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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준의 응시(凝視) ④

예술을 가질 수 있을까?

오래전부터 귀족이나 자산가들이 예술가를 후원하고 작품을 구매해온 건
그렇게 해서 예술가나 작품을 소유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글쎄, 그건 ‘사랑을 가졌다’는 말처럼 어리석게 들린다.
세상엔 존재하지만 소유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잠깐잠깐 내 안에 깃들 뿐 가질 수는 없는 게 있다.
© gettyimageskorea
선배가 노석미 화가의 전시회에 데려간 적이 있다. 흰 벽에 그림들이 착착 걸려 있고, 천장에 달린 조명이 그림을 비추고 있었다. 전시관은 텅 빔으로 빛났다. 최소한의 고급 가구만 둔 집이 ‘여백’으로 그 집에 사는 사람을 빛나게 하듯이, 고요하고 격조 있는 장소였다. ‘격조’란 간소함을 표방할 때 드러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진짜 좋은 것 몇 가지만 툭툭, 곁에 두는 삶. 잡동사니로 가득 찬 내 방을 떠올리면, 지나치게 많은 책 속에 묻혀 정작 필요한 책을 못 찾아 도서관으로 달려가는 생활을 떠올리면 그런 생각이 든다.

상기된 얼굴로 화가와 인사를 하고(선배와 친분이 있는 화가였다) 우리는 천천히 그림 앞에 섰다. 눈 쌓인 산과 도로를 그린 연작 앞에 서니 6월인데도 ‘겨울의 적막’ 같은 게 느껴졌다. 그림을 보는 일은 늘 즐거운데 그림이 ‘말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나처럼 말로 쌓고 벌이고 이뤄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 그림이나 춤, 음악은 경애하는 분야다. 바보 같은 생각일지 모르지만 이따금 나는 언어 없이 시를 쓰고 싶다. 언어 없이 생각하고 언어 없이 이야기를 꾸리고 언어 없이 책을 쓰고 싶다. 언어는 직접적이고 유용한 표현 수단이지만, 그 때문에 한계를 가진다. 미술 작품은 이미지와 형상만으로 의미를 확장하거나 의미 너머로 월담할 수 있다. 쉽고 고요하며 순식간에, 다른 세계로 갈 수 있다.

“원작에는 그 그림에 대한 어떠한 정보를 통해서도 느낄 수 없는 침묵과 고요함”(존 버거)이 있다고 했던가. 침묵과 고요함은 ‘진짜’가 갖고 태어나는 위엄이다. 행동(그리기)을 마친 화가에게서 분리돼 독자적으로 존재하게 된 작품에 찍힌 마침표다. 전시관의 그림 앞에 설 때면 떨림과 공손함과 기대가 같이 선다. 그게 전시관에 걸린 그림이란 걸 알기에 그렇다. 이곳에 ‘올 수 있는’ 그림의 자격, 화가의 실력, 예술적 가치, 시장 가격 따위가 짐작되어 관람자의 기분과 자세를 만드는 것일 테다.


소비의 궁극!

노석미 화가가 그림을 바라보는 우리 뒷모습을 스마트폰으로 찍어 보여줬다. 모르는 사이에 찍힌 우리 뒷모습은 돋아난 섬처럼, 따로따로 골똘해 보였다. 약속이나 한 듯 뒷짐을 지고(뒷짐은 그림 앞에서 본능적으로 나오는 자세, ‘이제부터 진지하게 보겠습니다’ 하는 마음이 갖추는 예의다) 상체를 살짝 기울인 듯한 모습이었다. 전시관에서 보는 그림은 ‘작품’이 된다. 그게 진짜이고, 하나뿐이며, 높은 확률로 비쌀 것이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보는 그림은 작품이라기보단 인테리어 요소로 기능한다. 그게 복제품일 확률이 높고(아닐 수도 있지만), 작품을 위한 공간(전시관)이 아닌 생활공간을 돋보이게 하는 용도로 걸리기 때문이다.

“그 방은 예배당과 비슷하다. 그 소묘는 방탄 유리장 안에 놓여 있다. 그것은 새로운 종류의 감동을 주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데, 이는 그 이미지가 보여주는 것, 그 이미지가 지닌 의미 때문이 아니다. 그 작품이 감동적이고 신비스러워진 것은 시장 가격 때문이다.”1)

다 빈치의 〈성 안나와 성모와 아기 예수와 세례 요한〉 소묘는 원래 학자들만 알고 있던, 알려지지 않은 그림이었는데 갑자기 유명해졌다고 한다. 존 버거는 “한 미국인이 250파운드에 그것을 사려고 하자 갑자기 유명해졌다”며, 그 이유를 높아진 그림 값에서 찾았다. 전시관에 서서 불경하게도 혼자 그림 가격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같이 그림을 보던 선배가 한 그림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미술에 조예가 깊고 집에 진귀한 작품들을 가지고 있는 선배였다. 그가 화가와 이야기를 나누는가 싶더니 데스크로 걸어갔다. 나는 관람자가 마음에 드는 그림을 구입하는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 전시관에서 그림이 팔리는 줄이야 알았지만(사실 팔기 위해 전시를 하는 거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구매 현장을 보게 될 줄이야! 그림을 구입하면 전시관에서 그림을 떼어 바로 가져갈 것 같지만 아니었다. 데스크로 가서 주소와 인적사항을 적은 뒤 결제를 하고, 전시관을 나가면 됐다. 간단했다! 나는 선배를 향해 외쳤다.

“이것이 소비의 궁극, 쇼핑의 최고봉이네요! 이보다 더한(무엇이? 무엇이든!) 소비는 없어. 없어요!”

나는 전시관 데스크 앞에서 촌스럽게 호들갑을 떨었다. 예술을 사고팔며 소유할 수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로는 몰랐던 것 같다. 예술을 가져보지 못했다기보다는 직접 소비한 경험이 없었던 거다. 예술을 가져본 경험이야 차고 넘친다. 어떤 작품을 열렬히 좋아해 그걸(복제품이나 책에 실린 그림일지라도) 온전히 향유하는 일이 예술을 가지는 것 아닌가?


화집 속 그림이 걸어오는 말들

쓸쓸했던 어느 밤, 친구네 집에 갔다가 식탁 위에 펼쳐진 노석미 작가의 화집을 보았다. 친구는 ‘나를 위해’ 일부러 펼쳐놓았다며 미소를 지었다. 화집은 식탁 위 미니 이젤에 세워져 있어 더 근사해 보였다. 그날 밤 우리는 화집 구석구석을 느리게 거닐며 와인을 마셨다. 웃거나 울먹이고, 수다를 떨며 즐거워했다. 어떤 그림에선 오래 머물고 어떤 그림은 가벼이 스쳐 지나가며 화집 속의 그림을 천천히 보았다.

그날 우리가 그림을 가진 적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원본을 걸어둔 집에도, 화집으로 그림을 간직한 집에도 예술은 존재한다. 예술은 소유 개념이 아니라 존재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누가 작품을 진정으로 소유할 수 있단 말인가? 〈모나리자〉를 그린 다 빈치도 〈모나리자〉를 소유했다고 볼 순 없다. 그림은 화가의 것이 아니다. 시가 시인의 것이 아니듯. 예술은 곳곳에 넘쳐난다. 공중화장실 문짝에도, 이발소 벽에도, 내 방 벽에도 (존 버거의 드로잉 한 장을 테이프로 붙여놨다), 박물관에도, 전시회장에도, 지하철에도, 백화점에도, 누군가의 다이어리나 책표지에도 예술은 있다.

내게 그림은 표현이다. 마음의 분출, 피의 흐름, 궁극의 상상이 고인 캔버스다. 20대 때 내가 가장 좋아했던 화가는 에곤 실레다. 그때 그의 그림을 실컷 누렸다. 그가 인간을 전기에 오른 듯 ‘뾰족뾰족’ 세워두는 게 좋았다. 그의 그림에서 인간은 비석처럼 서 있다. 깡마르고 본질뿐이고, 언제라도 타인에 옮겨 붙어 전류를 흐르게 할 수 있는 존재. 내가 쓰는 시와 그의 그림이 통하는 데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꿰뚫어본 세상을 이쪽에서 내가 응시하는 일이 흡족했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때 내 방은 에곤 실레로 가득했다. 진품을 곁에 두고도 배추나 무 보듯 무감하게 지낼 수 있고, 가품을 두고도 그걸 그린 화가보다 더 절절하게 느끼고 소통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한 사람을 위한 초상시(詩)’가 있다면…

오래전부터 귀족이나 자산가들이 예술가를 후원하고 작품을 구매해온 건 그렇게 해서 예술가나 작품을 소유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글쎄, 그건 ‘사랑을 가졌다’는 말처럼 어리석게 들린다. 세상엔 존재하지만 소유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잠깐잠깐 내 안에 깃들 뿐 가질 수는 없는 게 있다. 누군가 그림에서 돈을 본다면, 돈의 미래만 본다면 그건 그냥 ‘고가품’일 뿐이다.

수십 년 전, 화가와 문인 간의 교류가 활발하던 때 월간 《현대문학》의 표지로 김환기, 박고석, 장욱진의 그림을 자주 사용했다고 한다(지금도 《현대문학》은 미술 작품을 표지로 쓴다). 스캐너나 복사기가 없었을 때니 화가들은 그림 원본을 보내줬다고 한다. 지금의 값으로 따지면 그게 얼마인지, 아니 쉽게 이뤄질 일인지 상상이 안 되지만 그런 시절이 있었다. 괜히 마음이 간질간질하고 더워진다. ‘값’ 이전에 ‘가치’를 주고받던 때의 순수한 마음이여.

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 시도 그림처럼 한 편씩만 존재해 누군가에게 팔린다면? 초상화처럼 ‘한 사람을 위한 시’, 초상시(詩)가 존재해 내게 주문이 들어온다면? 재미있을 것 같다. 주문이 들어온다면 ‘본인의 잠자는 사진 열 장, 창문 앞에 선 뒷모습 열 장을 보내주시오. 그 스무 장을 보고 또 보며 근사한 시 한 편을 써드리겠소’ 말해야겠다. 그렇게 태어난 시는 누구의 시일까? 원고료는 얼마를 받아야 한담? 이런 쓸데없는 상상을 진지하게, 아주 진지하게 하며 먼 산을 바라본다.

박연준 시인은 파주에 살며, 일주일에 세 번 발레를 배운다. 창문, 숲, 기러기를 좋아한다. 시집으로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베누스 푸디카》 《밤, 비, 뱀》이 있고, 산문집 《소란》 《밤은 길고 괴롭습니다》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쓰는 기분》 등을 썼다.

1) 존 버거, 《다른 방식으로 보기》, 열화당, 29쪽.
  • 2021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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