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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부부가 예술가에게 보내는 편지 (13)

로맹 가리, 새들은 왜 페루에 가서 죽는 걸까요? 上

자기 앞의 생, 새벽과 아침 사이

당신의 죽음은 단호하고 잔인했어요.
늘 죽음이 너무 과대평가되었다고 단언하고,
“다른 걸 찾으려고 애써봐야겠죠”라고 말했지요.
당신은 지상에서 이룬 것과 이루지 못한 꿈을 다 버리고
지금 다른 별에서 다른 생을 찾으려고 애쓰는 건가요?
새들은 왜 페루에 가서 죽을까요? 새들은 왜 세상의 끝, 희망의 끝, 모든 끝의 끝인 페루의 외로운 바닷가까지 날아와 죽을까요? 맨발로 모래 위를, 죽은 새들 한가운데를 걸어가는 여자…. 턱수염을 기르고 시거를 문 무성영화 시대의 배우 같은 로맹 가리(1914~1980).

당신의 사진을 바라봅니다. 안뜰의 우거진 나뭇잎들이 보이는 넓은 방에서 책들에 파묻혀 집필에 열중하는 당신. “난 글을 안 쓰고는 배길 수가 없어요. 생리적인 욕구지요. 글을 안 쓰면 병이 나고 맙니다. 내게 그건 일종의 배설 과정이지요”라고 말하는 당신. 아침 일곱 시 카페에서 긴 의자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거기 세상이 다 있다는 듯 《르 피가로》 《르 마탱》 《헤럴드 트리뷴》 《렉스프레스》 《르 푸앙》 《타임스》 《라이프》 등을 천천히 들여다보는 당신!

당신이 48세 때 내놓은 단편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읽던 시절은 아득히 멀리 있습니다. 사기꾼과 허풍쟁이, 거짓말을 달고 사는 정치꾼과 가면을 쓴 익살꾼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에서 삶이라는 게 하늘이 땅에 뿌린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약간이나마 눈치 챈 것은 스무 살 푸른 영혼의 시절이었지요. 이 천박하고 야비한 세상에서 웃음과 희망을, 사랑과 꿈을 잃고 대신에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소녀를 연모하며, 자기 안에 약간의 슬픔, 약간의 우수, 약간의 멜랑콜리만을 기르기로 굳은 결심을 한 소년도 한 명쯤은 있는 법이지요. 나는 현실이라는 운석과 충돌한 채 내면으로 추락해버린 자의 절망만이 양식이 될 수 있다고 믿으며, 한여름에 두꺼운 옷을 걸친 채 음악감상실 따위를 낭인처럼 떠돌거나 밤새워 이마를 벽에 짓찧으며 시 몇 줄을 얻곤 했어요.

1980년 12월 2일 저물 무렵, 파리에는 비가 내렸지요. 당신은 특수 38구경, 스미스 앤 웨슨 리볼버, 넘버 7099. 983을 입에 물고 오른손에 쥔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어요. 현장에서 즉사. 천공에서 빛나던 아름다운 별은 그렇게 떨어졌습니다. 다행히 당신 두개골은 날아가지 않은 채 온전했어요. 러시아 출신의 프랑스 작가인 당신의 인생은 그렇게 마침표를 찍고 말았지요. 당신의 주검을 검시한 법의학자는 “멋지고 인상적인 죽음”이라고 했지요.

당신이 죽던 해에 나는 스물다섯.

그때는 당신을 잘 몰랐지요. 몇 해 지나 《새벽의 약속》 같은 자전 소설을 읽으며 당신의 고단한 생의 여정과 어머니가 당신을 위해 헌신한 세월을 더듬을 수 있었어요. 당신이 내 뇌리에 각인된 것은 1976년 에밀 아자르라는 가면을 쓰고 내놓은 소설 《자기 앞의 생》과 만났을 때지요. 그 작품이 ‘공쿠르상’을 받은 뒤 국내 문학지 《문학사상》에 완역되어 소개된 것을 읽었어요. 에밀 아자르가 로맹 가리 당신이란 사실은 나중에 밝혀졌습니다.

가난한 러시아 이민자의 아들로 홀어머니와 함께 모스크바에서 ‘혁명과 궁핍의 발톱’을 피해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바르샤바를 경유해 프랑스 니스에 정착한 것은 당신이 13세 때였지요. 어머니는 니스에 정착한 뒤 프랑스를 숭배하며 멸시받는 이방인, 폴란드에서 이주해 온 유대인, 가난에 찌든 주변인인 외아들을 양육하는 데 최선을 다했어요. 어머니는 당뇨병을 앓으면서도 단 하루도 노동을 쉬지 않았습니다. 당신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라 마르세예즈’를 외우게 한 것도 당신의 어머니지요. 집안에 돈이 떨어질 때 어머니는 굶을지언정 당신 밥상에는 늘 고기를 올렸지요. 당신의 성공 뒤에는 어머니의 광기에 가까운 영웅적 헌신이라는 밑거름이 있었던 거지요. 당신도 그런 어머니의 모성에 응답이라도 하듯 《새벽의 약속》에서 이런 구절을 썼어요.

“짧은 반바지 차림으로 식탁 맞은편에 앉아 가끔 어머니를 향해 고개를 들 때면, 어머니에 대한 내 사랑을 담기에 세상이 너무 작은 것처럼 느껴졌다.”

니스에서 보낸 당신의 청소년기에는 친구가 없었습니다. 우울에 감싸인 채 자기 내면에 칩거하는 비사교적 소년에게 친구를 품을 만한 여유가 없었던 것이지요. 당신은 칸트와 스피노자 같은 철학자의 책들을 탐독하며, 아무도 봐주지 않는 시, 단편 소설, 희곡들을 썼어요. 쉴 새 없이 써나간 습작 원고들이 당신 서랍에 쌓였지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당신은 프랑스군에 입대해서 ‘자유프랑스’ 공군 예하의 비행 부대에 배속되지요. 당신은 드골에게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은 전쟁 영웅으로, 다시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세계적인 작가로 명성을 떨쳤어요. 당신의 첫 장편 《유럽의 교육》은 호평을 받지만 공쿠르상 수상에는 실패했습니다. 전후 프랑스의 물자 부족으로 종이 수급이 어려워 출판이 미뤄질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당신의

첫 소설은 1년 만에 8만 부가 팔려 나가는 큰 성공을 거두지요. 프랑스 문단은 ‘놀라운 발견’으로 당신의 등장을 반기고, 프랑스 언론들은 당신에 대한 온갖 ‘전설’을 지어냈습니다. 알베르 카뮈는 당신에게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만든 컬렉션에 참여해달라고 청탁하는 편지를 보냈어요.

당신이 프랑수아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에서 여주인공을 연기한 그토록 청순하고 발랄한 21세의 영화배우 진 세버그(Jean Seberg)를 만난 것은 45세 때. 당신과 진 세버그는 사랑에 빠져 스물넷이라는 나이 차를 극복하고 연인이 되었지요. 당신은 결혼 관계를 청산하고 49세에 진 세버그와 결혼하지만 불과 다섯 해 만에 합의 이혼을 합니다. 당신들의 사랑이 식은 것은 아니었어요. 진 세버그가 41세 때 파리 16구의 한 주택가에 세워진 흰색 르노 자동차에서 푸른색 담요를 뒤집어쓴 채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될 때까지 당신은 물심양면으로 보살폈지요.

당신의 자살은 진 세버그가 죽은 1979년 9월 8일, 그로부터 한 해 뒤에 일어난 비극. 그건 불가피한 사태인가요?

당신은 ‘검은 표범’이라는 급진 단체와 연루된 진 세버그가 미국정보기관(FBI)의 모함과 더러운 공작의 희생자라고 믿었어요. 당신은 진 세버그가 건네준 FBI에서 유출된 서류들을 공개했습니다. 당신의 자살과 진 세버그의 죽음을 굳이 연결하지는 않겠습니다만, 당신은 깊이 사랑했던 여인을 잃은 뒤 갑자기 늙어버렸습니다. 한 지인은 당신이 파리 시내 지하철에서 노선을 몰라 허둥대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했지요.

당신의 죽음은 단호하고 잔인했어요. 늘 죽음이 너무 과대평가되었다고 단언하고, “다른 걸 찾으려고 애써봐야겠죠”라고 말했지요. 당신은 지상에서 이룬 것과 이루지 못한 꿈을 다 버리고 지금 다른 별에서 다른 생을 찾으려고 애쓰는 건가요? 당신이 남긴 마지막 말을 독자에게 인사말 대신 전하지요.

한바탕 잘 놀았소. 고마웠소. 그럼 안녕히.

장석주
전업 작가. 파주에 살며, 음악과 산책을 좋아한다. 주로 글을 쓰거나 인문학 강연을 한다.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철학자의 사물들》 《이상과 모던뽀이들》 《마흔의 서재》 《일상의 인문학》 《호젓한 시간의 만에서》 등과, 아내인 박연준 시인과 함께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 《내 아침 인사 대신 읽어 보오》를 썼다.
  • 2021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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