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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준의 응시(凝視) ②

아욱국을 끓이는 가을 아침

가는 사람은 가버린 사람이 아니라 가고 있는 사람이다.
멈추지 않고 어딘가로 움직이고 있는 사람. 풋내 가득하던 여름도 아주 가버린 건 아니다.
가을을 두고,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는 중이리라.
계절은 다른 계절을 침범하지 않은 채 차곡차곡, 자기만의 길을 찾아간다.
© 셔터스톡
가을 아침이다. 싱크대 한가득 아욱을 펼쳐놓고 바라본다. 이걸 언제 다 다듬지? 한숨이 나오지만 부드러운 식감을 위해선 아욱을 잘 다듬고 빨래하듯 북북 문질러 씻어야 한다. 요리는 재료 손질이 반 이상을 차지하는 일이다. 재료를 씻고 다듬고 잘라놓는 일, 이게 좀 귀찮아도 정성을 들여야 맛이 난다. 아욱이나 시금치, 근대 따위를 씻거나 데칠 때마다 생각한다. 누가 맨 처음 이 시퍼런 풀을 뜯어 먹을 생각을 했을까.

마늘과 된장을 넣고 요리할 생각을 한 사람의 순한 지혜여…. 속으로 옛사람을 칭송하며 아욱을 북북 문질러 씻자니 떠오르는 시가 있다.

사실 아욱을 씻을 때마다 매번 생각하는 시다.

아욱을 치대어 빨다가 문득 내가 묻는다
몸속에 이토록 챙챙한 거품의 씨앗을 가진
시푸른 아욱의 육즙 때문에

- 엄마 오르가슴 느껴본 적 있어?
- 오, 가슴이 뭐냐?
아욱을 빨다가 내 가슴이 활짝 벌어진다
언제부터 아욱을 씨 뿌려 길러 먹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지만
- 으응, 그거! 그, 오, 가슴!
자글자글한 늙은 여자 아욱꽃빛 스민 연분홍으로 웃으시고 1)


어머니와 싱크대에 나란히 서서 요리를 해본 일은 없지만, 상상 속에선 몇 번이고 반복한 일이다. 늙은 어머니와 젊은 딸이 아욱국을 끓이는 가을 아침. 열린 창문으로 새 소리가 들려오고 선선한 바람이 부엌을 휘저어놓는다. 머리카락이 “시푸른” 딸과 희푸른 어머니가 이마를 맞대고 도마와 냄비 앞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풍경. 좀처럼 숨이 죽지 않는 아욱의 거센 푸름을 치대다 딸은 엄마에게 오르가슴을 아느냐 묻고, 그걸 “오, 가슴!”으로 들은 어머니의 귀는 순해서 푸르고! 물소리에 씻겨 나가는 건 무얼까. 젊음이 지닌 푸른 독, 비릿한 열기일지 모르겠다.

싱크대 앞에서 이런 장면을 상상한다.

영화의 한 장면으로 본 듯, 머릿속에서 여러 번 재생한 풍경이다. 아욱을 씻고 끓이는 아침을 백 번 더 맞이한다 해도 나는 백 번 다 이 풍경을, 이 시를 떠올릴 테다. 상상 속 모녀 사이에 끼어서 도마를 빌리고, 가을을 빌려 아욱을 씻을 테다. 오, 가슴. 오, 가슴! 탄식할 가슴이 내게 얼마나 남았나 가늠하며 눈·코·입을 푸르게 적실 테다.


아, 가는 사람이여!

이제 푸른 태를 빼놓은 아욱을 먹기 좋게 쑹덩쑹덩 잘라 멸치육수 끓는 냄비에 넣고 된장을 푼다. 뿌옇게 풀어지는 된장을 보니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현재가 따분하거나 미래가 아득하게 느껴질 땐 자꾸 옛날을 불러낸다. 친구 집 담벼락에 서서 옛 친구를 부르듯이, 턴테이블에 추억의 레코드판을 올리듯이 기억을 꺼내보는 거다. 옛날은 부르면 쉬이 오고, 눈 깜박이면 쉬이 사라진다.

가는 사람. 그는 내게 늘 ‘가는 사람’이었다. 한자리에 같이 있어도 어딘가로 가고 있는 듯 보이는 사람. 가는 일에 열중이라 붙잡을 수도 없는 사람. 어디 가세요, 내가 물으면 깜짝 놀랄 게 분명해 묻지도 못하겠는 사람이었다. 국간장과 소금을 들고 간을 보겠다며 옆에 온 남편에게 말한다.

“내가 전에 말한 적 있나? 20년 전 보습학원에서 같이 일했다는 사람. 나는 국어선생이고 그이는 영어선생이었다고 했잖아. 둘 다 20대 중반이었고, 그이가 나보다 두세 살 많았을 거야. 키가 컸고, 활기차 보였는데도 어딘가 좀 어두웠어. 뭐랄까. 걸어가면서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툭툭 내뱉는 타입이었지. 내가 하는 얘기, 이거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사실 다 별 거야, 이렇게 말하는 사람 같았어. 좀 문학적인 데가 있었거든? 그이가 김소진 소설을 좋아해서 김소진의 죽음과 소설 이야기를 많이 했지. 같이 길을 걷는데도 혼자 걷는 사람처럼 땅을 보고 걸었어.”

자기를 한자리에 내버려두고, 먼 곳을 다녀오는 사람들이 있다. 너무 멀리 갈 때는 불러 세우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놀라기 때문에 부르기가 두려운 사람. 그들은 내 앞에 자신을 앉혀놓고, 자기를 찾으러 나선다. 이곳에 당신이 있어요, 말해줘도 믿지 못한다. 그는 언제나 자기보다 더 높은 곳에서, 혹은 더 낮은 곳에서 자기를 찾기 때문에 자기와 온전히 포개져 스스로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가는 사람.


말의 무력함에 대하여

아욱국이 끓는 걸 바라보며 남편에게 조금 더 말한다. 그 여자, 체크무늬 남방을 입은 넓적한 등에 대해서. 고개를 숙이고 자기 운동화를 바라본 채 내게 말 걸던 옆모습, 걷다가 편의점에 들러 음료수를 마시던 일, 길에 대고 얘기하듯 빠르게 중얼거리던 목소리에 대해 말한다.

그때 우린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금도 뭐 대단한 게 되어 있진 않지만 그땐 더 가난하고 가볍고 쓸쓸해서, (결과적으로) 맑았다. 난 시와 소설을 습작하던 대학생이었고, 그는 대학 졸업 후 학원 강사를 하며 시나리오 작가를 꿈꾸는 젊은이였다. 우리는 중학생들의 ‘돌아오는 시험 기간’을 증오했다. 학생들만 시험을 싫어하는 게 아니란 걸, 선생님도 학생들만큼 시험을 싫어한다는 걸 그때 알았다. 시험을 대비해야 하기에 우리는 주말에도 출근했다. 시험은 끝나도 자꾸 돌아와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했다.

“그이는 아버지를 싫어한다고 했어. 아주 오랫동안 정치판을 기웃거렸지만 무엇도 되지 못한 사람이었다고. 늦은 밤에 퇴근하면서 그런 얘기를 들려줬거든.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면서 말하는 거지. 그이가 한 말 중에 잊을 수 없는 얘기가 있어. 어느 날 그이의 남동생이 라면을 끓여서 들고 가다 엎은 거야. 그런데 남동생이 바닥에 쏟은 라면을 바라보더니 냄비에 주워 담더래. 주워 담은 라면을 먹더래. 울면서 꾸역꾸역, 끝까지 다 먹더래.”

아욱국에 대파를 썰어 넣으며 생각했다. 말의 무력함에 대해서. 남편에게 아무리 설명하려 해도 그이가 본 풍경을, 내게 말해주려 한 그날 밤 공기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었다. 물론 나도 그들의 사연과 심정을 다 헤아릴 순 없었다.

그저 쏟아진 라면을 주워 먹는 동생을 바라보는 누나의 심정을 헤아려보면, 내 몸 어딘가에서 풍기던 풋내가 씻기는 기분이 될 뿐이다.

“언젠가 그날 일을 꼭 시나리오에 쓸 거예요”, 그이가 한 말 때문에 나는 20년 가까이 기다린다. 영화를 볼 때마다 혹시 이 시나리오를 그이가 썼을까, 엎지른 라면을 꾸역꾸역 먹는 사람이 나오는 장면이 등장할까 기다린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아직도.


쏟은 라면을 먹는 사람의 마음

지금은 그의 이름도 잊었다. 일하다 짧게 만난 사람이고, 사적인 시간을 길게 나눈 적도 없었다. 그러나 오늘처럼 아욱국을 끓이는 가을 아침이면 이상하게도, “오, 가슴!”이란 시구와 함께 쏟은 라면을 먹는 사람의 마음을 떠올려보게 되는 것이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가는 사람’일까.

가는 사람은 가버린 사람이 아니라 가고 있는 사람이다. 멈추지 않고 어딘가로 움직이고 있는 사람. 풋내 가득하던 여름도 아주 가버린 건 아니다. 가을을 두고,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는 중이리라. 계절은 다른 계절을 침범하지 않은 채 차곡차곡, 자기만의 길을 찾아간다.

수저를 들고 부드럽게 풀어진 아욱국을 먹어야겠다. 영화를 볼 땐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겠다. 가을 내내 “오, 가슴!”을 품고 걷겠다.

박연준
파주에 살며, 일주일에 세 번 발레를 배운다. 창문, 숲, 기러기를 좋아한다. 시집으로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베누스 푸디카》 《밤, 비, 뱀》이 있고, 산문집 《소란》 《밤은 길고 괴롭습니다》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쓰는 기분》 등을 썼다.

1) 김선우, 〈아욱국〉 중에서,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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