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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희의 속 깊은 인터뷰

김민섭 작가

내 이름처럼 ‘온화한 모닥불’을 나눌 수 있다면

글 : 김민희 기자  / 사진 : 서경리 기자

뉴스를 보다가 그렇게 줄줄 눈물을 흘린 건 처음이었다. 2017년 12월 초, 페이스북을 뜨겁게 달군 일명 ‘김민섭 찾기 프로젝트’ 보도 장면. 김민섭 작가가 자신과 이름이 같은 보통의 청년 김민섭에게 아무 조건 없이 후쿠오카 항공권을 양도하는 이 프로젝트는 ‘순수한 선의’의 이름으로 자가 증식했다. 누군가는 숙박비를, 누군가는 버스 티켓을, 또 누군가는 포켓 와이파이를 주겠다고 나서더니, 급기야는 대학원생 김민섭의 졸업전시 비용 마련을 위한 카카오 펀딩으로까지 이어졌다. 278명이 모은 254만 9000원. 무려 300명 가까운 이들이 평균 9000원씩을 보탠 셈이다. 소수의 목청 큰 사람들에 가려 보이지 않던 다수의 조용한 선의를 확인한 일대 사건이었다.

당시 93년생 대학원생 김민섭 씨는 83년생 김민섭 작가에게 물었다.

“사람들이 왜 저를 도와줬을까요? 저는 특별한 게 없는 사람이잖아요.”

김 작가는 답했다.

“그냥, 당신이 잘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학원생 김민섭 씨는 이듬해 수석 졸업을 했다. 자신이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며, 그 덕분이라고 했다.

이 기적 같은 이야기가 책으로 출간됐다.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 김민섭 찾기 프로젝트를 포함, 김민섭 작가가 어릴 때부터 품고 실천하고 나눠온 ‘선함’에 대한 이야기가 차곡차곡 쌓여 책 한 권이 되었다. 초등학생 시절 4주 연속 ‘착한 학생’에 선정된 이야기부터, 옆집 아이보다 낮은 시험 점수를 받아 들고 그 아이를 기쁘게 해줬다는 생각에 “엄마, 나 옆집 아이한테 또 졌대”라며 자랑하던 일화, 서울 한복판에서 발생한 교통사고 현장에서 함부로 욕을 해댄 40대 가장에게 ‘무례함의 비용’을 법적으로 청구한 이야기까지.

김민섭 작가의 책은 장르를 규정하기 쉽지 않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소진해 작품으로 남긴다. 작가 자신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에세이에 가깝지만 읽고 나면 사회파 소설처럼 묵직함이 전해져온다. 술술 읽히면서 여운이 길다. 실제로 그는 종종 ‘작가’ 대신 ‘사회정치 칼럼니스트·저널리스트’로 소개된다.

어쩌면 김민섭 작가는 1인칭으로 충분할지 모르겠다. 소설이 피투성이 세상에 거대한 질문을 던지기 위해 그 세계의 어떤 전형을 지어내 이끌어가는 장르라면, 그는 이미 그 전형의 최전선에서 충직한 삶을 살아내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에서는 세상의 잣대에 휘둘리지 않고 ‘나다운 삶’을 선택하는 이야기를, 《대리사회》에서는 타인의 욕망을 대리하면서 살아가는 ‘우리’의 서글픈 초상을 다뤘다면,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에서는 연결을 통해 확인되고 확산되는 우리 사회의 선의의 힘을 말한다. 그래서 책을 덮고 나면 가슴속에 온기가 남는다. 오래도록 식지 않는 뭉근한 온기.

김민섭 작가를 서울 익선동에 있는 자연주의 화장품 아이소이의 복합문화공간 ‘티퍼런스서울’ 루프탑에서 만났다. 100년의 시간을 품은 한옥 기와지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김민섭 찾기 프로젝트를 접하고 감동이 컸어요. 당시 《주간조선》에 올해의 인물로 ‘김민섭’을 추천 리스트에 올리기도 하고, 《topclass》 스페셜 이슈로 ‘김민수 프로젝트’를 다루기도 했습니다. 80년대에 태어난 가장 흔한 이름인 김민수 씨를 인터뷰하는 프로젝트로, 가장 보통의 청년들을 응원하는 취지였어요.

“그때 편집장 편지를 읽고 많이 감사했습니다. 이 프로젝트에 정말 많은 분들이 호응하고 감동해주셨어요. 한번은 50분 정도를 대상으로 이 이야기를 들려드렸는데, 절반 정도가 우시더라고요. 끝나고 몇 분이 오셔서 ‘내 인생 최고의 강연이었다’는 말씀도 남겨주시고요. 이 주제로 강연을 할 때마다 울지 않는 분이 없었던 것 같아요.”


어떤 지점을 건드린 걸까요?

“듣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싶어요. 자기도 모르지만 하고 싶었던 말이고요.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순간에 다들 우시거든요.”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선함에 굶주려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날 선 대립과 흉악한 범죄가 미디어를 지배해버렸잖아요.

“‘왜 이런 반응을 보일까?’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해봤어요. 다들 선하게 살고 싶은데 이런저런 이유로 자신의 선함을 숨기고 살다가, ‘아, 이렇게 살아도 괜찮겠구나’ 하고 느끼는 지점이 있는 것 같아요.”


김 작가는 어떻게 그 선함을 사회화 과정에서 잃어버리거나 맞바꾸지 않고 고스란히 유지할 수 있었나요.

“제가 2015년에 대학을 나와버렸잖아요. 그때 건져 올린 게 저 같아요. 이전에는 내가 무엇을 위해, 누구로 살아가는지 알 수 없던 시간이었어요. 대학에서의 시간은 포기해야 하는 것도 많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하고 있는가에 대한 자신도 없었어요. 물론 공부는 재밌었지만 대한민국에서 대학원생이자 시간강사로 살아간다는 건 힘든 일이에요. 내가 나를 지키지 못했어요. 대학을 나오면서 전업 작가가 됐고, 그때의 결심은 ‘나답게 살자’는 거였어요. ‘내가 가장 즐겁고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게 뭐지?’라는 스스로의 질문에 ‘나는 김민섭답게 살아야겠다’는 답변을 찾았습니다. 김민섭다움이라는 게 그 이후의 모든 삶이 되었어요.”


김민섭다움이란 뭘까요.

“글쎄요, 저마다의 나다움이 있잖아요. 모든 다움은 존중받아야 마땅해요. 김민섭답다는 건, 민망하지만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즐겁고 옳다고 믿는 일들을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선택하면서 사는 일.”


그 수준의 삶은 종심(從心) 경지에 올라야 실천 가능한 삶 아닐까요(웃음).
마음을 따라 행동해도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인성을 갖춘 사람.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 과정에서 중요한 건 무해한 존재가 되는 것 같아요. 내가 옳다고 생각한 것을 해나가다 보면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가 많거든요.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혐오하고 정죄하게 되면서. 그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선함은 타고나는 걸까요, 길러지는 걸까요?

“둘 다인 것 같아요. 선하게 타고난 사람도 있고, 그런 사람에게 영향받아서 선해지고자 하는 사람도 있고. 누구라도 선한 것을 보면 감격하고 공감하게 되는 지점이 있잖아요. 우리는 서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선함이 더 단단하게 연결해주는 고리라는 생각을 합니다.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 잃을 수 있지만 결국에 되찾게 되는 것, 그게 선함이 아닐까요.”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에서 무례한 사람을 고소하는 일화가 가장 속도감 있게 읽혔어요.
겁이 많다고 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센 사람에게 강하게 맞설 수 있었지요?


“사실 겁이 많이 났어요. 무서웠고요. 저는 갈등 상황을 피하는 편이거든요. 말려들지 않으려 하고요. 그런데 그 사람한테 지고 싶지 않았어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저와 닮았거든요. 생김새가 닮은 경우도 있고 성격이나 지향, 사용하는 언어가 닮은 경우도 있어요. 그런 사람들이 상처받지 않기를 원했어요. ‘내가 그냥 넘어가면, 이건 잘못된 거야, 라고 말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나와 닮은 사람을 찾아내서 그에게 상처를 주겠구나, 그렇다면 내가 지금 싸우면 나와 닮은 사람을 지킬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고소장에 고소의 이유를 이렇게 썼습니다. ‘나와 닮은 사람을 지키기 위해 이 사람을 고소합니다’. 적고 나서 참 잘했다고 생각했어요(웃음).”


없던 용기가 났겠습니다.

“맞아요. 고소를 진행하면서 혼자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페이스북에서도 김민섭 찾기 프로젝트만큼이나 사람들이 공유하고 응원도 해줬거든요. 그래서 더 잘할 수 있었어요.”


혹 ‘무례함의 비용’ 물리기 챌린지를 해볼 생각은 없어요?

“음… 이런 건 안 하는 게 좋겠어요. 누군가가 잘되길 바라는 챌린지는 괜찮아요. 그런데 누군가를 안 되게 만들자는 챌린지는 그걸 진행하는 사람을 즐겁게 하지 못해요. 저 역시 그걸 진행하는 몇 달 동안 안 즐거웠거든요. 무엇보다 ‘내가 옳은 일, 정의로운 일을 하고 있어’라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어요. 그게 정말 위험한 생각 같아요. ‘이 사람은 죄를 받아도 괜찮아, 누군가를 혐오해도 괜찮아’ 이런 생각이 들어서 계속 마음을 다잡았어요. ‘나는 지금 옳은 일을 하는 게 아니야, 다만 나와 닮은 사람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을 하는 거야’라는 식으로요. ‘당신이 안 되면 좋겠습니다’는 이미 우리 사회에 너무 많아요.”



그는 자주 웃었다. 먼저 눈빛이 웃고, 그 웃음이 눈가로, 입가로 번졌는데 그때마다 그는 꼭 사춘기 소년의 얼굴이 됐다. 대학에서 나와 전업 작가가 된 후 그는 대리기사를 병행했다. 그의 일감은 주로 서울에 있지만, 가족은 강원도에 산다. 지난해까지 강원도 원주에서 살다가 올해 초 강릉으로 이사했다. 서울-강원도 대리운전으로 한 번에 20만 원 정도를 벌 수 있다고 했다. 얼마 전 그를 경남 창원의 한 포럼에서 만난 적이 있다. 당시 서울에 사는 포럼 참석자들 대부분은 KTX를 탔지만, 그는 남았다. 카페에서 마냥 기다리면서 대리기사 콜을 기다렸다고 했다. “그날 대리기사로 18만 원 벌었고, KTX 비용 아낀 것까지 합치면 20만 원 벌었다”며 또 웃었다.


일터는 대부분 서울인데, 어쩌자고 두 시간 거리의 강릉으로 이사했습니까.

“강릉이 좋았습니다. 2년 전쯤 아이가 바다가 보고 싶다고 해서 새벽에 떠났어요. 너무 좋은 거예요. 바다에 갈매기가 날고, 아이들은 갈매기를 쫓아다니고. 온 가족이 같이 바다를 본 건 처음이었어요. 제가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저도, 아내도, 아이들도 행복해 보여서 다음 주에 또 갔어요. 그다음 주, 그다음 주에도. 어느 날 아이들이 ‘여기에 살고 싶어’ 하는 겁니다. 여기에서라면 모두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집값을 알아봤는데, 바다 주변 아파트 시세가 생각보다 저렴했어요. 강릉 사람들은 바다 근처 집을 선호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전세를 구해서 1년 정도 주말마다 와서 살아보다가 아이들한테 ‘여기로 이사할까?’ 물어봤더니 너무 좋대요. 처음 바다를 찾은 지 2년 만에 강릉으로 이사 왔습니다.”


페이스북에서 아이들을 김대흔 씨, 김린 씨 하고, ‘씨’ 호칭을 붙이더군요.

“아이들이 제 생각대로 자라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게 되잖아요. 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아이들에게 화를 낼 때도 있고, 제 생각을 강요하게 될 때도 있어요. ‘내 아이’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아이들을 한 개인으로 존중해주면 좋겠다, 그 힘은 호칭과 언어에서부터 오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적어도 글을 쓸 때만큼은 아이들을 ‘씨’로 호칭해주면 내 아이를 넘어 존중해야 할 개인으로 보이지 않을까 싶었어요.”


김 작가의 글을 따라 읽다 보면 두 가지 시선이 동시에 느껴져요.
아주 개인적이면서 아주 사회적인.


“대학에서 논문을 쓸 때 제 글이 어떻게 사회와 연결될 수 있을까를 많이 고민했어요.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 논문은 지도교수와 심사위원, 본인 이렇게 셋만 읽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거든요. 그때부터 타인과 연결되고 싶었고, 제 글이 우리 공공선에 기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석사논문 주제는 뭐였습니까.

“100년 전쯤 출간된 기독교 잡지에 실린 문학을 연구했어요. 당시 ‘사회’라는 단어를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이웃 린(隣)’ 단어를 만났습니다. 먼저 손을 내밀고, 사유하고 공감하는 관계를 만드는 게 사회라는 내용을 봤고, 결국 사회라는 건 연결된 개인들의 총합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내용의 논문을 학회에 보낸 날 신기하게도 첫째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을 꼭 ‘린’으로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집안 어른들의 반대로 첫째 아이 이름은 작명소에서 지었습니다. 둘째가 태어나면 ‘린’으로 짓겠다고 했고, 그 바람대로 됐어요.”


김대흔 씨, 김린 씨가 어떤 사람이면 좋겠어요?

“어휴, 엄청난 질문인데요? 마침 오늘 대흔 씨 학교에서 가정통신문 같은 게 왔어요. 아이의 성장을 지켜본 학부모로서 아이에게 글을 써달라는. (자신의 휴대폰을 열어 보이며) 이렇게 썼습니다.”


다감한 사람이라.

“김대흔 씨가 다감한 사람이면 좋겠고, 그 다정함과 다감함을 언어로 정서화할 수 있는 사람이길 바랍니다. 김린 씨는 이름처럼 살면 좋겠습니다. 작은 모닥불이 되어서 타인의 처지에서 사유하고 그들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 둘 다 크게 타오르지 않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주변에서 크게 타오르는 사람들을 많이 봐요. 정말 정의롭고 멋져서 구경까지 오는. 그런 분들은 그런데 너무 크게 타올라서 주변에 피해를 주거나 금방 사그라들어 재만 남는 경우가 많아요. 저는 그것보다 오히려 작게, 은은하게, 오래 타오르는 모닥불이 더 많은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는 큰불이라는 생각을 안 해봤어요?
큰불에는 여러 의미가 있을 텐데요.


“저는 스스로 큰불이 못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작은 불이 되고 싶어요. 대신 사람들이 저에게서 불씨를 나눠 가져가서 아주 많은 모닥불들이 생기는 건 환영해요.”



김 작가의 글은 집이란 무엇이고, 가족이란 어떠해야 하며, 중심을 놓치지 않는 삶이란 어떠해야 하는지 같은 뿌리 깊은 질문을 던져요.

“그 질문에 대해서는 다음 책으로 쓸 것 같아요. 강릉에 대한 이야기도요. 사실 강릉에서의 삶은 원주에서와 크게 달라진 게 없어요. 바다가 있어서 좀 더 푸르러졌기는 하지만, 그건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제가 바다가 된 건 아니니까요. 중요한 건 바다 같은 사람들과 살아가는 일, 그리고 내가 바다가 되는 일이에요. 어떻게 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바다처럼 대할 수 있을까 계속 고민하고 있어요.”


우리는 뭐가 중요한지를 알면서도 타인의 성취를 욕망하곤 하잖아요.
삶의 본질에 가까운 순진무구함을 실천하면서 사는 김 작가의 삶, 귀하고도 존경스럽습니다.
그래서 이런 글을 쓸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저는 제 글을 규정할 수 없어요. ‘이래도 되나?’라는 생각을 종종 하거든요.”


‘이래도 되나’는 어떤 차원인가요.

“‘이건 무슨 글이지?’라는 겁니다. 대학에서 논문 쓸 때는 명확했어요. 가장 어려운 글. 인터넷 유머 게시판에 쓴 글은 가장 가벼운 글. 그런데 제 책의 무게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다만 글을 쓸 때 가장 쉬운 단어를 고민합니다. 쉬우면서 그 자리에 어울리는 단어. 어디에 쉼표가 있고 없어야, 어디에 조사가 있고 없어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읽기 편할까를 고민합니다. 누군가가 보기에는 가볍지만, 우리 사회의 가장 무거운 부분을 담아내고 싶은 마음은 항상 있어요. 그래서 ‘이래도 되나’라는 생각을 늘 합니다. 장르를 굳이 붙이자면 김민섭이라는 장르로 계속 써나가고 싶어요.”


가장 쉬운 언어에 우리 사회의 가장 무거운 부분을 담곤 하죠.
그 병증을 건드리면서 대안까지 제시해 ‘사회 지향 에세이’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에세이는 개인에게 침잠하잖아요. 저는 개인이 침잠해야 할 곳은 타인과 사회라고 생각해요. 저로 시작하는 에세이지만 타인에서 끝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씁니다. 제 책을 읽은 후 마음에 물음표 하나씩 생기게 하는 건 제 역할일 수 있겠다 싶어요.”


마지막 질문이에요.
작가와 대리기사 외에도 정미소라는 1인 출판사를 열었고, 북크루라는 스타트업도 시작했어요.
이 많은 역할들의 쓸모는 뭔가요.


“저는 저를 소진시키며 글을 쓰는 사람이어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이제까지 일곱 권을 내왔는데, 말도 안 되는 여정이라고 생각해요. 언젠가는 소진될 텐데, 그런 저를 꾸역꾸역 잡고 가는 것보다 저보다 젊은 작가들, 그러나 출간하기엔 현실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가서 ‘저와 함께 책 한 권 만들어보시지 않을래요?’라고 물을 수 있다면 괜찮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미소라는 이름은 개인들의 고백을 도정하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북크루는 작가로서 독자와 연결되고 싶은 욕망에서 만든 겁니다. 북크루에 와서 작가들의 글도 구독하고, 작가들을 초청해서 만나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이번 책을 낸 후 김민섭 작가는 또 일을 벌였다. 일명 ‘당잘좋’ 프로젝트로, 헌혈을 한 후 인증샷을 그에게 보내면 자신의 책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를 보내주는 이벤트다. 그는 이제까지 77번의 헌혈을 했다. 주사 맞는 걸 끔찍이도 무서워하는 그가 헌혈을 시작한 건 사회적 가치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피를 보면서 울었다고 했다. ‘저 피는 자신의 논문과는 다르게 누군가에게 쓰이겠구나’ 싶어서. 이후로 그는 종종 자신의 쓸모를 생각하면서 헌혈의 집을 찾는다.

그는 눈물이 많다. 이날 인터뷰 도중에도 눈물샘이 터져버렸다. “김대흔 씨가 동네 착한 형이 되면 좋겠다”는 말을 이어가던 중이었다. 눈이 빨개지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 누가 울면 따라 우는 나도 울고, 동석한 창비교육의 이혜선 편집자도 울었다. 눈물의 이유와 의미는 셋 다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착한 동네 형들이 잘되면 좋겠다’는 마음을 나눴다는 사실이리라.
  • 2021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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