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부부가 예술가에게 보내는 편지 (14)

스물아홉에 세상을 뜬 영원한 청년 풍류가객 배호! 下

흐르는 것들

“당신의 목소리는 낮고 굵고 애절합니다.
극적이고 절제되어 있는 한편 중간 중간 쉼표처럼 흐느낌이 끼어 있지요.
체념도 흥도, 쉼도 질주도 모두 들어 있는 소리입니다.
뱃고동 소리를 닮았어요.”
배호 선생님, 저는 선생님보다 나이가 많습니다. 당신이 죽은 나이에서 열 살은 더 많네요. 선생님은 서른이 안 되어 요절했고, 전설이 되었고, 여기저기에 목소리로 흩어져 남아 있습니다. 짧은 생애를 살고도 전설이 된 당신은 1980년에 태어난 제 귀에까지 도착했지요. 맨 처음 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은 건 늦은 밤 라디오에서였습니다. 당신이 떠난 나이와 비슷한 나이를 보내던 때, 인생은 참 속절없이 흐르는 거라고, (건방진) 생각을 하던 밤이었지요. 선생님이 부른 ‘과거는 흘러갔다’란 곡을 듣는데 마치 제 몸 전체로 소리가 침투해 오는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꽉 쥔 주먹 같은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렸다는 걸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네요.

그 노래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즐거웠던 그날이 올 수 있다면
아련히 떠오르는 과거로 돌아가서
지금의 내 심정을 전해보련만
아무리 뉘우쳐도 과거는 흘러갔다”


글자로 적어놓으니 심상하게만 보이네요. 속상하게도요. 그렇지만 당신이 이 노래를 한 소절 부른다면, 부르기만 한다면 몸과 마음이 전복되어버리지요. ‘여운’이란 가수가 부른 버전도 있지만, 아무래도 전 선생님이 부른 ‘과거는 흘러갔다’가 좋습니다. 과거란 돌이킬 수 없는 시간, 흘러간 강물이란 걸 선생님의 목소리를 통해 뼈에 새길 수 있거든요. 젊디젊은 서른 살 처녀애에게 통탄할 과거란 게 뭐 있을까, 누가 물어도 할 말은 없습니다. 그저 선험적으로 몸에 새겨진 것들, 우주에 떠도는 죽은 시간들, 인류가 쌓아온 눈물과 회한, 오래 묵은 ‘뉘우침’ 따위가 아팠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 뉘우침은 후회와는 결이 좀 다르지 않나요? 후회에는 격식, 자기 연민, 옛날로부터의 거리 같은 게 있지만 뉘우침에는…. 뉘우침엔 꿇은 무릎, 눈물과 콧물 그리고 아주 ‘가버린’ 무엇이 있을 뿐입니다. 후회에는 약간의 기대(수정에 대한)가 남아 있을지 모르나 뉘우침엔 없지요. 뉘우침은 유다나 베드로에게 속한 것, 돌이킬 수 없는 것, 날아간 연기지요.

그 밤 저는 흐느껴 울었습니다. 눈을 비비며 울었습니다.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면서, 어찌할 수 없어 울었습니다. 눈물이여 눈물이여 내리는 눈물이여, 속삭이며 울었습니다. 그 밤으로부터 저는 당신의 팬이 되었지요.

당신의 목소리는 낮고 굵고 애절합니다. 극적이고 절제되어 있는 한편 중간 중간 쉼표처럼 흐느낌이 끼어 있지요. 체념도 흥도, 쉼도 질주도 모두 들어 있는 소리입니다. 뱃고동 소리를 닮았어요. 사람들이 뱃고동 소리를 듣고 향수를 느낀다면 왜일까요? 뱃고동 소리엔 떠나가는 자의 뒷모습이 담겨 있기 때문일까요? 떠나가는 자와 남아 있는 자의 미련을 대변하듯, 길게 이어지기 때문일까요?

선생님, 노래를 잘한다는 게 뭘까요?

저는 음정과 박자를 정확히 맞춰 소리를 내는 ‘스킬’을 갖춘 것과는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전혀 다르지요. 결점이 없는 완전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해도, 감흥이 없는 경우가 있지요. 노래를 잘한다는 건 몸에 든 ‘감정과 생각’이 소리를 빌려 듣는 이 쪽으로 얼마나 잘 ‘전달’되는가의 문제에 달려 있는 게 아닐까요? 마음이 이쪽에서 그쪽으로 ‘건너’가려면, 가기까지 많은 실패의 위험에 놓일 텐데요.

그 모든 실패의 위험을 무릅쓰고 간곡함으로 소리와 ‘같이’ 갈 때, 듣는 이에게 무사히 전달될 때 전율이 일어나지요.

1968년 MBC 개국 7주년을 축하하는 자리로 마련된 ‘10대 가수 청백전’ 기억하시나요?

당신은 청군 대표로 참가했습니다. 사회자는 코미디언 이기동 선생이었지요. 당시 사회자가 막 들어온 ‘축전’을 읽어주는 대목이 흥미로웠습니다. 높은 자리에 있는 누구누구부터 원양어업 선단 일동까지, 축하의 메시지를 전보로 보내온 거예요. 우체국에 가 전보를 치고, 그 전보를 배달하고, 도착한 전보들을 추려 소개하기까지의 시간이 그려졌습니다. 놀라시겠지만 지금은 스마트폰 문자메시지가 있어 시청자들이 실시간으로 방송에 참여할 수 있답니다.

유튜브를 통해 직접 콘텐츠를 만들고 방송을 꾸려나가는 사람들도 많아요. 10대 가수 청백전에서 당신이 ‘안개 속으로 가버린 사람’ ‘누가 울어’ ‘안녕’을 메들리로 부르는 것도 유튜브로 보았는 걸요.

지금 저는 “사랑이라면 하지 말 것을”, 이렇게 시작하는 ‘안개속으로 가버린 사람’을 듣고 있습니다. 병색 탓인지 까무잡잡한 얼굴의 선생님 모습이 화면에 떠 있습니다. 1968년, 프랑스에선 68혁명이, 체코에선 프라하의 봄이, 베트남에선 전쟁이, 세계 곳곳에선 젊은이들이 반전과 평화를 부르짖던 때 당신은 병마와 싸우며 묵묵히 노래를 부르고 있었겠지요. 몇 년 지나지 않아 당신이 죽던 날까지, 선생님은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면서까지 끝까지 노래를 부르다 가셨습니다. 1942년에서 1971년. 일제강점기, 대한독립, 한국전쟁, 민주주의국가 수립 후 크고 작은 사건들까지. 당신은 격동의 시대를 겪으셨을 테지요. 고단함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살던 사람들에게 선생님의 노래는 힘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2021년, 지금 한국은 다시 트로트 전성시대입니다. 여기저기에서 경연대회를 열어 신인가수를 뽑고, 누구나 할 것 없이 프로그램을 시청하며 즐깁니다. 트로트 팬층이 넓어지고, 따라 부르며 일상의 시름을 잊는 사람이 늘어났어요.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피로한 감이 없지 않지만, 노래로 마음을 달래는 일은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시를 쓰는 사람인데요, 노래가 시의 한 부분에서 떨어져 나와 자력갱생으로 뻗어나간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노래의 힘은 시보다 세지요. 그건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노래를 쉽게 소유하고 퍼트리고 향유하지요. 정치가들이 선전 도구로 노래를 사용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노래를 이길 수 있는 게 많지 않기 때문이지요. 알파벳이나 복잡한 역사 계보를 외울 때도 노래를 사용하면 쉬워지죠. 무엇보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담아내는 데엔 노래만 한 게 없습니다.

술을 마시며 한 자락, 친구들과 취해 길을 걸으며 한 자락, 혼자 앉은 밤 창밖을 내다보며 한 자락…….

돌아가신 아버지는 취하면 최진희의 ‘꼬마인형’을 잘 불렀어요. 한 해의 끝자락엔 피아노에 앉아 ‘Auld Lang Syne(그리운 옛날)’을 반복해 연주했고요. 어릴 때 저는 조용필의 ‘해변의 여인’을 피아노로 연주하는 할머니의 발치에 앉아 놀았어요. 음악을 들으며 놀았지요. 흐르는 게 노래인지 삶인지 구분이 안 가던 시절이었어요. 옛날에 살던,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고 싶을 때면 당신이 부른 ‘과거는 흘러갔다’를 들을 거예요. 부르다가 꽉 쥔 주먹 같은 얼굴로 조금 울지도 몰라요.

눈물, 노래, 강물. 저는 흐르는 것들을 좋아합니다. 그곳의 시간은 평안히 흐르길.

박연준
파주에 살며, 일주일에 세 번 발레를 배운다. 창문, 숲, 기러기를 좋아한다.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베누스 푸디카》 《밤, 비, 뱀》이 있고, 산문집 《소란》 《밤은 길고 괴롭습니다》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등을 썼다.
  • 2021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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