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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부부가 예술가에게 보내는 편지 (12)

낡은 세계에 너무 일찍 도착한 선각자 나혜석! 下

플러스거나 마이너스인 삶

문득 서늘해집니다.
남성이라면 하지 않아도 되었을 존재 증명,
존재의 평등할 권리를 당신으로부터 작금의 여성들까지,
이토록 오래 주창해야 하다니요.
“나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후회합니다”라고 당신은 말했지만,
기억하세요. 당신을 괴롭힌 시대와
남성중심사회의 사람들은 잊히지만, 당신은 아니에요.
당신 이름 ‘나혜석’은 비석처럼 남아 있습니다.
자화상, 1928 추정, 캔버스에 유채, 88x75cm,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소장. © 뉴시스
먼저 당신 이름 석 자를 불러보고 싶습니다.
나혜석. 단단하게 빛나는 비석처럼 다가오는 이름입니다.

당신이 떠난 뒤 약 7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당신 이후, 이 땅에 글을 쓰고 예술을 하는 많은 여성이 태어났습니다. 당신 이후, 여성의 지위는 조금씩 올랐다고도 하고 아직 갈 길이 멀다고도 하지만, 당신 이후, 많은 게 바뀌었습니다. 어제 글을 한 편 썼습니다. ‘여류’라는 수식어를 (아직도) 붙여 말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해 쓴 글이지요. 여류 시인, 여류 작가, 여류 문학, 여류 인사…. 당신이 살던 시대에는 더했겠지요? 그냥 화가가 아니라 당신을 ‘여류’ 화가라 부르는 사람들이 많았겠지요?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추앙되거나 깎여 내려지는 경우는 많다. 여배우, 여의사, 슈퍼우먼, 슈퍼맘이란 말을 보자. 얼핏 보면 추앙의 의미로 보이지만 사회가 규정해놓은 여성상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를 칭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말로도 보인다. 수식어는 대상을 구체적으로 규정하려 한다. 이름 붙이고 낙인을 찍고 평가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평가! 그렇다, 평가가 포함되어 있다. 남자 의사, 남자 작가, 남자 외교관, 남자 대통령이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인간의 기본값을 ‘남자’로 둔 이 사회의 사고방식 때문이다. 그리고 언어는 사회의 사고방식을 반영한다. ‘여류’라는 말엔 여성을 세상(남성)의 아류로 전락시키려는 함의가 들어 있다.”

요 며칠 당신이 남긴 글을 읽으며 당신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해봐서일까요. 생각 끝에 당신이 서 있습니다. 흔히 문화 비평을 할 때 평론가들이 여성을 ‘대상화’하지 말라고 지적하잖아요? 사전에서 대상(對象)이란 말을 찾아보니 “어떤 일의 상대 또는 목표나 목적이 되는 것”이라고 나오더군요. 여성은 누군가의 상대, 누군가의 목표나 목적으로서 칭송받거나 비판받는 존재로 취급받으며 살아왔습니다.

어릴 때 여자 어른들에겐 자기 이름이 없었습니다. 누구의 어머니,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로 불렸지요. 지금은 달라졌다고 하지만 글쎄요. 도돌이표처럼, 수시로 돌아가지 않나요? 누구의 누구로. 자기 옆에 붙은 수많은 수식어들을 돌보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여성들, 여전히 많지 않나요? 그 많은 것을 돌보고 난 뒤, 그럼에도 자기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려 성공을 거둘 때, 여성 앞에는 작위처럼 ‘슈퍼’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뛰어난 남자에겐 슈퍼맨이란 칭호를 붙이진 않지요. 그들에게 슈퍼맨은 그저 영화 캐릭터입니다. 남성의 뛰어남, 그건 익숙한 일이니까요. 그들은 역사적으로 오랜 시간 동안 ‘훌륭하게 살도록’ 주문받아 왔으니까요.

여성으로 산다는 건 플러스나 마이너스 부호를 달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나 평가받아 왔기 때문이지요. 부호 없이, 그냥 나 자신. 나 이외의 무엇으로도 평가받지 않을 권리가 우리에겐 필요합니다.

경기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 나혜석 거리에 있는
나혜석 동상. © 뉴시스
“남자는 칼자루를 쥔 셈이요, 여자는 칼날을 쥔 셈이니 남자 하는 데 따라 여자에게만 상처를 줄 뿐이지. 고약한 제도야. 지금은 계급 전쟁 시대지만 미구에 남녀 전쟁이 날 것이야. 그리고 다시 여존남비시대가 오면 그 사회제도는 여성 중심이 될 것이야. 무엇이든지 고정해 있지 않고 순환하니까.” 1)

1933년 2월 28일자 《조선일보》에 당신이 발표한 글을 읽으며 전율했습니다. 곧 여성이 중심이 되는 사회가 올 거라는 당신의 예언에 두근거렸습니다. 이미 지금을 살아가는 여성들은 달라졌습니다. 옛날엔 당신과 같은 분이 적었기에 당신 홀로 외로운 투쟁을 해야 했지만, 여성들조차 여성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지금 여성들은 서로 연대합니다. 불평등에 대해 논쟁하고, 글을 쓰고, 행동을 바꾸려고 합니다. 용기를 내 발언하고, 서로의 발언을 지지합니다. 여성 서사가 주가 되는 시와 소설, 영화를 만들고 향유합니다. ‘벡델 테스트’라는 걸 만들어, 영화 속에서 여성이 꼭두각시처럼 사용되고 버려지는 일을 비판합니다.

이 모든 건 우리에 앞서, 당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성을 종 아니면 사유재산 정도로 여기던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라고 일갈한 당신 덕분입니다. 조선 사회의 인심을 탓하며 “여성을 보통 약자라 하나 결국 강자이며, 여성을 작다 하나 위대한 것은 여성”이라고 만천하에 외친 당신 덕분입니다.

“조선은 어떠한가? 조금만 변한 행동을 하면 곧 말살시켜 재기치 못하게 하나니 고금의 예를 보아라. 천재는 당시 풍속 습관의 만족을 갖지 못할 뿐 아니라 차대(次代, 다음 때)를 추측할 수 있고 창작해낼 수 있나니 변동을 행하는 자를 어찌 경솔히 볼까보냐. 가공할 것은 천재의 싹을 분질러놓는 것이외다. 그러므로 조선 사회에는 금후로는 제1선에 나서 활동하는 사람도 필요하거니와 제2선, 제3선에 처하여 유망한 청년으로 역경에 처하였을 때 그 길을 틔워주는 원조자가 있어야 할 것이요, 사물의 원인 동기를 심찰하여 쓸데없는 도덕과 법률로써 재판하여 큰 죄인을 만들지 않는 이해자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이혼고백장’이란 제목으로 당신이 쓴 글의 일부입니다. 당신은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수중에 돈 한 푼 없이 쫓겨나듯 이혼을 당했습니다. 그 심정이 얼마나 답답하고 원통했으면, 이혼고백장이란 형식의 전대 없는 글을 쓰게 했을까요? 솔직하고 자기성찰이 담긴, 이 문제적 글이 당신을 조선 사회에서 더 고립된 존재로 만들었다는 건 사실이지요. 천재의 싹을 분질러놓는 게 이 나라의 취미일까요?

문득 서늘해집니다. 남성이라면 하지 않아도 되었을 존재 증명, 존재의 평등할 권리를 당신으로부터 작금의 여성들까지, 이토록 오래 주창해야 하다니요. 미래의 여성들은 우리와 또 다른 시간을 맞이하겠지요? “나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후회합니다”라고 당신은 말했지만, 기억하세요. 당신을 괴롭힌 시대와 남성중심사회의 사람들은 잊히지만, 당신은 아니에요. 당신 이름 ‘나혜석’은 비석처럼 남아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우리는 여전히 당신을 생각합니다. 당신이란 존재에 감사드립니다.

1)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나혜석, 민음사, 9쪽.
2)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나혜석, 민음사, 201쪽.
  • 2020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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