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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슬의 커피코피해피 #23

글과 국

글 : 강이슬 

작년에도, 올해도 일력을 선물로 받았다. 하루에 한 장씩 뜯어 사용하는 일력을 나는 아주 허투루 쓰고 있다. 종이 뜯는 걸 자꾸 까먹는 것이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면 3개월 전 날짜가 마치 오늘인 척하며 책상 한편에 우뚝 서서 나를 노려보고 있다. 게으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은 죄책감에 몇 개월 치를 한 번에 움켜쥐고 쭉쭉 찢어버리는 짓을 몇 번 하다가 이건 너무 환경 파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일력을 글감 적는 노트로 사용하고 있다. 한 번이라도 쓰고 버리는 게 낫다는 생각이었다.

일력은 뒷면이 적당히 까끌까끌해서 어떤 볼펜을 사용하더라도 필기감이 좋다. 과거의 날짜 뒤에 오늘 글감을 적다 보면 이미 지나간 과거를 한 번 더 사는 듯한 묘한 쾌감이 든다. 다시 살게 된 과거를 이왕이면 더 잘 살고 싶다는 생각에 글감을 적는 손가락에 힘이 실린다. 일력 중앙엔 커다랗게 오늘 날짜가 적혀 있고 하단엔 짧은 글귀가 있다.


글쓰기는 언제나 어렵다

오늘 나는 《topclass》 11월호에 실을 글감을 적으려고 작년 12월 17일자 일력을 찢었다. 이번 호의 주제는 ‘나도 작가시대’라고 한다. 글쓰기에 관련된 글을 쓰려니 어떤 글을 써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애꿎은 펜만 하도 돌렸더니 검지와 중지에 굳은살이 박일 것 같다. 이런저런 주제들을 생각해보지만 머릿속에 떠오른 여러 가지 키워드는 붙잡을 새도 없이 빠르게 사라져버린다.

한두 문단 적다가도 ‘이건 아니야, 이것도 아니야’ 하며 백스페이스를 힘껏 누르기를 여러 번, 아주 천재 장인 작가 납셨다고 스스로를 비웃는다. 글쓰기는 언제나 어려운데 어려운 글쓰기에 대한 글쓰기는 너무너무 어려워서 단 한 글자를 쓰기도 쉽지 않다. 글쓰기가 쉬워질 날이 오기는 할까? 그날엔 쉬운 글쓰기에 대한 글을 쉽게 쓸 수 있으려나.

펜을 돌리는 걸로는 초조한 마음이 달래지지 않아서 뭐 좀 찢어볼까 하고 메모지를 들었다가 뜨끔했다. 말도 안 되게 글짓기와 관련된 문장이 적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좀 전에 내가 잘근잘근 찢으려던 2020년 12월 17일자 일력 하단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문장을 짓는 것은 국을 뜨겁게 덥히는 것과 같습니다. 다 덥혀지면 차가워지는 것이 국이고, 다 차가워지면 덥혀지는 것이 국입니다. 다만 차가워지는 것은 가면 갈수록 더 차가워지고, 뜨거워지는 것은 가면 갈수록 더 뜨거워집니다.”

조선 후기 문인 이학규의 〈문장의 경계〉 일부인데 배움이 부족한 탓일까 솔직히 말하면 무슨 뜻인지 단번에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어지는 문장에 무릎을 탁 치게 하는 결론이 적혀 있는데 지면이 모자라 전부 옮겨오지 못했을 거라고 마음대로 추측하며 앙상한 자존심을 세워본다.


나는 큰 냄비를 가졌으니 괜찮아

어쨌든 글과 국을 생각한다. 두 눈을 감고 오래오래 문장을 곱씹어보니 맛있는 국이 얼지 않도록 많이 그리고 자주 뜨겁게 쓰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었다. (냉국이라면 낭패지만) 기껏 데운 국이(글이) 식더라도 다시 데우면 되는 일이니 괘념치 말라는 말 아닐까. (아무래도 냉국 얘기는 진짜 아닌 것 같다.)

나의 해석이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맞다고 믿고 싶다. 글을 국처럼 생각하니 실제로 용기가 샘솟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셀 수 없이 많은 부끄러운 글을 썼는데 그게 괜한 헛짓거리가 아니라 국을 데우는 과정이었다니, 앞으로 쓸 수많은 부끄러운 글 앞에서 어깨를 펴고 조금 당당해질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글쓰기는 지금쯤 얼마만큼 데워졌을까. 팔팔 끓을 때까진 아마 훨씬 더 많은 글을 써야 할 것이다. 훨씬 더 많은 글을 썼음에도 충분히 뜨겁지 않다면? 그래도 괜찮다. 그때도 나는 실망하지 않겠다. 내가 품은 냄비가 거대해서 그런 거라고 믿어볼 셈이다. 큰 냄비를 가졌다면 그 안에 든 것을 데우기까지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게 당연한 법이니까. 마침내 데워진 국물은 결코 1인분이 아닐 것이다. 큰 냄비에 가득 담긴 국물을 푸짐하게 퍼서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오래 잘 끓인 국물이 많이 있다고, 뜨거운 맛 좀 보고 가시라고.

글쓴이 강이슬은 〈SNL 코리아〉 〈인생술집〉 〈놀라운 토요일〉 등 TV 프로그램에서 근면하게 일하며 소소하게 버는 방송작가다.
제6회 카카오 브런치북 프로젝트에서 《안 느끼한 산문집》으로 대상을 받고 출판 계약을 하며 난생처음 갑이 된 데 이어 《새드엔딩은 없다》까지 출간했다.
술과 개와 밤을 좋아하고 욕을 잘하지만 착하다. 어제도 오늘도 가난했고 내일도 가난하겠지만 가난을 팔아 돈을 벌겠다는 야심 찬 포부를 가지고 있다.
  • 2021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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