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이슬의 커피코피해피#14

그 남자의 연락을 기다리며

글 : 강이슬 

며칠째 어떤 남자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 곧바로 연락을 주겠다던 남자는 일주일이 다 되도록 감감무소식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대와 믿음이 희미하게 빛바래면서 기분 나쁜 확신이 또렷해진다. 아무래도 나는 삥을 뜯긴 것 같다.

지난주 홍대역 개찰구에서 그 남자를 만났다. 60대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는 내 눈을 빤히 쳐다보며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슬쩍 몸을 돌려 피해가려다 눈 밑까지 가린 그의 커다란 마스크가 달싹거려서 그가 나에게 말을 걸고 있음을 알아챘다. 길을 묻는 건가 싶어 서둘러 이어폰을 빼고 그에게 귀를 기울였다.


“내가 요금이 부족해서, 좀 도와줄 수 있을까요?”

“저, 학생, 내가 운서역엘 가야 하는데 요금이 부족해가지고. 혹시 안 바쁘면 좀 도와줄 수 있을까요?”

그가 운서역까지 가는 요금을 충전해달라며 교통카드를 내밀었다. 내가 난감한 기색을 표하자 그가 주머니에서 메모지와 볼펜을 서둘러 꺼내며 말했다.

“학생, 여기에 계좌번호를 적어줘요. 내가 나이가 많아서 그… 휴대폰으로 계좌이체 하는 방법은 모르고, 내일 은행에 들러서 필히 돈을 보낼게요,”

몇 년 전 일본 여행에서 겪은 일이 떠올랐다. 오사카의 낯선 거리에서 마주친 내 또래의 남자는 나에게 한국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그는 “살았다”라고 말하며 함박웃음을 짓다가 이내 난처한 표정으로 500엔만 빌려줄 수 있냐고 물었다. 소매치기를 당하는 바람에 몇 시간째 거리에서 숙소로 돌아갈 차비를 구걸하고 있는 중이라는 얘기도 덧붙였다.

나는 타국 땅에서 만난 한국인에게 깊은 동질감과 안타까움을 느끼며 선뜻 1000엔을 빌려줬다. 그는 나에게 펜을 빌려 자신의 손목에 내 계좌번호를 적은 뒤 숙소로 돌아가 송금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뒤돌아 떠났다.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돈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60대 남자의 얼굴을 보며 새삼 깨달았다. 그가 꼬깃꼬깃한 메모지를 들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스크에 얼굴이 반 이상 가려진 탓에 그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라면 어쩌지, 주름진 그의 눈매와 일본에서 만난 남자의 눈매가 오버랩됐다. 퇴근 시간대의 홍대역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지갑을 놓고 왔다고 거짓말한 뒤 자리를 피하면 이곳을 지나는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쯤은 이 남자를 도와주지 않을까, 속으로 계산하는데 내 망설임을 읽었는지 남자가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했다.

“곤란하게 해서 미안해요. 벌써 몇 사람이 거절해가지고 집에 가지도 못 하고. 필히 내일 송금할게요.”

나는 남자가 건넨 작은 메모지에 계좌번호를 적었다. 혹시 몰라 내 연락처까지 또박또박 적었다. 얼마를 충전하면 되느냐는 내 질문에 남자는 1만 원만 해달라고 대답했다. 나는 홍대역에서 운서역까지 가는 요금을 검색한 뒤 그의 교통카드에 5000원을 충전했다. 그의 연락처를 따로 받아두고 싶었지만 어르신을 대놓고 의심하는 티를 내기 불편해 관두었다.


나이가 들수록 선의 앞에 움츠러드는 몸

집으로 돌아가는 길, 방금 겪은 일을 친구에게 카톡으로 전했더니 친구는 물러터진 바보라고 나를 놀렸다. 보란 듯이 그 남자의 송금 내역을 캡처해서 보내며 친구의 말을 반박하고 싶었는데 영 그른 것 같다. 5000원 삥 뜯긴 덕에 인생 공부 하나 했다고 마음을 다잡고 싶지만 그러기엔 속이 너무 쓰다. 착하게 살수록 바보가 되는 거라던, 절대로 믿고 싶지 않은 말을 스스로 증명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다. 나이가 들수록 선의 앞에서 몸을 움츠리게 된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더 많다고 믿고 싶은데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아득하게 먼 곳에서만 들려오고 추한 이야기들만 내 삶에 바짝 붙어 있는 것 같다.
그가 나에게 늦어서 미안하다는 문자와 함께 5000원을 보냈으면 좋겠다. 돈 때문이 아니다. 늦게라도 이 이야기를 훈훈하게 끝맺고 싶기 때문이다. 자꾸만 얼어붙는 이 시대의 정과 인심을 조금이나마 녹여보고 싶기 때문이다.

글쓴이 강이슬은 〈SNL 코리아〉 〈인생술집〉 〈놀라운 토요일〉 등 TV 프로그램에서 근면하게 일하며 소소하게 버는 방송작가다.
제6회 카카오 브런치북 프로젝트에서 《안 느끼한 산문집》으로 대상을 받고 출판 계약을 하며 난생처음 갑이 된 데 이어 《새드엔딩은 없다》까지 출간했다.
술과 개와 밤을 좋아하고 욕을 잘하지만 착하다. 어제도 오늘도 가난했고 내일도 가난하겠지만 가난을 팔아 돈을 벌겠다는 야심 찬 포부를 가지고 있다.
  • 2021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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