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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부부가 예술가에게 보내는 편지 (13)

로맹 가리, 새들은 왜 페루에 가서 죽는 걸까요? 下

고요한 밤, 이야기들

산다는 게 뭘까요?
벽을 향해 몸을 던지는 작은 돌멩이가 되는 일일까요?
어리석음으로 빛나는 사람 하나를 품는 일?
누군가 벽은 그저 벽일 뿐 문이 될 수 없다고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는 일일까요?
들어오려는 옛날의 나와 나가려는 오늘의 내가
벽을 사이에 두고 화해하는 일?
작은 돌멩이로서, 저는 벽 두드리기를 멈추지 않겠습니다.
꿈 이야기를 먼저 할게요. 아는 선배가 집에 놀러 왔어요. 그는 식탁에 앉아 커피 한잔을 청해 마시고,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하더군요. 가볍고 소소한 이야기였어요. 뒤돌아서면 잊히는. 그러다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그는 운동화를 꺾어 신고는 가버렸습니다. 좀 쉬려는데 이어서 아는 후배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오더군요.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자꾸 사람들이 오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죠. 후배가 배고프다고 해서 밥을 차려줬습니다. 그는 수저를 든 채 시 쓰는 일의 어려움을 토로하더군요. 알지. 그럼. 그럴 거야. 몇 번 맞장구를 쳐주고 나니 침묵이 내려앉았습니다. 침묵을 견디느라 고단한 차에 그가 일어서더군요. 그런데 현관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둘이 번갈아가며 손잡이를 비틀어보고, 몸으로 문을 밀어도 보았지만 요지부동이었어요. 문을 벽처럼 두고, 우리는 무력하게 서 있었습니다.

밖에 누가 있나. 갇힌 건가. 집에는 어떻게 가지. 말을 주고받다 문에 기댔는데, 문이 스르륵 열렸습니다. 밖에 누가 등을 보인 채 서 있더군요. 연보라색의 짧은 원피스를 입은 소녀였습니다. 민소매에다 길이가 티셔츠만큼 짧았기에 가느다란 팔다리가 드러나 보였어요. 그 애를 보는 순간 엮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후배를 내보내고 재빨리 현관문을 닫으려 했습니다. 그때 소녀가 문틈으로 몸 한쪽을 들이밀더니 닫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다급한 동작이었어요. 저는 소녀와 오랫동안 실랑이를 벌였어요. 들이지 않으려는 자와 들어오려는 자, 문을 열려는 자와 열어주지 않으려는 자가 뒤섞여 당최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 사이,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왜 이런 꿈을 꿨을까 생각하다, 깨달았어요. 그 소녀가 나구나. 나였던 거구나.

로맹.

저는 그저 당신에게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냥 꿈이고, 이야기지요. 중요하지 않은 듯 보이지만, 어쩌면 중요할지도 모를 이야기요. 일상을 가로질러 유유히 사라지는, ‘작지만 큰’ 이야기들이요. 말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때때로 두려움을 느낍니다. 별안간 진실이 보일 때. 누가 망원경을 건넨 것처럼, 진실이 내 코앞에 앉은 것처럼 또렷이 보일 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실을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옷을 입지 않은 것, 눈이 형형한 것, 존재를 갑자기 꺼트릴 수 있는 것, 멀리서 우리를 채찍질하며 깨어 있게 하는 것이니까요. 저는 생각합니다. 좋은 작가는 진실에 복무하기 위해 한평생을 종이 위에 매달려 보내는 사람이라고요. 당신이 그런 것처럼요. 물론 당신은 진실 위에 소량의 ‘환상’을 올려두려 한 사람이지만(미끄러져도 계속!), 그게 당신의 단점이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당신의 순진함과 성심이 드러난 행동, 당신의 특별함이라 생각합니다. 순진함과 성심은 작가가 갖기 어려운 덕목이고 거기에 영민함과 재능이 더해지면 무적이 될 수 있다고 믿어요.

“나는 꼬부랑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살면서 당신에게 내 추억을 줄 거야. 조국을, 땅을, 샘을, 정원과 집을, 요컨대 여자의 빛을 포기하지 않을 거야. 엉덩이의 흔들림, 머리카락의 흩날림, 우리가 함께 만든 주름들. 그러면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게 되겠지. 나는 여성적인 나라를 포기하지 않을 거야.” 1)

당신은 어느 소설에서 이렇게 말하는 주인공을 등장시킨 적 있습니다. 흔들림이나 흩날림. 그건 저도 좋아하는 거예요. 인터뷰나 몇 편의 글을 통해 당신은 여러 번 이야기했어요. 여성성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게 단지 생물학적 여성성만을 의미하는 건 아닐 거예요. 세계를 다독일 수 있는 여성적인 카리스마, 고귀함, 부드러움이 내포되어 있는 거겠죠. 모국어, 시, 사랑 따위는 여성성을 대표하는 것들이죠. 물론 제가 여성에 대한 당신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건 아닙니다. (지금은 그에 대해 얘기하지 않겠지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거예요. 당신이 가진 영혼의 부드러움, 아름답고 순한 존재에 대한 동경, 가난하고 약한 자에 대한 사랑, 상처 입은 자에 대한 연민, 여성적인 것이 언제나 옳다는 신념(이상적일지라도!)에 대한 이야기죠. 이런 당신의 기질이 소설에 깃들 때, 그 이야기를 읽는 일은 말할 수 없이 행복합니다.

로맹. 당신은 제가 20대 때 가장 사랑하던 작가 중 하나였습니다. 늘 읽었지요. 그래서 당신에겐 더 할 말이 없어요. 책을 읽으며, 아주 오랫동안 당신과 대화를 나누었다고 믿거든요.

《유럽의 교육》 《새벽의 약속》 《하늘의 뿌리》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인간의 문제》 《자기 앞의 생》 《그로칼랭》 《흰 개》 《여자의 빛》…. 당신이 쓴 이야기들은 많고, 저는 그걸 천천히 읽었지요. 저는 촌철살인이 빛나는 당신의 묘사를 좋아했습니다. 한 사람의 눈을 두고 “마치 아물지 않는 상처처럼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부드럽고 커다란 갈색 눈”이라고 표현하는 사람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 문장을 보고 놀란 이유는 돌아가시기 전 할머니의 눈빛이 꼭 그랬기 때문이에요. 빛을 반사하는 강물 같은 눈빛이요. 눈빛이 곧 물빛이라는 생각을 그때 했어요. 눈은 얼굴에서 작게 벌어진 한 쌍의 틈에 불과하지만, 영혼의 일부가 그 틈으로 비치지요.

로맹. 산다는 게 뭘까요? 벽을 향해 몸을 던지는 작은 돌멩이가 되는 일일까요? 어리석음으로 빛나는 사람 하나를 품는 일? 누군가 벽은 그저 벽일 뿐 문이 될 수 없다고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는 일일까요? 들어오려는 옛날의 나와 나가려는 오늘의 내가 벽을 사이에 두고 화해하는 일? 작은 돌멩이로서, 저는 벽 두드리기를 멈추지 않겠습니다.

이따금 진 세버그를 사랑할 때의 당신 마음을 상상해봅니다. 그 어둑한 애정, 상심한 채 깊어지는 사랑을요. 바보 같은 일이죠,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상대의 바보 같음까지 사랑하며, 내 바보 같음 또한 견디는 일일 테니까요. 말한들 뭐하겠어요. 로맹, 정말이지 말한들 뭐하겠어요.

저녁이 내려앉은 창가에서 남편이 묻더군요.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느냐고요. 오늘은 2020년 12월 2일인데, 무슨 날이냐고 되물었지요.

“1980년 오늘. 지금처럼 저녁 무렵. 로맹 가리가 죽었어.”

생각하면 슬퍼지지만, 그 일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네요. 오늘은 당신의 기일입니다. 40년 전 오늘, 저녁 무렵, 당신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요.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냐고 어린 ‘모모’가 물었고(《자기 앞의 생》), 당신이 죽음으로 대답한 날이지요.

당신이 보고 싶어요. 옛날에 본 적 있는 듯이. 그립다 하니, 마침 문장 하나가 유성처럼 내려앉네요.

“밤은 고요하리라.”

고요한 밤입니다.

1) 《여자의 빛》, 로맹 가리, 마음산책, 117쪽.

박연준
파주에 살며, 일주일에 세 번 발레를 배운다. 창문, 숲, 기러기를 좋아한다.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베누스 푸디카》 《밤, 비, 뱀》이 있고, 산문집 《소란》 《밤은 길고 괴롭습니다》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등을 썼다.
  • 2021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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