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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준의 응시(凝視) ③

나의 첫 책 이야기

책의 얼굴, 미리 알 수 없는

“쓰는 사람은 누구나 ‘짐승의 계절’을 겪는다.
그다음에야 ‘첫’을 가질 수 있다.
첫 책엔 이런 게 들어 있다. 두 번은 가질 수 없는 열정, 섣부름, 용감함, 짐승의 이빨, 두려움, 무심함, 무색함, 치욕, 질주, 어림, 치기, 유치, 불사조, 깨진 무릎, 누더기, 왕관, 흐린 무지개, 진눈깨비, 허기, 울부짖음 그리고 작가의 미래.”
© 셔터스톡
첫 책을 쓸 무렵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 채 종이 위를 뛰어다녔다. 먹이를 사냥해 삼키고, 밤을 기다려 숲을 헤매는 짐승처럼 바빴다. 부끄러움도 몰랐다. 동물은 사냥하거나 방어할 때 외엔 밖을 의식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받아들이고 그 충만함으로 하루를 산다. 첫 책을 쓸 무렵 나도 그랬다. 나는 내 목소리를 받아들이고, 어떤 백지든 겁 없이 뛰어들었다.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나는 진화했다. 아쉽게도. 이제는 종이 위에서 뛰는 대신 ‘천천히’ 걸어 다닌다.

쓰는 사람은 누구나 ‘짐승의 계절’을 겪는다. 그다음에야 ‘첫’을 가질 수 있다. 첫 책엔 이런 게 들어 있다. 두 번은 가질 수 없는 열정, 섣부름, 용감함, 짐승의 이빨, 두려움, 무심함, 무색함, 치욕, 질주, 어림, 치기, 유치, 불사조, 깨진 무릎, 누더기, 왕관, 흐린 무지개, 진눈깨비, 허기, 울부짖음 그리고 작가의 미래.

나는 첫 책은 눈 감은 상태에서 써야 한다고 믿는다(‘감은 눈’이 아니라 ‘눈 감은’ 상태인 게 중요하다). 내 두 번째 시집 ‘시인의 말’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꽃은 자신이 왜 피는지 모른다. 모르고 핀다.”

첫 책은 ‘모르고 핀 꽃’이다. ‘처음’이란 ‘가속력’이란 바퀴를 달거나 ‘무지’라는 날개를 달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무지가 속력을 만나면? 모른 채로 훨훨, 모르는 곳에 당도하게 된다. 몇 해는 지나봐야 도착한 곳이 어딘지 알 수 있다.


모르고 핀 꽃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은 내 첫 시집이다. 2007년 1월 25일에 나왔다. ‘모르고 핀 꽃’이었다. 그땐 1년 내내 비명을 지르는 상태로 사느라(물론 상징적인 얘기다) 피곤했다. 비명을 그만 지르고 싶어서 제목을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이라고 붙였다. 깜박이는 속눈썹 끝에 매달린 비명, 그게 내 생활이고 내 시였다. 출판사에 시집이 입고됐다고 해서 창작과비평사로 가서 저자 증정본 스무 권을 직접 들고 온 기억이 난다.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무게였다. 방에 앉아 내가 쓴 시집을 펼쳐봤다. 별 느낌이 없었다. 나는 만 스물여섯 살 먹은 애송이였고, 시집을 주고 싶은 사람을 꼽아봐도 채 스무 명이 되지 않았다. 첫 시집이 나오기까지 억지로 무얼 한 기억은 없다. 그저 공들여 비명을 지르고, 비명을 닦고, 비명을 퇴고했던 기억. 나는 비명으로 점철된 시간을 아끼고 돌봤다.

《소란》은 내 첫 산문집이다. 2014년 10월 25일에 나왔다. 역시 ‘모르고 핀 꽃’이었다. 그때까지(등단 10년 차) 난 시집 두 권을 출간한, 지금보단 덜 알려진 시인이었다. 당시엔 전업 작가로 살 생각도, 대단한 포부나 야망도 없었다. 임시직으로 손에 잡히는 아무 일이나 하며, 느린 속도로 시를 쓰며 살아가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산문집을 계약하게 됐고, 나는 (감히!) 이태준의 《무서록》 같은 산문집 한 권을 내고, 산문은 더 안 쓰리라 생각했다. 거만한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기회가 ‘또’ 올 줄 몰라서 그랬다.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 콘서트를 여는 가수의 심정으로, ‘진짜 이야기’만 담고 싶었다(단 한 권일 테니까). 해야 하는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부끄러움도 모르고 썼다(단 한 권일 테니까).


단 한 명의 독자를 위하여

쓸 때 중요한 건 글의 음색이다. 나는 글에서 여러 개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데, 첫 산문집을 쓰기 위해 목소리를 다양하게 사용했다. 창가에서 슬픔을 읊조리는 나직한 목소리 하나, 의자 위에 오른 광대처럼 까부는 목소리 하나, 뉴스를 진행하듯 감정을 절제한 목소리 하나, 무엇도 상관하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는 어린아이 목소리 하나, 음률을 사용해 노래하듯 말하는 목소리 하나…. 이 목소리들이 나올 순서를 기다렸다가, 내 몸에서 착착 나오는 기분을 느끼며 썼다. 잘생길 수도, 세련될 수도, 여유를 가질 수도 없는 글들, 눈 감은 상태로 전해지는 이야기들이 쌓였다. 쓰는 사람은 자기를 비우는 데 온 힘을 쏟는다. 다 비워냈을 땐 허기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정을 들고 기진맥진해 서 있는 사람. 목소리를 사용해 오래 글을 쓰고 나면 깨끗한 슬픔이 온다. 그 기분은 참 좋다.

나는 누가 마감을 정해주지 않으면 한없이 늘어지는 성격이라, 남편이 ‘토지문화원’(박경리 선생이 작가들을 위해 만든 레지던스)에 가서 마무리를 짓고 오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떠나는 날 그가 한석봉의 어머니처럼 말했다.

“산문집을 다 끝내기 전엔 절대 돌아오지 마.”

2014년 3월부터 5월까지, 그러니까 패딩을 입고 내려가서 얇은 옷을 걸치고 돌아올 때까지 강원도 원주에 머물며 《소란》 초고를 썼다. 태어나서 다른 일을 하지 않고(어떤 아르바이트도!), 글만 써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단순한 편이라 믿기로 한 건 믿고, 하기로 한 건 하는 성격이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한석봉처럼 우직하게 《소란》 초고를 완성했다. 집으로 상경하는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소란》은 내 책들 중 독자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책이다. 독자도, 출판사 대표도, 가족도, 심지어 쓴 나조차도 별 기대 없이, ‘모르고 태어난’ 첫 책이었다. 기대는 없었지만 쓸 때는 ‘단 하나의 독자’가 책상 앞에 앉아 있다고 상상하고 그를 위해 열렬히 썼다. 이야기를 그쪽으로 보내듯이, 목소리를 들려주듯이 쓰려고 노력했다. 교정지를 받고 퇴고하는 동안 ‘내가 썼는데 너무 재미있어! 몇 번을 읽어도 재미있는데?’라고 말해서 남편이 쯧쯧 혀를 찼다(하지만 재미있는 건 사실이었다).


스스로를 알아볼 것!

내 인생의 단 한 권 산문집으로 남을 줄 알았던 책은 앞으로 쓰게 될 책들의 물꼬를 열어줬다. 무명에 가까운 시인이 쓴 글을 읽고, 독자들이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입소문을 내주기 시작했다. 독자가 “마치 내 이야기를 쓴 것 같았다”라고 소감을 말해 올 땐 놀랐다. 동일한 경험이 아니어도, 솔직하게 쓴 내밀한 이야기는 보편성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로소 나는 글의 힘과 독자의 힘, 절박한 마음(마지막 콘서트여!)이 지닌 힘을 믿을 수 있었다. 무명작가에게 독자가 생긴다는 건 작가가 계속 성장하고 분발할 수 있는 에너지를, 귀한 힘을 얻게 됐다는 의미다.

만약 당신이 (첫) 책을 쓰고 싶다면 이것만 기억하시라. 스스로를 알아볼 것(자기 글의 음색), ‘모르는 채’ 태어날 것.

“책은 세상의 빛을 보기 전까지는 태어나고 밖으로 나오기를 두려워하는 비정형의 무엇이에요. 우리 안에 간직된 채, 피로와 침묵과 느림과 고독을 한탄하는 존재라고 할까요. 하지만 일단 세상에 나오면 그 모든 것이 일거에, 사라져버리죠.”1)

어떤 사람은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을 지나치게 의식한다. 태어난 후에도 스스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친다. 내 앞의 나, 그 앞의 나, 그 앞의 나…. 수많은 자신이 일렬로 서 있어도 알아보지 못한다. 남의 몸을 빌려 사는 듯 그렇게 산다. 방법은 없다. 본인이 스스로를 알아봐야 한다. 이게 나구나, 이렇게 태어난 게 나구나, 받아들여야 한다.

첫 책이 어떤 얼굴로 태어나 어떻게 살아갈지, 누구도 모른다. 쓰는 사람은 모르는 채로 견디며 나아가야 한다. ‘어떤’이란 형상, 미리 알 수 없는 책의 얼굴, 그것은 쓰는 자가 끝까지 홀로 지고 가야 하는 무겁고 또 빛나는 휘장이다.

박연준 시인은 파주에 살며, 일주일에 세 번 발레를 배운다. 창문, 숲, 기러기를 좋아한다. 시집으로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베누스 푸디카》 《밤, 비, 뱀》이 있고, 산문집 《소란》 《밤은 길고 괴롭습니다》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쓰는 기분》 등을 썼다.

1) 《뒤라스의 말》, 마르그리트 뒤라스·레오폴디나 팔로타 델라 토레, 마음산책, 80쪽.
  • 2021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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