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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슬의 커피코피해피 #20

공포의 영어캠프

글 : 강이슬 

여름. 강렬한 햇볕과 물놀이 그리고 납량특집의 계절. 이 계절을 맞아 직접 겪은 오싹한 일을 써볼까 한다.

대학생 때 초등 영어캠프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다. 캠프의 목적상 영어만 써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다. 걱정이 되었는데 동행하는 원어민 선생님이 캠프를 지휘할 것이므로 봉사자들은 말할 일이 거의 없을 거라는 센터장의 얘기에 마음을 놓았다.

캠프 당일, 묵직한 가방을 멘 아이들이 경쾌하게 버스에 올랐다. 아이들의 머릿수를 헤아리는데 창문 밖으로 센터장의 하얗게 질린 얼굴이 보였다. 그가 은밀하게 봉사자들을 주차장 구석으로 불러 모았다.

“큰일 났어요. 원어민 선생님이 탈이 나서 오늘 못 온대요.”

“그럼 캠프는 취소되는 건가요?”

봉사자 중 한 명이 물었다. 센터장은 더욱 질린 얼굴로 대답했다.

“예산이 이미 책정되어 있는 행사라서 취소는 불가능해요. 우리는 오늘… 갑니다.”


“온리 스픽 잉글리시! 렛츠 고고고”

그의 비장한 말에 그만 헛웃음이 나왔다. 영어캠프에 영어선생님이 없다니. 뭐 이런 캠프가 다 있단 말인가. 센터장이 들고 있던 A4 꾸러미를 착착 넘기더니 뜻밖의 말을 꺼냈다.

“혹시 몰라 이력서를 살펴봤는데… 강이슬 선생님? 어학연수를 다녀오셨다고…?”

난데없이 선생님이라니? 거기에다 센터장의 간절한 눈빛까지. 상황이 말도 안 되게 돌아가려는 조짐이 보였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요. 어학연수를 다녀온 건 맞지만 저는 1년 내내 농담 따먹기만 했어요.”

사실이었다. 일상적인 스몰토크 정도야 어렵지 않았지만 이런 자리를 이끌기엔 문법, 발음, 어휘 모두가 자격 미달이었다. 센터장과 얼마간 실랑이를 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나는 버스 안에서 마이크를 쥐고 선 채였다. 에어컨이 빵빵했음에도 식은땀이 흘렀다. 30여 명의 아이들이 기대에 찬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목을 가다듬은 뒤 짧게 인사했다.

“헬로, 에브리원… 음… 마이 네임 이즈 강이슬.”

마이크는 쓸데없이 에코 성능이 뛰어났다. 버스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천천히 잦아드는 내 목소리를 타고 정신이 나가듯 혼미했다. 애써 환한 표정으로 다음 말을 이어갔다.

“투데이, 위 알 고잉 캠핑! 음, 잇츠 잉글리시 캠프. 쏘, 온리 스픽 잉글리시! 오케이? 음… 렛츠 고고고!”

초라하기 짝이 없는 ‘렛츠 고고고’ 신호로 버스가 출발했다. 내가 이 캠프의 진행자라는 거짓말 같은 현실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불행히도 학생들은 영어를 잘했다. 더 불행한 사실은 그들이 궁금한 게 많은 초딩이었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유창한 영어로 시도 때도 없이 질문을 해댔고 나는 영어실력이 뽀록나지 않도록 적당히 둘러댔다. 정 안 될 것 같은 때는 무적의 한마디를 내뱉었다.

“비 콰이어트!”

무사히 캠핑장에 도착했다. 센터에서 준비한 프로그램 덕분에 저녁까진 별로 할 일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문제는 저녁을 먹은 이후였다. 세 시간이 통으로 레크리에이션 파트였다. 물론 진행은 나의 몫이었다. 긴장과 낭패감 때문에 저녁밥이 안 넘어갔다. 내 속도 모르고 반찬을 야무지게 집어 먹는 센터장이 미웠다. 저녁식사 후 모두가 강당에 모였다.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단상에 서서 힘껏 혀를 굴려 말했다.


초딩판 스탠드업 코미디의 서막

“안녕! 영어캠프에 온 걸 환영해. 지금은 레크리에이션 시간이야. 음… 누가 영어를 제일 잘해?”

장난기 많은 애들이 친구를 가리키며 ‘우하하’ 웃었다. 가장 많은 지목을 받은 아이를 무대로 불러 자기소개를 시켰다. 유창한 영어실력의 소유자란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나는 아이한테 살면서 가장 재미있었던 일을 말하고 내려가라고 했다. 아이는 잠시 당황했지만 차근차근 이야기를 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문장이 나오면 객석의 반응을 베끼는 것으로 위기를 넘겼다. 그 애가 이야기를 끝마치고 내려가기 전에 재빨리 불러 세워 질문을 했다.

“네 친구들 중에 가장 재미있는 애가 누구야?”

그 애가 지목한 아이를 무대 위로 올려 얘기를 듣고 다시 아이가 지목한 다른 애를 불러 이야기를 하게 했다. 다행히 학생들의 반응이 좋았다. 그때는 망했다 싶은 심정으로 시간을 때운 거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꽤 혁신적인 초딩판 스탠드업 코미디가 아니었나 싶다.

아무튼 열 명 정도를 무대에 올리니 더 이상 지원자가 없었다. 남은 시간은 한 시간. 즉흥적으로 담력시험을 제안했다. 담력시험은 영어로 말할 필요가 없으니까. 학생들이 잠시 쉬는 동안 봉사자들은 귀신 분장을 했다. 갑작스레 덤터기를 쓴 나를 안쓰럽게 여겼던 봉사자들이 성심성의껏 귀신 분장에 임했다. 나는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를 풀어 헤치고 빨간 립스틱을 얼굴에 덕지덕지 발랐는데 내가 봐도 소름이 끼쳤다. 분장한 봉사자들이 여기저기에 숨어 있다가 아이들을 놀랬다. 지나치게 최선으로 임하느라 완급 조절을 못한 나머지 많은 애들이 악을 쓰며 울었는데 그 덕(?)에 지쳐서 금방 곯아떨어졌다.

아이들이 모두 잠든 시간. 귀신 분장을 한 봉사자들과 방에 모여 맥주를 마셨다. 도저히 웃지 않을 수 없는 꼴이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냐는 얘기를 킬킬대며 한참 하다가 화장실에 가려고 복도로 나왔는데 마침 화장실을 가던 아이와 어두운 복도에서 딱 마주쳤다. 반쯤 잠에 취해 있던 아이가 귀신 분장을 한 나를 보고 놀라 경기를 하듯 울었다.

“쏘리 쏘리! 아임 낫 고스트!!”

아이의 울음과 내 짧은 영어가 텅 빈 복도에 괴상한 하모니를 만들며 울려 퍼졌다. 차라리 나도 울고 싶은 밤이었다.

글쓴이 강이슬은 〈SNL 코리아〉 〈인생술집〉 〈놀라운 토요일〉 등 TV 프로그램에서 근면하게 일하며 소소하게 버는 방송작가다.
제6회 카카오 브런치북 프로젝트에서 《안 느끼한 산문집》으로 대상을 받고 출판 계약을 하며 난생처음 갑이 된 데 이어 《새드엔딩은 없다》까지 출간했다.
술과 개와 밤을 좋아하고 욕을 잘하지만 착하다. 어제도 오늘도 가난했고 내일도 가난하겠지만 가난을 팔아 돈을 벌겠다는 야심 찬 포부를 가지고 있다.
  • 2021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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