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부부가 예술가에게 보내는 편지 (11)

고독의 정점을 빚은 조각가 권진규 선생에게 上

고독이라는 작위

나는 당신의 〈가사를 걸친 자소상〉 도판을 보고 전율하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어요.
긴 목에 민머리, 허공을 매섭게 응시하는 눈, 솟은 콧대,
꽉 다문 입매, 이 얼굴에 서린 삼엄한 침묵은 이 세상의 어떤 오탁도 감히 침범할 수 없는 깨끗한 고독의 응결이었지요.
서울 성북구 동선동 아틀리에에서 작업 중이던 조각가 고 권진규. © 권진규기념사업회
“인생은 공(空), 파멸(破滅)”이란 유서를 남기고 죽은 한 천재 조각가를, 부모 형제가 묻힌 망우리 공동묘지에 유해가 안장된 그 사람을 아십니까? 아틀리에 한쪽 벽에 “범인(凡人)엔 침을, 바보엔 존경을, 천재엔 감사를”이란 휘갈긴 글귀를 남기고 떠난 당신, 비극을 양조(釀造)하는 운명 속에 투신한 당신, 우리에겐 오랫동안 잊힌 당신을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지요. 말과 양의 머리, 불상들, 비구니와 사미승, 지원·애자·경자·혜정·선자·명자·예선·희정·순아와 같은 평범한 이름의 여자 두상을 빚은 아름다운 테라코타를 남긴 당신, 조각으로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고독의 견결함을 빚은 뒤 표표히 적멸의 길로 들어선 당신 이름은 권진규(1922~1973)입니다.

인간은 고독합니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고, 타인과의 친밀한 애착 욕구가 들끓는 한 이 말은 진실을 담보하겠지요. 외롭다고 다 고독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고독과 외로움을 혼동합니다. 외로움이 느낌이고 감정의 한 형태라면, 고독은 실존에 대한 깊은 인지적 각성에 더 가깝지요. 누군가 ‘나 외로워!’라고 말한다면 그건 혼자 고립되어 있을 때 겪는 우울한 감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계-내-존재로서 겪는 외로움은 얇은 고독, 연소가 되지 않는 불완전한 고독이지요. 외로움은 누구나 겪지만 고독은 아무나 겪을 수 없어요. 자기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얻은 고독을 존재의 도약대로 삼는 자들이 있습니다. 극히 소수에게만 고독은 대의이고, 이념이며, 존재의 역량이겠지요.

또 누군가에게 고독은 피의 불가피한 기질, 즉 인간 본성의 중요한 성분일 테고요. 고독은 예술가들이 선택하는 자기 수련의 길이자 명예로운 작위(爵位)입니다.

1973년 5월 4일 오후 6시, 서울 성북구 동선동의 좁은 아틀리에로 서향의 창을 통해 뉘엿뉘엿 지는 해가 쏟아내는 빛이 벽면을 물들일 시각이었지요. 이 세상에서 가장 고독했던 조각가 권진규, 당신은 유서와 장례비용을 남기고 이승의 고독과 작별을 고하지요. 미의 피안 길에서 고독을 벗 삼아 방황하며 제 몸을 불사르던 당신! 당신은 그렇게 고독이라는 작위를 얻고 순교자의 반열에 들었습니다.

당신은 일제강점기 때 함흥의 한 유복한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권정주는 일본 와세다대학 상과를 졸업하고 광산업과 석유 도매상 등을 경영하며 부를 일군 인물이지요. 당신은 두 해 동안 늑막염을 앓은 탓에 뒤늦게 함흥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사업체가 있던 강원도의 춘천고등보통학교를 다녔어요. 호걸을 꿈꾸며 호연지기를 탐하던 춘천고보 시절 당신은 성적이 뛰어났지만 예술가의 기질이 돋보인 건 아니었죠.

1943년 2월, 당신은 도쿄에서 의과대학에 다니는 형 권진원을 따라 경성을 거쳐 철도편으로 부산으로 내려가 부산항에서 관부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22세의 청년은 도쿄에서 미술강습소를 다니며 미술대학 입시 준비를 하던 중에 징용을 갔지요. 당신이 일한 곳은 도쿄 근처 다치가와에 있는 비행기 제조공장 히다치공장이었어요. 그러다가 일본을 탈출해 고향으로 돌아와 징용을 피하기 위해 함흥 교외에 동굴을 파고 세 계절을 숨어 지냈습니다. 해방 이듬해 이쾌대라는 천재 화가가 운영하는 서울의 성북회화연구소에 다니며 그림 공부에 전념했지요.

1948년 8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미술 공부를 할 기회를 잡는데, 당신이 일본행을 서두른 건 의대를 졸업한 형이 폐렴에 걸려 병간호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지요. 당신은 형의 병간호를 하면서 사설 학원에서 미대 입시 준비를 했습니다. 이듬해 형이 죽고, 당신은 일본 무사시노미술대학 조각과에 입학했어요. 로댕의 정통을 이은 부르델 문하에서 서양 근대 조각을 익힌 시미즈 다카시에게서 조각의 기초 문법을 사사한 것은 당신의 행운이었습니다. 1952년 도쿄미술관 공모전에서 석조 작품 입상을 시작으로 특선과 입선을 하는 한편, 동북아시아 고대 예술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을 잇달아 내놓으며 두각을 보였지요.

1959년 9월, 당신은 돌연 귀국을 서두릅니다. 당시 동거하던 무사시노미술대학 동창인 일본인 여성 도모와의 혼인신고를 마치고, 형의 유골과 작품들을 안고 전쟁으로 헐벗은 고국으로 돌아왔지요. 그 결단은 “탈바꿈에의 내적 요청”이라는 절박함이 부추긴 것이었지만 그 귀국은 결과적으로 잘못된 선택이 되었어요. 당신이 가난과 고독에 휘둘리고, 불행의 막다른 골짜기로 내몰리는 빌미가 되었으니까요.

그 많던 아버지의 유산은 친지의 사업 실패로 날아가고, 당신에게 돌아온 건 성북구 동선동 언덕에 지은 작은 가옥 한 채뿐이었습니다.

아내 도모가 일본으로 돌아가고 여섯 해 동안 혼자 살던 중 한때 전화 교환원인 여성과 재혼을 했지만 곧 헤어졌지요. 일본에서 우편으로 보낸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고 도모와의 혼인 관계를 정리한 것은 1965년이었어요. 그 뒤 고독이라는 내상을 입은 당신은 줄곧 혼자 지냈습니다. 서울대, 홍익대, 덕성여대, 수도여사대 등에 출강하며 작품에 전념하지만 국내 화단은 당신을 외면했지요. 1971년 12월, 명동화랑 개관 1주년 기념 〈권진규 조각작품전〉을 연 김문호 명동화랑 대표는 당신의 조각을 사달라고 팔방으로 뛰어다녔지만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사회 전체가 ‘천재의 작품’을 냉대한 것에 절망하고, 그 절망 끝에 뱉은 “끝내 고사(枯死)하리라”라는 당신의 말은 훗날 맞을 자기 파멸의 예언이 되었지요.

국내 화단의 고질인 파벌의식, 고혈압과 신장염 같은 질병의 피습, 뼛속까지 파고드는 가난과 고독에 진저리치던 당신은 삶의 구질구질한 누추함을 연장하기보다 깨끗한 절명을 택했던 거지요.

당신은 왜 죽었나요? 고독한 탓인가요?

아니면 절망과 따돌림 탓인가요?

<가사를 걸친 자소상> 테라코타에 채색, 47.5x38x20cm, 1970년대 초. © 뉴시스
당신과 나는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만 나는 당신의 〈가사를 걸친 자소상〉 도판을 보고 전율하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어요.

긴 목에 민머리, 허공을 매섭게 응시하는 눈, 솟은 콧대, 꽉 다문 입매, 이 얼굴에 서린 삼엄한 침묵은 이 세상의 어떤 오탁도 감히 침범할 수 없는 깨끗한 고독의 응결이었지요. 성(聖)과 속(俗), 착란(錯亂)과 평상(平常)의 길 어딘가에서 번민하며 돌아오는 당신, 오른쪽 어깨를 감싼 주황색 가사는 그 침묵의 기원이 어딘지를 짐작케 하지요.

당신의 고독에 명예를, 고독을 외면한 얕은 대중의 즐거움에는 치욕을!

지금 머무는 그곳이 당신이 찾은 영원한 미의 피안이기를 빕니다.

장석주
전업 작가. 파주에 살며, 음악과 산책을 좋아한다. 주로 글을 쓰거나 인문학 강연을 한다.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철학자의 사물들》 《이상과 모던뽀이들》 《마흔의 서재》 《일상의 인문학》 《호젓한 시간의 만에서》 등과, 아내인 박연준 시인과 함께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 《내 아침 인사 대신 읽어 보오》를 썼다.
  • 2020년 11월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보내기
  • 목록
  • 프린트
나도 한마디
이름      비밀번호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today's pick

magazine 인기기사

topp 인기기사

daily 인기기사

더 볼만한 기사

10개더보기
상호 : ㈜조선뉴스프레스 / 등록번호 : 서울, 자00349 / 등록일자 : 2011년 7월 25일 / 제호 : 톱클래스 뉴스서비스 / 발행인 : ㈜조선뉴스프레스 이동한
편집인 : 이동한 / 발행소 : 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34, 13층(상암동, 디지털큐브빌딩) Tel : 02)724-6875(독자팀) / 발행일자 : 2017년 3월 29일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민희 / 통신판매신고번호 : 2015-서울마포-0073호 / 사업자등록번호 : 104-81-59006
Copyright ⓒ topclass.chosun.com All Rights Reserved.

조선뉴스프레스 | 광고안내 | 기사제보 | 독자센터 | 개인정보 취급방침 | 인터넷신문윤리강령 | 청소년보호정책 | 독자권익위원회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