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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부부가 예술가에게 보내는 편지 (16)

눈물의 시인 박용래 선생께 下

눈물 뒤에 오는 것

“선생님은 가엾고 무구한 존재들에게 갸륵한 마음을 품었지요.
자기 연민으로 운 게 아니라, 태어난 존재의 쓸쓸함을 보듬으며 흘린 눈물이라 생각합니다. (중략) 물론 선생님의 눈물은 제 눈물과 차원이 다릅니다. 선생님의 시를 보세요. 쓸데없는 말은 한마디도 허용하지 않는 결백한 자세, 극치만을 다루는 미감. 싸구려 감상은 어디에도 없어요. 선생님 시를 읽을 때마다 생각합니다.
눈물 뒤에 오는 것, 그것이 당신에겐 정갈한 시 몇 편이었겠구나.
소금 몇 알처럼 남는 투명한 시들.”
봄기운을 시샘하듯 눈이 내렸었는데요. 오늘 나가보니 볕에서 제법 봄 냄새가 나고, 음지에 남았던 눈마저 싹 녹았더군요. 산책길엔 봄싹들 돋아난 나뭇가지도 발견했어요. 탄성을 지르며 야단이었습니다. 선생님이라면, 연두싹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을라나요. “어디 있다 이제 나타난 겨, 이 가엾은 것들아. 잉?” 하셨을지 모르죠. 선생님 시집 뒤에 발문을 쓴 작가 이문구는 “울지 않은 그를 두 번밖에 못 보았을 정도”라며 “눈물의 시인”이라 칭했지요.

“그러나 박 시인의 눈물은 아무나 흘릴 수 있는 여느 중생들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는 가난에 울지 않았고 애달픔에 울지 않았고 외로움에 울지 않았다. 그렇다. 그로 하여금 눈물을 자아내게 한 것은 삶의 부질없음, 누리는 것의 덧없음, 헤어짐의 속절없음 따위, 인생의 유전(流轉)에서 오는 삼재팔난(三災八難)이 아니었다.
(중략)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언제나 그의 눈물을 불렀다. 갸륵한 것, 어여쁜 것, 소박한 것, 조촐한 것, 조용한 것, 알뜰한 것, 인간의 손을 안 탄 것, 문명의 때가 아니 묻은 것, 임자가 없는 것, 아무렇게나 버려진 것, 갓 태어난 것,
저절로 묵은 것….”
- 《먼 바다》, 박용래, 창비, 235쪽.


선생님은 가엾고 무구한 존재들에게 갸륵한 마음을 품었지요. 자기 연민으로 운 게 아니라, 태어난 존재의 쓸쓸함을 보듬으며 흘린 눈물이라 생각합니다. 시집을 펼치면 책날개에 선생님 사진이 나오는데요. 그 사진을 보다 알았습니다. 다양한 얼굴형―동그란 형, 넓적한 형, 네모난 형, 역삼각형, 마름모형―중에 ‘눈물형’ 얼굴도 있다는 걸요. 그 많은 모양 중 당신은 꼭 눈물 모양을 닮았다니까요! 새초롬하니,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눈물 모양을 하고 계시니!
누가 울보 아니랄까 봐 얼굴까지 눈물을 닮으셨나요? (까부는 걸 용서하세요.)

울 때 우리에겐 어떤 일이 벌어지나요?

감정의 막에 균열이 생기고 보송하니 말라 있던 영혼에 물기가 차오르죠. 눈물의 첫 도착지는 ‘코’입니다. 코가 시큰해지는 일은 출발을 위해 엔진에 시동을 거는 일과 같아요. 흔히 우리가 눈빛이라 하는, ‘눈에 빛이 서리는 일’은 눈이 액체에 가깝다고 상상하게 하지요. 그러니 눈을 얼굴에 난 두 개의 작은 연못이라 생각해도 좋지요. 간혹 그 연못이 홍수로 넘치는 일은 ‘우는 일’이고요. 코에 도착한 눈물은 곧바로 눈으로 달려갑니다. 방수 능력이 좋은 피부에서 미끄럼을 타고 활개 치죠. 콧물과 눈물은 세트로 다녀요. 얼굴 전체에 열이 오릅니다. 눈·코·입이 차례로 부풀어 오르고 몸과 마음은 기세가 꺾여 순해지고, 자꾸 하품이 납니다.

울다 잠든 사람은 깨고 나서 영혼 몇 그램이 휘발된 듯, 존재의 어딘가가 가벼워졌다고 느낍니다. 독기가 빠진 느낌이죠. 눈물은 고통의 덩치를 분쇄하고(사라지게 하진 못하지만), 마음의 때를 씻기는 게 분명해요. 많이 우는 사람은 내면이 깨끗한 사람이라고 저는 믿어요.

문득 싱거운 상상을 해봅니다. 책값에 ‘눈물 비용’을 매긴다면, 그러니까 작가가 글을 쓴 기간 동안 흘린 눈물의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법이 생긴다면? 선생님 시집엔 비싼 값이 매겨질 테고, 선생님은 돈방석에 앉을 수도 있었겠지요!

돈 욕심을 내는 작가들은 너도나도 글을 쓰기 전에 허벅지를 꼬집거나 하품을 해대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는 통곡 소리와 세트로 들리는 경우가 허다할지 모르죠. 눈물이 값이 나간다면야 그렇지 않겠어요? 혼자 상상으로 멀리 갔네요. 이런 상상을 하는 이유는 이 시대가 ‘눈물 값’을 너무 박하게 매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매스컴이나 SNS를 보면 알 수 있듯, 사람들은 대체로 가볍고 즐거운 것을 좋아하지요. 쿨한 것, 재밌는 것, ‘인싸’들의 언행을 높이 치고요. 그렇지만 누군가는 ‘눈물의 가치’를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

오래전부터 저는 스스로 ‘박용래 계열’의 시인이라고 생각했어요. 굳이 계열을 나눈다면 말이지요. 저 또한 어디 가서 지지 않을 정도로 잘 울던 사람이었거든요. 울기 시작하면 한두 시간은 우습게 울었죠. 그 무렵 《소란》이란 첫 산문집을 냈는데, 몇몇 독자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어요. 그분들이 부족한 제 책을 좋아해준 이유를 몰랐는데, 편지를 쓰는 도중에 깨달았어요.

그 책 곳곳에 눈물이 샘처럼 고여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눈물 비용’을 알아봐준 분들이 계시는 거죠. 울고 난 뒤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쓴 이야기들을요.

물론 선생님의 눈물은 제 눈물과 차원이 다릅니다. 선생님의 시를 보세요. 쓸데없는 말은 한마디도 허용하지 않는 결백한 자세, 극치만을 다루는 미감. 싸구려 감상은 어디에도 없어요. 선생님 시를 읽을 때마다 생각합니다. 눈물 뒤에 오는 것, 그것이 당신에겐 정갈한 시 몇 편이었겠구나. 소금 몇 알처럼 남는 투명한 시들.

“한때 나는 한 봉지 솜과자였다가/ 한때 나는 한 봉지 붕어빵였다가/ 한때 나는 좌판에 던져진 햇살였다가/ 중국집 처마밑 조롱 속의 새였다가/ 먼 먼 윤회 끝/ 이제는 돌아와/ 오류동의 동전.”
- 〈오류동의 동전〉


저와 남편은 성격도 다르고 독서 취향도 다른데, 언제나 ‘박용래’에서 합의(?)를 봅니다.

“거 참 좋다. 그치? 박용래는 진짜야. 이렇게 쓸 수도, 이렇게 살 수도 없지. 귀하고 귀해.”

아름다운 합일을 이루지요. 선생님은 하필 또 과작이어서, 시 전집이라고 해도 엄지손톱 두께나 겨우 될 만한 시집 한 권을 남기셨지요. (그래서 더 귀합니다!) 집필한 다른 책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저희 부부는 선생님 시집을 읽고 또 읽습니다. 안 보이면 찾아 나서느라 난리입니다. 제 책상 아니면 남편 책상 근처에서 꼭 발견되지요. 책이 산더미처럼 쌓인 저희 집에서 늘 특권대우를 받는 시인은 당신입니다. 늘 선생님 시집을 곁에 둔다는 말이에요. 듣기 좋으신가요?

이 편지를 작은 카페에서 쓰고 있는데요. 카페 화장실 세면대에 이런 글귀가 붙어 있네요. “수도에서 나오는 물은 저희의 눈물이에요.

꼭 잠가주세요. 저희가 눈물 흘리지 않게 해주세요!”

눈물 얘길 하는 중에 이런 문장을 보다니 신기하네요.

선생님, 그곳에선 부디 눈물을 덜 흘리시길 바랄게요. 물론 참지는 마세요. 울고 싶을 땐 실컷 우세요. 그다음 ‘눈물의 기미’만 살포시 남은, 시를 써주세요. 저도 노력하겠습니다.

박연준
파주에 살며, 일주일에 세 번 발레를 배운다. 창문, 숲, 기러기를 좋아한다.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베누스 푸디카》 《밤, 비, 뱀》이 있고, 산문집 《소란》 《밤은 길고 괴롭습니다》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등을 썼다.
  • 2021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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