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이슬의 커피코피해피#10

엄마의 벽지, 절망과 코미디 사이

글 : 강이슬 

실수를 하거나 기죽을 일이 생기면 옛날에 살았던 집을 떠올린다. 부모님이 드디어 ‘내 집 마련’을 하던 날 우리는 처음으로 집에 도배를 했다. 솜씨 좋은 아빠가 화이트 톤의 깔끔한 벽지로 오래된 아파트의 세월을 감추었다.

어느 주말 목적 없이 돌아가던 TV 채널은 한 인테리어 전문가가 포인트 벽지 활용법을 설명하는 장면에서 멈췄다. 다음 날 아빠는 고급스러운 녹색 바탕에 은은한 꽃무늬가 있는 벽지로 TV 뒤편의 벽을 발랐다. 한쪽 벽에 포인트를 줬을 뿐인데 과연 인테리어 전문가의 말대로 집이 한층 더 세련돼 보였다. 나랑 동생은 그저 신이 났고, 작은 공사를 책임진 아빠는 뿌듯한 표정이었으며, 엄마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것은 뭔가를 결심한 사람의 눈빛이었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나는 평일엔 기숙사 생활을 하고 주말만 집에서 보냈다. 그다음 주말에 집에 돌아와 보니 포인트 벽지가 하나 더 늘어 있었다. 부엌 한 면이 웬 울창한 대나무숲으로 꽉 차 있었던 것이다. 엄마가 직접 골랐다는 대나무 벽지를 마주 보며 밥을 먹는데 중국집에 온 기분이었다.

벽지에 대한 칭찬을 내심 기다리던 엄마는 한참이 지나도록 내 입에서 별 얘기가 없자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들뜬 표정으로 물었다.

“시원하고 탁 트여 보이지? 부엌도 더 넓어 보이고.”
“음…. 팬더 나올 것 같아.”


세트장을 방불케 하는 여긴 어디? 난 누구?

그다음 주에 집에 갔더니 포인트 벽지가 또 늘었다. 울창한 대나무숲 맞은편에 촌스러운 꽃잔디가 꽉꽉 피어 있었다. 집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점점 산으로 가고 있었다. 엄마한테 이게 당최 무슨 해괴한 인테리어냐고 물을 작정으로 안방 문을 열었더니 안방 벽에 새롭게 덧댄 핑크색 포인트 벽지가 놀리듯 나를 맞았다.

“엄마, 벽지가….”
“딸~! 어때? 예쁘지?”

엄마의 흡족한 표정을 마주하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미 발라버린 벽지. 다시 뜯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하려던 말을 삼켰다. 옷을 갈아입으려고 내 방 문을 여니 천장이 날아가고 없었다. 엄마가 하늘과 구름이 어우러진 벽지로 바꿔놓은 것이다. 황망한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던 나에게 아빠가 다가왔다. 아빠는 며칠 만에 꽤 수척해져 있었다.

“아빠, 이게 다 뭐야?”
“미안하다, 딸.”
“엄마 말렸어야지.”
“엄마를 어떻게 말려.”
“그렇다고 시키는 대로 다 하면 어떡해! 집이 이게 뭐야. 우리 집이 연극 세트장이야?”
“딸, 아직 주방은 못 봤지?”
“…왜? 대나무랑 꽃잔디 말고 또 뭐가 있어?”
“싱크대가 클라이맥스야.”

아빠가 고개를 숙였다. 집에 온 지 10분도 안 됐는데 공포영화 한 편을 본 것처럼 기가 빨렸다. 아직 클라이맥스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마음을 다스리며 침착하게 주방으로 걸어갔다. 꽃잔디에 시선을 빼앗긴 탓에 미처 보지 못했던 싱크대 수납장이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빨간 꽃으로 범벅된 끔찍한 시트지가 수납장을 덮고 있었다. 안 그래도 못생긴 디자인인데 엉망진창인 마감 때문에 더 최악으로 보였다. 시트지는 잔뜩 울어 있었고 애초에 잘못 잘랐는지 여러 번 덧댄 조잡한 흔적이 보였다.

아빠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며칠 전 퇴근하고 돌아왔더니 엄마가 웬 촌스러운 시트지를 들고 아빠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을 싱크대 수납장에 발라달라고 하기에 아빠는 도저히 그것만은 못 하겠다며 눈을 딱 감고 버텼다. 주말에 집에 오는 큰딸에게 드라마틱하게 업그레이드된(?) 인테리어를 선보이고 싶었던 엄마는 아빠가 출근한 사이 혼자서 시트지를 발랐고 결과는 참혹했다.


“그냥 웃기다고 생각해. 그럼 웃기니까”

기숙사로 떠나기 전, 내 방 침대에 누워 맑고 청량한 가짜 하늘을 바라보며 엄마를 어떻게 말려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다 더 이상 포인트를 줄 벽도 남아 있지 않아서 별말 하지 않고 집을 나왔다.

그다음 주말, 집에 와보니 싱크대의 빨간 꽃은 현관 신발장까지 뿌리를 뻗은 상태였다. 베란다 새시는 바닷속으로 변해 있었다. 하늘거리는 해초와 헤엄치는 물고기가 있는 꽤 리얼하게 구린 시트지였고, 그것은 욕실 문에도 떡하니 한자리 차지하고 있었다. 지난주 엄마의 추진력을 과소평가한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더 이상 엄마가 새집을 망치도록 둘 수 없었다.

“엄마, 벽은 그만 꾸미자. 넓지도 않은 집이 죄다 포인트여서 이제 뭐가 진짜 포인트인지도 모르겠어. 인테리어 망한 것 같아.”

엄마는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안 망했어.”
지지 않고 받아쳤다.
“망했어.”
“그냥 웃기다고 생각해. 그럼 웃기니까.”

예상 밖의 대답에 얼빠진 표정으로 몇 초쯤 있었던 것 같다. 엄마 말이 너무 맞는 말이어서 더 이상 화낼 수도 없었다. 우리 집은 정말 웃겼다. 황당한 표정으로 실실 웃고 나니 뱃속에 꽉 차 있던 불만이 순식간에 쪼그라들었다.

기회를 놓치거나 크고 작은 실수를 하거나 손해를 보거나 어쨌든 좀 망했다 싶을 땐 그날의 엄마를 흉내 낸다. 태연하고 우아한 표정으로 웃기다고 생각해버리자고 혼잣말을 한다. 이 짧은 한 문장은 깜깜한 절망에 빠져 있던 나를 순식간에 블랙코미디나 시트콤의 한 장면 속으로 데려다놓는다.

글쓴이 강이슬은 〈SNL 코리아〉 〈인생술집〉 〈놀라운 토요일〉 등 TV 프로그램에서 근면하게 일하며 소소하게 버는 방송작가다.
제6회 카카오 브런치북 프로젝트에서 《안 느끼한 산문집》으로 대상을 받고 출판 계약을 하며 난생처음 갑이 됐다. 술과 개와 밤을 좋아하고 욕을 잘하지만 착하다.
어제도 오늘도 가난했고 내일도 가난하겠지만 가난을 팔아 돈을 벌겠다는 야심 찬 포부를 가지고 있다.
  • 2020년 10월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보내기
  • 목록
  • 프린트
나도 한마디
이름      비밀번호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today's pick

magazine 인기기사

topp 인기기사

daily 인기기사

더 볼만한 기사

10개더보기
상호 : ㈜조선뉴스프레스 / 등록번호 : 서울, 자00349 / 등록일자 : 2011년 7월 25일 / 제호 : 톱클래스 뉴스서비스 / 발행인 : ㈜조선뉴스프레스 이동한
편집인 : 이동한 / 발행소 : 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34, 13층(상암동, 디지털큐브빌딩) Tel : 02)724-6875(독자팀) / 발행일자 : 2017년 3월 29일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민희 / 통신판매신고번호 : 2015-서울마포-0073호 / 사업자등록번호 : 104-81-59006
Copyright ⓒ topclass.chosun.com All Rights Reserved.

조선뉴스프레스 | 광고안내 | 기사제보 | 독자센터 | 개인정보 취급방침 | 인터넷신문윤리강령 | 청소년보호정책 | 독자권익위원회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