 지도록 놀았다는 아빠의 말은 참말이었던 것이다.


역시 우리 아빠가 세상에서 최고

“딸, 마지막으로 눈사람 크게 만들고 집에 갈까?”

“근데 우리 장갑 없잖아.”

아빠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짓더니 잠깐만 기다려보란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잠시 후 돌아온 아빠 손엔 슈퍼에서 사 온 일회용 비닐장갑 박스가 들려 있었다.

“비닐장갑 끼면 안 추워?”

“그럼, 하나도 안 춥지.”

“추울 것 같은데.”

“그럼 딸은 두 개씩 껴.”

나는 두 겹의 비닐장갑을, 아빠는 한 겹의 비닐장갑을 끼고서 눈을 굴렸다. 친구들과 눈사람을 만들 때는 용을 써도 둥글게 뭉치지 않던 눈이 아빠 손에선 그렇게 쉽게 뭉칠 수가 없었다. 역시 우리 아빠가 세상에서 최고구나, 감격하며 열심히 눈뭉치를 굴렸다. 한참 만에 드디어 완성된 눈사람은 나만큼이나 커다랬다. 안 춥냐는 아빠 말에 도리질을 했다. 수상할 정도로 춥지 않았다. 비닐장갑은 정말 보온 효능이 있는 건지 손도 안 시렸다.

나는 양손에서 벗겨낸 비닐장갑을 우리가 만든 눈사람의 나뭇가지 팔에 걸어줬다. 아빠 차에 오르기 전, 뒤돌아 눈사람을 보았다. 양팔과 열 손가락을 쫙 펼친 눈사람이 잘 가라고 인사를 해주는 것 같아서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올려다본 아빠의 두 뺨이 참 어린애의 것처럼 빨갛다고 어린 나는 생각했다.

글쓴이 강이슬은 〈SNL 코리아〉 〈인생술집〉 〈놀라운 토요일〉 등 TV 프로그램에서 근면하게 일하며 소소하게 버는 방송작가다.
제6회 카카오 브런치북 프로젝트에서 《안 느끼한 산문집》으로 대상을 받고 출판 계약을 하며 난생처음 갑이 된 데 이어 《새드엔딩은 없다》까지 출간했다.
술과 개와 밤을 좋아하고 욕을 잘하지만 착하다. 어제도 오늘도 가난했고 내일도 가난하겠지만 가난을 팔아 돈을 벌겠다는 야심 찬 포부를 가지고 있다.
  • 2021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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